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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공감

숨겨야 산다 (추가됨ㅋ)

2012.06.29 12:12 1,032 32 0 0

본문

혹시라도 호기심에 시간을 빼앗기는 분들을 위해서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이 이야기는 읽어보는 재미가 있다거나 일정한 수준의 문학적인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다거나
제 사상이나 감정을 잘 다스려서 정제한 후에 어떤 주장의 핵심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내용은 전혀 아닙니다.

지난 밤에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두서없이 적어내려간 넋두리에 불과합니다.
부디 이점을 충분히 고려하셔서 바쁘신 분들께서는 가급적이면 읽지 말고 그냥 지나가시기를 삼가 부탁드립니다. ㅋ
이글은 오직, 오늘따라 시간이 무척 많이 생겼고 딱히 할 일도 없는 분들의, 시간 때우기용으로 마련한 글일 뿐입니다.

며칠 전에 겨울해마님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읽으면서 희미하게 떠오른 옛날 기억 몇 가닥이 있었는데
내용이 흥미를 유발할 정도는 아니었고 주제도 뚜렷하게 부각되는 얘기가 아니다보니 그냥 묻어두려다가
어제 저녁 11시경부터 축구 경기를 기다리면서 장난삼아 심심풀이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저도 모르게 무려 네 시간이나 매달려 있었다는 걸 문득 알게 되어
황급히 중도에 멈추고 컴퓨터를 꺼버리자마자 거실로 TV를 보러 달려 나갔습니다. ㅋ
벌써 전반전이 시작된 지 11분이나 지났더군요.ㅋ

방금 전에 다시 열어보니 한두 시간에 마무리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라고 판단했고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이 아니면 며칠 두고 보다가 그냥 지워버릴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는 차원에서 아직 미완성인 이야기를 이곳에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야 나중에라도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크흐흐~





고등학교 2학년 5월 하순의 어느날이었소.
한창 졸고 있는 점심 시간에 교실로 친구 '이진수'가 찾아왔더이다.
(그 무렵엔 2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밥을 먹어치우는 일이 유행일 때라서
점심 시간엔 밖에 나가 공을 차거나 교실 책상에 얼굴을 묻고 낮잠을 자는 일에 할애할 수 있었다오.)
중학교 동창이자 1학년 때 한 반이었고 2학년에 올라가면서 이과(理科)로 간 놈이었지.
내가 그때까지 알고 지내던 놈 중에 공부를 가장 잘 하는 놈이기도 했소.

학습 능력이라는 것도 사람이 갖고 있는 다면적인 능력 중에 하나의 재능에 불과하겠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의 현실은 물론, 학교 현장에서 인정하는 재능의 우선순위라는 게 있지 않겠소.ㅋ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기회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놈은 중학교 시절부터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고 장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오.
약간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구석도 있는 터라 일부 친구들은 그놈을 꽤 경원하기도 하고 그랬소.

하지만 그날 나를 찾아온 그놈은 어딘가 의기소침해져 있었고 약간 성마른 기색마저 내보이더이다.
원래 그놈은 중3때부터 머리에 새치가 돋아나기 시작했는데 한동안 답보 상태를 보였던 흰머리가
그날따라 훨씬 많아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얼굴마저 푸르뎅뎅한 것이 영 사람 꼴이 아니더란 말이지.

빈 앞 자리에 앉아 뒤를 돌아보며 나랑 얘기를 하면서도 눈알이 수시로 흔들리고 때론 두리번거리기 일쑤였는데
내가 그놈의 행동에 눈빛으로 반응을 보이자 저도 제놈의 수상한 행동이 노출 된 것을 느꼈는지
곧바로 자세를 가다듬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용건을 꺼내더이다.
"1학년 때 내가 쫓아다니던 차현옥 알지? 니가 편지 대필도 자주 해줬잖냐!"

제가 속으로 '이런 쌍~ 이 쉐키, 한동안 조용하더니 또 편지 대필이로구나!'하면서 귀찮다는 듯이,
"그런 짓을 한두 번 해봤어야 기억을 하지, 내가 여태껏 대필해준 놈이 다섯 놈도 넘느니라!
하지만 요즘엔 수전증이 생겨서 글씨의 모양이 수준에 한참 미달하는도다!
아쉽지만 대필 서도계에서 은퇴한 지 좀 되었노라!"하면서 둑을 높히 쌓았더니,
이진수가, "니네 국민학교 동창이고 여고 다닌다는 차현옥, 좌현동에 사는 애 말이다, 기억나지?"하길래,
내가 "기억이 아사무사하노라. 한데 그동안 재미좀 봤냐?"하면서 대뜸 태도를 바꾸어 근황을 물었다오.  

그러자 그놈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는데 그 찌질하고 구차한 하소연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소.

어느날, 한 여학생을 보자마자 운명처럼 반해서,
어렵게 신상 명세를 알아내곤 1학년 여름부터 열심히 쫓아다녔는데,
처음에는 제놈이 알고 있는 다른 여학생을 통해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편지로 전하기 시작했지만
여러 번 반복되는 의사 표시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영 시원찮길래,
그 여학생이 저녁에 늘 다니는 학원 길목에서 기다리다 직접 만나서 편지를 건네보기도 했지만,
누차에 걸친 정중한 교제 청탁에도 불구하고, 좋다 싫다 도통 반응을 보이지 않더라는 거요.
어떤 날은 집앞에 찾아가 기다리면서 본격적인 대화를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철저한 외면과 한결같은 무관심뿐이었다고 하더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그 여학생이 자주 다니는 집앞 길목의 가로등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그날따라 무시하며 지나치질 않고 그놈 앞으로 또박또박 다가오더라는 거요.
그러니 그놈이 얼마나 긴장했겠소. 아마 새가슴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했을 거요.

한데 그놈 정면에 마주서자마자 가방에서 뭔가를 한뭉치 꺼내 들더라네.
수십 통의 편지를 노란 고무줄로 차곡하게 묶어놓은 것인 줄은 조금 후에야 알아챘다더군.
이윽고 여학생은 매우 또렷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하기를,
"그동안 받았던 편지인데 단 한 통도 뜯어보지 않았으니 확인해 보시라"면서
애초의 불길한 예감처럼 무심하게 건네 주더라네.

그러면서, "앞으론 이런 짓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서늘하고 강경한 통첩을 덧붙이길래,
그놈이 재차 진심을 열어 보이며 애걸복걸했지만
제대로 들어주기는 커녕 대뜸 그놈 말을 끊어버리더니,
"편지 가져가지 않을 거면 제가 이 자리에서 처리하겠어요."하면서
갑자기 편지를 좍좍 찢더니 둑방길 옆 배수구 맨홀 속으로 가차없이 던져 넣더라는 거요.
(히야! 일견, 통쾌한 장면 아니겠소! ㅋ)

순간, 그놈은 가슴이 미어지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굴욕감에 쉽싸이고 말았는데
한편으론 억울한 심정이 복받쳐서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몇 마디 격렬한 항변을 이어나갔으나
돌덩이처럼 요지부동이었던 여학생은 다 듣지도 않고 싸늘하게 몸을 돌리더니
단정하고 신속한 걸음으로 집에 들어서자마자 대문을 닫아걸고 말았다더군.

자~ 웬만하면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것이 건전한 청소년의 상식적인 행동 아니겠소? 으하하~

하지만 그놈도 보통 놈은 아닌지라 도저히 그쯤에서 단념할 생각을 할 수 없었던 모양이오.  
그때부턴 더이상 직접 만나거나 편지를 전하는 짓은 부작용을 우려해서 차마 감행하지 못 했지만,
언제나 귀를 쫑긋 열어두고 여러 경로를 통해 여학생의 근황에 관한 정보를 매일 매일 업데이트하면서,
과부 속사정을 엿보는 홀아비마냥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실로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해바라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던 거요.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학년이 바뀌어 나를 찾아오기 며칠 전,
그놈의 동네 친구인 또다른 여학생이, 다니던 교회에서 확실하게 목격했다면서,
'차현옥'이 '사윤기'랑 사귀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그놈에게 우연히 누설하고 말았다오.
예기치 못한 비보를 접한 '이진수'는 며칠이나 어쩔 줄 모르면서 번민하다가
마침내 모종의 대책을 수립했던 모양이오. 그날 나를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대책의 일환이었고.  ㅋ

'사윤기'는 내 국민학교 동창이기도 하면서 당시(2학년) 같은 반이었는데,
내 자리에서 보면 남서쪽으로 한 분단 건너 중간쯤에 자리한 놈이었다오.  
그놈은 키도 훤칠한데다, 몇 년전에 방송에서 유행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간고등어 타입'의 전형이었는데
얼굴도 매우 잘 생겼으며 거기에 더해 외모를 가꾸는 일에도 추호의 소홀함이 없었던,
그야말로 지방 중소도시 따위에선 좀처럼 적수를 만나기 힘들 정도로 빼어난 외관을 구비한,
개신교회 학생부 계통의 사교계에선 킹카로서 선두를 달린다는 평판을 누리는, 그런 특 A급 인물이었소.
(나조차 교회 다닌다는 놈들에게 그의 거룩한 위용을 가끔 전해 들었을 정도이니...)

이러니 그 즈음에 뭘 해도 안 풀리던 내 친구 이진수는 한층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렸다고도 볼 수 있지 않겠소.
더구나 동네 친구 여학생의 전언에 의하면, '차현옥'이 더 적극적인 교제 태도를 드러내보였다고 하더이다!
일 년여에 걸친 이진수의 끈질긴 구애조차 똥파리 쫓아내듯 간단하게 물리쳤던 그녀가
다른 놈도 아닌 그 날라리 놈과 붙었다니, 이진수는 일시에 비탄에 빠져 들어 도무지 헤어날 줄 모르다가,
어느날 문득 이대론 도저히 물러날 수는 없다는 오기 비슷한 심사도 속에서 솟구쳐 오르길래,
비록 희박한 희망이긴 하지만 '사윤기'놈의 행태로 보아 둘의 관계가 길게 이어지진 않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고
그저 후일을 기약하는 심정으로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하기로 마음 먹었던 모양이오.

'하던 일'이라고 해봐야 딴짓은 아니고, 그저 예전처럼 '차현옥'의 소식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챙기는 일이었다오.
나를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는데,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윤기'가 바로 우리반 아니었겠소!
그놈의 부탁은 다른 게 아니고, 내가 사윤기랑 오래 알고 지냈으니 앞으로 그와 얘기할 기회가 닿으면
요즘 새로 만나는 여자 친구에 대해 자연스럽게 물어봐 달라는 부탁이었소.
나는 그놈이 하도 찌질하고 불쌍해 보여서 차마 거절하지는 못하고 그러겠다고 응낙하고 말았다오.  

다음날 오후에 체육 시간을 맞아 친구 몇이서 설렁설렁 공을 차고 있었는데
운동장 서쪽 구석에 설치되어 있는 평행봉, 철봉 근처에서 마침 사윤기가 몸만들기에 열중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소.
곧바로 사윤기에게 다가가선 물었다오. "초딩 동창인 차현옥하고 연애질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사실이냐?"
그러자 그놈이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히죽거리면서. "벼락처럼 만나서 천둥처럼 사귀노라!"
그래서 내가, "차현옥이는 내 초딩 시절 기억으론 코도 찔찔거렸고 별 매력이 없던데 어찌 코가 꿰었느냐?"
그러자 그놈이, "언제적 얘기를! 지금은 키가 165cm나 되고 미색이 천하를 경동케 하노라!"하길래,
내가 아니꼬운 듯이 "그러다 아주 살림 차리겠다?"했더니,
그놈이 의외로 진지하게 받아치기를, "그럴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노라. 일단 대학부터 가고나서..."

며칠 후, 이진수를 만난 김에 그 소식을 가감없이 아니 약간 과장해서 전했다오.
"이미 결혼까지 염두에 둔 깊은 사이라더라. 양가의 교제 허락도 득했다더라."
말도 채 끝나기 전에 벌써 이진수의 안색이 울긋불긋해지면서 비탄과 격정에 빠져드는데 그거 차마 못 봐주겠더이다.
그래서 내가 진중하게 충고하기를, "이제 포기해라! 차라리 너도 교회나 다니면서 또 알아보면 되지 않겠냐?"
놀랍게도 그놈이, "안 그래도 '추석봉'이가 로터리 클럽에 나가자고 하더라. 큰별 교회도 나가자더군."
내가 반색하면서, "그거 잘 됐네. 추석봉이가 로타랙트 고등부 회장 아니더냐!
그놈과 붙어다니다보면 진짜 괜찮은 쪽으로 하나 얻어걸리는 사람이 틀림없이 생길 거다!"

얼마 후, 이진수는 추석봉을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동시에 로타랙트 클럽 활동도 시작했다오.
원래 이진수는 아홉 살 무렵부터 의형제를 맺은 친구가 자신을 포함해서 다섯 명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놈들 전부가 큰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거 아니겠소!
그 동패 놈들의 평소 행실이나 품성을 놓고보면, 교회나 불당을 드나들기엔 매우 부적절한 놈들이었는데도
뭔 바람이 불었는지 마치 십 년 전부터 다니던 놈들처럼 아주 천연덕스럽게 뭉쳐 교회와 클럽 활동에 매진하더이다. ㅋ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중 '정환진'이란 놈이 길 가다가 우연히 꽂힌 어떤 여학생을 사귀어보기 위해
그 무렵 회장이 되어 클럽 회원 확보에 고심 중이던 추석봉에게 회원 가입을 미끼로 접근해서
그를 빌미로 추석봉이 다니던 교회에도 함께 따라 나가게 되었던 거지.
물론 추석봉은 제놈이 전도를 잘 해서 친구를 그것도 다섯이나 성전으로 인도한 줄 알았겠지만
사실은 정환진이가 찍은 여학생이 그 교회 신도라는 걸 알고 꾸민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거요. ㅋ
이진수와 정환진의 동패들은 의형제의 현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비는 놈들이라
평소엔 마루바닥에 떨어진 콩자반 취급하던 교회 신도 생활도 기꺼이 감수하게 되었던 거지.

그러기를 몇 주, 마침내 '정환진'은 '소윤미'에게 접근할 기회를 잡아 드디어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 멍청한 놈이 소윤미를 대하면 대할수록 깊히 빠져들어 나중에는 헤어나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오.
너무 좋아한 나머지 프로포즈를 했다가 혹시 거절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해서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 하고 있었던 거지.

한데 어느날부터인가 '정환진'이 '소윤미'와 사귄다는 소문이 지역 사교계에 급속하게 펴져나가기 시작했다오.
'지역 사교계'라 함은, 그 도시에서 '남녀상열지사'에 이해 관계가 있거나 촉각을 곤두세우는 놈들을 통칭해서 일컫는 말이오.
(물론 나는, 당신도 익히 짐작하다시피, 다른 고결한 세계에서 탈속한 학처럼 노니는 천외천의 부류였고.)
'정환진'과 '소윤미'에 얽힌 소문은 당연히 그놈 동패들이 정보를 왜곡하고 과장해서 의도적으로 누설한 치졸한 행동의 결과 아니었겠소.
어떻게든 둘을 엮어보려는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수작질이었다오.

사람 사이의 일이란 늘 생각처럼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라, 이런 주변의 소문을 친구를 통해 듣게 된 '소윤미'는
크게 놀라면서 어느날부터인가 교회에서 '정환진'을 만나도 노골적으로 멀리하기 시작했다는 거 아니겠소. ㅋ

급변한 소윤미의 태도에 매우 당황하면서 오히려 그동안 보였던 자신의 소심함을 자책해 마지않던 정환진이
결심을 굳히고 어느날 소윤미를 만나서 마침내 정식으로 고백을 하고 말았다오.
한데 그 결과가 너무나 참혹했던 모양이오.
본인이 제대로 입을 열지 않아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날부터 그놈은 물론 동패놈들 전부가 교회에 발도 들여놓지 않더란 말이지.
추석봉이만 몸이 달아서 학교에만 오면 그놈들을 쫓아다니며 설득에 매달렸지만 씨도 안 먹히는 일이었다오.

이진수도 그렇고 정환진도 그렇고, 하여튼 저 동패놈들은 '청춘사업'에 손을 대는 족족 실패를 겪었는데,
자신들만 몰랐지, 주변의 다른 친구들은 죄다 알고 있었던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는 거 아니겠소! 크흐흐~
일단, 그놈들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품성과 태도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거요.
당시의 또래 여학생들의 익히 알려진 기준에 입각해서 생각할 때,
그야말로 최적화된 '비호감 교보재'로 삼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유형의 물건들이었소.
말도 몹시 상스럽게 하는데다 예의 범절에도 매우 미숙하고 상대를 존중할 줄도 모르는 놈들이었지.

거기에 더해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외관이 너무도 명백하게 저품질이었다는 거요.  

문제는, 그놈들은, 특히 위에서 말한 두 놈은, 지들이 무척 미남인 줄 안다는 거지.
이진수는 세모 대가리에 쪽박귀였으며 소눈깔처럼 툭 불거져 있었고 술쳐먹은 놈처럼 안색도 불그스레했는데
자기는 암만 봐도 김추련을 닯았다면서 스스로의 야성적인 얼굴에 무척이나 기꺼워했던 놈이었고,
정환진은 그때 벌써 이마의 M자가 은근히 도드라지기 시작했는데 얼굴이 누렇고 코가 매부리코였는데도
제놈의 입술이 나름 섬세하고 관능적이라면서 누가봐도 최무룡과 닮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소.
실제로 그놈의 주장처럼 최무룡과 꽤 닮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문제는 오십 먹은 최무룡이었다는 거지.

사람으로 태어나 자신의 외모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특히 청소년 시절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웬만큼은 현실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저놈들은 그런 소양이 기본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소.
이것도 따지고 보면 심각한 결함 아니겠소? ㅋ

아까도 말했지만 그놈들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한 반에서 만나 의형제가 된 사이였다오.
'의형제'라고 하면 어린 시절 한 때의 치기처럼 받아들이기 쉬운데 저놈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거요.
아홉살 어린 나이에 만나서 형제가 되기로 맹세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도록 진짜 형제처럼 지내고 있소.
다섯 중 오직 한 놈만 십여 년 전부터 종적이 묘연한 상태라 요즘 그놈들의 근심이 이만저만하지 않다는 것만 빼곤...

가정 형편도 제각각이었고 취미나 성향도 서로 달랐으며 중학생 시절엔 여러 학교로 뿔뿔히 흩어지기도 했지만,
또 어떤 면에서 보자면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차이라고 볼 수도 있는
학업 성취도 면에서의 현저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나 형제였고 동지였으며 식구였다오.

모두에서 이진수가 공부를 무척 잘 하는 놈이라고 소개했지만,
저놈들 다섯 중에서 이진수와 정환진을 포함한 셋은 공부를 잘 하는 놈들이었던 반면에,
나머지 두 놈은 성적이 하위권을 맴돌던 놈들이었다는 거요.
'그게 어째서 친구 관계에 장벽이 될 수 있겠는가'하겠지만, 실제로 심각한 장벽이 된다고 볼 수 있소.
이유를 따져볼 필요도 없이 우리 사회의 현실, 우리 시대의 학교 현장에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는 거요.

학업 성적이 신분의 귀천을 가른다는 의식이 헌법처럼 굳건했던 시대에는,
코흘리개 시절에 아무리 친했더라도 나중에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업 성취도에서 서로 간에 격차가 많이 벌어지게 되면,
공부를 잘 하는 놈에 대해 어떤 자격지심 혹은 의식의 장벽 같은 것을 품게 마련이고
앞으로의 인생 행로가 우리완 달라질 것이라는 명백한 전망 앞에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그런 가슴아프고 씁쓸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 관계의 종말도 은연 중에 많이 일어난다는 거요.
(내 경험으로 봐도 틀림없이 장벽이 되더이다.)

하지만 저놈들은 전혀 달랐소.
아무리 공부를 못 하는 놈도 공부를 잘하는 놈에게 '돌대가리 새끼'라며 욕하기 일쑤였고
말도 안 되는 무식한 주장을 내세우며 택도 없이 우기는 일에서조차 피차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똑같았다는 거지.
공부 잘 하는 세 놈도 예전과 전혀 달라짐이 없이 형제들을 개차반으로 대할 뿐이었고.
공부 못 하는 두 놈도 자격지심은 커녕 뻔뻔하고 당당하게 상대를 깔아뭉개기 일쑤였다오.

정말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 놈들 아니겠습니까!
여기 누구라도 아홉 살 시절에 의형제 맺자고 친구들과 맹세하고
그 뒤로 사십 년 이상을 한결같이 지낼 수 있는 사람이 흔하겠습니까? 크흐흐~

아차!
얘기가 또 옆길로 빠졌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가 남았소.
그놈들이 청춘사업에서 참담한 실패를 거듭한 진짜 이유 말이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애질이랍시고 하면서 항상 떼로 덤볐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던 거요.
그놈들은 서로 간에 비밀은 커녕 사생활 영역 자체를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사이였기 때문에
한 놈이 청춘사업을 시작할 때면 다른 놈들도 죄다 전말을 알아챌 수 있었고
서로 돕겠다고 나서서 날뛰기 일쑤였는데 진짜 한심한 일은,
당사자로서 연애사업에 나서는 놈조차 그걸 매우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점이었소.
저 위에서 첫 번째 사례로 소개한 이진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오.

예를 들어, 이진수가 마음에 둔 여학생(차현옥)에게 자기 의중을 전하기로 결심했다면,
혼자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찾아가 상대를 만나서 현안을 은밀하고 정중하게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편지를 쓸 때부터 시작해서 대필을 의뢰하는 절차를 거쳐 현장에 미리 나가 예행연습을 한답시고 법석을 떠는 일까지
친구놈들이 전부 나서서 마치 제일처럼 설쳐대는 일을 천연덕스럽게 반복하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이게 어디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ㅋ
게다가 '차현옥'이 나타날 시간이 가까워지면 즉시 현장에서 물러나 어디 안 보이는 곳으로 비켜주어야 하지 않겠소?
그놈들은 이런 기본조차 제대로 지켜주지 않았다오.

시간이 되어 여학생(차현옥)이 나타나서 이진수를 대면하는 것과 동시에 거의 본능처럼 주변을 살피게 되는 것은
당시 시대 형편으로 보아 반드시 수반될 수밖에 없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행동일 텐데
그럴 때마다 그녀의 시야에 포착되는 건 물론이고 느낌으로 금방 그 무리가 이진수의 패거리라는 사실을 알아 챌 수 있는
그런 거리와 공간에 거지떼처럼 모여 힐끔거리면서 노닥거리는 장면을 노출하는 일이 다반사이다보니,  
'차현옥' 입장에선 그리 달갑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상대인 이진수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기도 어려웠을 것이란 말이지.

내가 이진수에게 이점을 누차 지적했고 주의를 환기시켰슴에도 불구하고 그놈은 도통 시정할 줄 모르더이다.
형제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쫓아버릴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말도 안되는 소리만 녹음기처럼 되뇌일 뿐이었다오.

그놈이 차현옥을 자주 만나던 곳은 시내의 중심 도로와 30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나란히 흐르는 하천의 다리 중에서
'풍현교'라는 이름이 붙은 8미터 너비의 다리 서쪽 입구 근처였다오.
요즘의 서울에서 비슷한 곳을 꼽아보자면 바로 청계천의 여러 다리 중 한곳과 매우 유사한 분위기였다오.
서울의 종로처럼 시내의 간선도로가 뻗어있고 그 이면에 나란히 하천이 흐르는 곳이었는데
청계천과는 다르게 동서 방향이 아니라 남북 방향으로 흐른다는 점이 달랐다오.

하지만 그 도시의 간선도로는 4차선인데다 그 이면에서도 청계천처럼 인파로 북적이는 상태는 전혀 아니라서
저녁이 되면 차량은 물론 인적도 거의 끊겨 매우 어둡고 한적한 장소로 변하는데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 불빛만이 나름 운치와 고즈넉함을 더하는 곳이었다오.

하천의 서쪽 뚝방엔 군데 군데 나무 의자가 설치되어 있어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기엔 꽤 적합한 곳이었는데
그 조용한 곳에서 멀지 않은 동네 골목 입구에 꺼주하기 이를 데 없는 군상들이 거지떼처럼 모여
이쪽을 힐끗거리면서 뭔가를 엿보는 듯한 느낌을 풍긴다고 했을 때,
당신 같으면 그에 개의치 않고 마주하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만 오로지 몰입할 수 있었겠소?

그뿐만이 아니었다오.
이놈들은 친구의 청춘사업에 난관이 조성되거나 위기가 발생했다싶으면
너도나도 당사자를 대신해서 나서서 배려도 없이 상대 여학생을 만나 해명이나 설득을 일삼기 일쑤였는데
대체 대갈통 속에 생각이란 기능을 탑재한 놈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행동거지가 안하무인이었다는 거요.
그런다고 친구의 난관이 돌파되고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정말 한심한 놈들 아니겠소! ㅋㅋ

당시에 그놈들의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청춘사업 현황을 지속적으로 청취하면서
내가 비록 그쪽 분야엔 직접 경험이 전무하고 간접 경험조차 일천한 처지였다지만
인간 사회 일반의 기본 윤리랄까 상식이랄까 뭐 이런 기준에 입각해서 나름 조언을 아끼지 않았더랬는데
나중에는 그놈들 하는 꼬라지가 너무 어이없고 한심해서 편지 대필해주는 일조차 강경하게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오.
내가 마치 당사자처럼 그놈들 청춘사업의 전말을 훤히 꿰고 있는 것도 바로 편지 대필 때문이었소.
이진수나 정환진은 물론 조경진이란 또다른 놈의 편지도 여러 차례 대신 써주었다는 거 아니겠소! 크흐흐~

편지를 대신 써주었다고 해서 내용도 대신 꾸며주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너무 나간 거요.
서신의 내용은 부탁하는 놈이 서면으로 혹은 구술로 전달했고 나는 오로지 글씨만 대신 써주었다오.
그렇다면 그놈들은 왜 하필이면 내게 대필을 부탁했을까?
이유야 뭐 간단하지 않겠소. 내가 제놈들보다 글씨를 잘 쓰기 때문이었지.

그렇다면 내가 써놓는 글씨가 그리도 품질이 우수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거요.
단, 그 무렵 내 글씨는 또래들에게 꽤나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당시나 요즘이나 자음을 크고 둥글게 쓰고 모음을 작고 앙증맞게 써놓는 그 흔해빠진 모양은 전혀 아니었고
(이런 글씨는 당시나 지금이나 여학생들이 많이 쓰던데 나는 이런 글씨체를 무척이나 싫어한다오. ㅋ)
그렇다고 당시에 잘 쓴 글씨의 표본처럼 여겨지던 공문서용 펜글씨 서체를 닮지도 않았으며
그게... 굳이 설명하자면, 신명조 스타일의 인쇄체 모양과 아주 흡사했다는 것이지.

억지로 예를 들어보자면, 글씨에 재능이 있는 어떤 사람이 산돌명조 M을 일 년에 걸쳐
최대한 완벽하게 모방하는 연습을 한 끝에 얻어지는 서체 모양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ㅋ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런 글씨 모양을 써낼 수 없다는 거~
옛날 기계식 타자기로 시작해서 맨날 키보드만 두들긴 지 이미 수십 년이라서...

편지를 대필하다보면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낯간지러운 표현도 무시로 동원되는데다
그럴 듯하다고 느낀 표현을 부적절하게 주워섬기다보니 문맥이 뒤틀리는 장면도 다반사이고
상투적인 표현을 답습하는 과정에서 자기 감정을 솔직하고 참신하게 표현하는 일에 끊임없이 실패하는가하면
고민하다 고치고 또 고민하는 과정에서 정작 할 말을 놓쳐버리는 일도 자주 있었기 때문에
말이 대필이지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그런 걸 자꾸 찾아내어 지적하다보면
그놈의 격렬한 동의 하에 결국 내가 내용도 다 꾸며놓는 일이 무척 많았다는 것이지. ㅋ

남의 편지를 지속적으로 대필하는 자는, 아주 가끔은, 그 일을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오.
편지를 보내고 그 반응을 탐색하는 일이란, 꼭 당사자만의 좌불안석은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사업의 진행 과정에 대해 당사자를 닥달해서 그 전말을 청취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머릿속에 해당 정보를 계속해서 축적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당사자보다 상황을 더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일도 가능해지더라, 이 말이지. ㅋ

이진수는 차현옥을, 정환진은 소윤미를 그토록 원했건만 끝내는 두놈 다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는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느낄 만큼 뒷소식도 칙칙하긴 마찬가지였다오.
여기선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조경진의 경우에도 대동소이한 결말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의 충격으로 훗날 서른을 넘길 때까지도 다시는 청춘사업에 뛰어들지 못하고 말았다오.

방금 전에 내가 저 두 놈의 뒷소식도 칙칙하긴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지금부턴 그 얘기를 짧게 해보겠소.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누구나처럼 저들도 예비고사(학력고사)를 치렀지 않았겠소.
당시는 전통 본고사가 갑작스럽게 폐지된 직후라서 대학입시 상황이 그야말로 개판 중에 개판이었다오.
'81학년도, '82학년도엔 서울 주요 상위권 대학의 커트라인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시절이었소.

340점 만점인 학력고사에서 180점인 놈이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는가하면
그 학교의 어떤 비인기 학과는 갑자기 커트라인이 생겨서 훨씬 고득점자가 대거 탈락하는 등의,
요즘으로 보자면 저렇게 입시가 치러지는 것을 과연 용인할 수 있을까싶을 정도로 난맥상을 보였다오.

특히 '82학년도 학력고사는 대학입시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문제의 난이도가 높았는데
전국에서 문과 이과를 통틀어 300점 이상 득점한 놈이 800여 명에 불과할 정도였다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내 기억으로는, 문과에서 300점이면 500등, 290점이면 1천등, 280점이면 2천등이었으며
이과에선 295점이면 전국석차 500등 내외였을 정도였다오.
예년은 물론 직전 연도인 '80학년도에 비해 충격적으로 난이도가 높았다는 '81학년도에 비해서도
평균 30점 정도나 더 내려간 점수 분포를 보였다고 합디다. ㅋ

당시 학력고사를 치르면서 2교시부터 일부 여학교에선 실신하는 학생이 속출했고 통곡하는 자는 부지기수였으며
굉장히 많은 수의 남학생들조차 2교시가 끝나고 점심을 먹지 못해 굶고 말았다오. (물론 나는 자알 먹었고)
그 무렵부턴 학력고사 당일 저녁에 교육방송 TV에서 정답을 발표했는데
너무 떨려서 정답조차 대조해보지 못한 놈들이 우리 학교에서도 무척 많았을 정도였으니
그해 시험의 충격이 얼마나 다대했는지 아마 당신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오. (물론 나는 다 맞춰봤소)

하여튼 그로부터 한달 남짓 지난 어느날, 마침내 학력고사 성적표가 학교에 도착했고
오전 10시가 넘어설 무렵 담임 선생이 교실에 들어와서 '전산처리된' 성적 통지서를 두 장씩 나누어 주었다오.
전산처리된 것이 뭐 특이한 일이라고 굳이 강조하느냐 하겠지만,
당시엔 저런 것조차 좀처럼 접하기 힘든 첨단 기술의 산물이었다는 거 아니겠소. ㅋ
(우리는 사실 그 무렵까지도 맨날 등사된 시험지에 손으로 쓴 통지표만 받아보던 세대였다오.)
한편, 저 시절의 학력고사 성적 통지표는 전부 세 장이 발행되는데
그중 한 장은 학교에 보관했고 개인에겐 두 장씩 나누어 주었다오.

어! 얘기가 또 옆으로 샜다네~ 흐흐
그 해의 학력고사에서 저 다섯 놈들 중에 공부 잘 하는 세 놈의 성적을 굳이 밝혀놓으려는 이유가 있으니
그로 인해 당신의 옛일이 갑자기 떠올라 짜증이 솟구치더라도 잠시만 눌러두고 느긋하게 들어보시오.

먼저 이진수는 이과였는데 전국석차 260등인가 뭐 그렇게 나왔다오.
정환진은 문과였는데 전국석차 2,200등 정도였고 조경진도 역시 문과였으며 전국석차 1,400등 근처였소.
저놈들 점수를 보면 대충 짐작하겠지만 세놈 다 관악산에 있다는 그 대학에 지원하게 되었다오.

이진수는 계부께서 연탄배달부였는데 두 해 전부터 장기 와병 중이라서 최대한 빨리 대학을 졸업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또 그 무렵부터는 사실상 집안의 가장이었기 때문에, 평소 꿈꾸던 의대에 진학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당시엔 단과대학별 모집이었던) 공대에 입학하게 되었소.
그놈은 공대 신입생 1천여 명 중에서 상위 5% 안에 너끈하게 들었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었다오.

조경진은 당시 소계열 모집이었던 사회대 1계열(정치학과, 외교학과)에 지원했고
정환진은 점수가 애매해서 소위 상위권 인기학과는 어렵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안암동에 있는 대학을 권했으나
본인이 죽어도 뱀대가리보다는 용꼬리가 되겠다는 같잖은 이유를 대면서 조경진과 같은 계열에 지원하고 말았소.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해의 입시는 정말 개판이라서 하향 지원이 대세를 이룰 때였는데
그 대학도 예외는 아니라서 대다수 모집 단위에서 대거 미달 사태를 빚었음에도
공교롭게도 조경진과 정환진이 지원한 계열만은 지극히 정상적인 커트라인이 형성되는 바람에
저 두 놈은 그만 1지망에서 낙방하고 2지망 혹은 3지망으로 사범대 모 학과에 합격하게 되었다오.
그러자 두 놈은 별 고민도 없이 입학을 포기하고 재수를 선택하더란 말이지. ㅋ

공부 잘 하는 놈들은 재수도 공짜로 한다는 걸 그놈들의 경우를 통해 알게 되었소.
당시 서울에서 서로 경쟁 관계였던 유명한 학원이 둘 혹은 세 군데 있었는데
그 두 놈은 그중 한 학원에 장학생으로 스카웃되어 학원비도 내지 않고 재수를 할 수 있었다오.

여기 혹시 대입 재수를 해본 분들이라면 '재수생'이란 기묘한 신분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놈들도 그해 5, 6월에 접어들 무렵부터, 애초엔 생각지도 못했던 고민과 갈등에 휩싸여서
공부는 뒷전이고 거의 매일같이 방황하고 절망하는 생활을 근근히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정환진이 옛날 고삐리 시절에 사귀려고 무진 애를 썼던 '소윤미'를 서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오.
그녀도 입시에 실패해서 그 학원에 등록하고 재수를 하고 있었던 거였지.
학원이 워낙 크다보니 같은 학원에 있으면서도 서로 마주칠 기회가 없었던 거요. 으하하~

난감하고 위태로운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던 두 남녀가,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는 절대로 아니었던 두 남녀가,
두 해의 세월을 건너 뛰고 객지에서 운명처럼 마주했으니 그 뒷일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옛날의 서먹하고 불편해하는 감정은 어느덧 사라지고 그저 피차가 아무런 가식없이 솔직하게 서로를 대하고
더 나아가 보듬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 아니었겠소!

그 둘은 재수 생활 내내 마치 부부처럼 지냈는데 말 그대로 침식을 함께 하는 사이였다고 볼 수 있었소.
그해 늦여름에 정환진은 병무청 통지서에 따라 '신검'을 받았고 그 무렵 체력장을 했으며
늦가을에 드디어 '83학년도 학력고사를 치렀는데 거기서 또 예기치 않은 곡절을 겪게 되었다오.

'81, '82학년도에는 예비고사(그때까진 아직도 학력고사란 말이 익숙하지 않을 때라서ㅋ)가 너무 어렵게 출제되어
전국의 대학에서 입학 사정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혼란과 예기치 못한 파란이 속출하다보니
그걸 시정해보고자 '83학년도엔 출제 문제의 난이도를 조정하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너무 쉽게 출제되는 바람에
그 해엔 전국에서 300점 이상 득점한 응시생이 무려 6천 명을 상회하는 지경이 되었다오.

'82학년도의 800여 명에 비하자면 고득점자가 엄청나게 많아졌고
점수별 분포를 살펴봐도 '82학년도에 비해 30점 이상의 점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오.
이젠 문과에서 300점이라고 해봐야 '82학년도로 환산해보면 260점대 후반 밖에 되지 않는 거였소.
결과가 해마다 들쑥날쑥하다보니 이전 두 해의 입시 결과에 의한 대학별 합격선의 기준도 죄다 무용지물이 된 터라서
'83학년도 입시생들도 이전과 마찬가지의 혼란과 파동에 휩싸이고 말았다는 거 아니겠소.
(5공 초기의 이러한 입시 난맥상이 요즘에 일어났다면 아마도 정권 차원의 위기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오.)

함께 재수한 조경진은 321점인가 그랬는데 전국 석차가 400등 언저리였고,
정환진은 315점을 얻었는데 전국 문과 석차로 보면 916등인가 뭐 그랬소.
학력고사 점수만 놓고 보면 전년에 실패한 그 학과에 입학하는 데는 무리가 없는 점수였다지만
내신 1등급인 조경진은 몰라도 사실 그놈(정환진)은 내신 성적이 6등급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또 그놈이 지원하는 학과는 거의 모두가 1등급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또 그해엔 그 점수 근방에 워낙 동점자가 밀도 있게 몰려 있었기 때문에,
내신 성적에서 12~13점을 깎아먹고 합격을 자신하기엔 다소 무리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소.

그놈은 근 한 달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그쪽 대학을 포기하고 안암동에 있는 학교를 지원하고 말았다오.
신촌에 있는 학교도 그랬지만 안암동에 있다는 그 학교는 학력고사 전국석차가 1,400등 이내인 자에게는
4년 장학생으로 선발되는 특전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놈이 마음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준 점도 있었을 거요.

한편, 여학생 '소윤미'는 지방의 한 국립대학 사범대 사회교육과에 합격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서로 헤어져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되고보니 그해 겨울에 그 둘은 미친듯이 붙어다니더이다.
봄이 되자 그놈은 대학에 다니기 시작했고 한 학기를 마치자마자 재수 시절에 받았던 신검 결과에 따라
곧바로 입대해서 14개월 방바리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 무렵에 모친께서 타계하셨고
다음해 가을에 복학해서 학교를 졸업했고 '88년 봄에 항공회사가 주력기업인 모 재벌그룹에 입사했다오.
'소윤미'와 그 무렵까지 계속 사귀었는데 무슨 일 때문인지 '88년 겨울에 갑자기 헤어졌다더군. ㅋ
(당시엔 정환진을 거의 만나지 못했고 주로 이진수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오.)

'89년 초봄에 느닷없이 청첩장을 받았는데 다름 아닌 정환진이 결혼한다는 소식이었소.
그날 시청역 근처 찻집에서 그놈에게 직접 받았는데 내가 하도 이상해서 물어봤다오.
'소윤미'와 헤어진 것은 그렇다치고 그로부터 넉 달로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결혼이라니!
그놈이 이르기를, 신부는 대학 후배이고 사귄 지 이미 삼 년을 넘겼으며
이 사실을 '소윤미'에게는 감추다가 작년 초겨울에 어떤 계기를 맞아 마침내 말을 꺼냈고
서로 쿨하게 갈라 섰다는 얘기였소. (이런~ 개쉐키! 입력했노라! ㅋㅋ)

한편, 이진수는 대학을 다니다가 1학년 중반부터 사회과학 서클 활동에 뛰어들었다오.
그놈은 3학년 1학기까지 다섯 학기 중에 세 학기나 학사경고를 받게 되어 결국 제적되고 말았는데
3학년 8월 중순에 이 사실을 인지하자 곧바로 다시 입시 준비에 돌입해서 9월에 체력장을 하고
11월 하순에 '85학년도 학력고사를 치렀는데 이번엔 문과로 바꿔서 전국석차 1,100등을 기록했소.

사실 우리 고등학교 동기 중에는 '82학년도에 이놈보다 높은 학력고사 점수를 얻은 놈들이 대여섯 명 있었지만
그놈들 모두를 포함해서 누구나 이진수가 동기 중에선 가장 공부를 잘 한다고 한결같이 인정할 정도였다오.
아무리 고삐리 시절에 공부를 잘 했다하더라도 3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그것도 문과로 전향해서
불과 두어 달 남짓 준비해서 전국 석차 천 등 내외를 기록한다는 게 그거... 분명히 쉬운 일은 아니지 않겠소? ㅋ

이진수는 내신성적도 1등급이라 다시 그 대학의 사회계열 일부 학과에 입학할 수도 있었지만
그 무렵 계부께서 오랜 투병 끝에 타계하셨고 모친께서도 와병 중인 데다 여동생도 고등학교에 다닐 때라서
역시 정환진의 권유와 전례에 따라 안암동에 있는 학교 법대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오. ㅋ

이놈이 학교를 잘렸는데도 왜 그토록 신속하게 다시 입시를 치렀는지 아시오?
원래 이놈은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과외 교습 활동으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라오.
그 시절엔 공식적으로 과외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흔히들 '몰래바이트'라고 일컫곤 했을 정도였소.
그놈은 웬만한 직장인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었는데 그짓을 계속 하려면 아무래도 학교 간판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잘리자마자 곧바로 다시 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이라 이 말이지. 흐흐흐~

그놈은 그 뒤로도 계속 그쪽으로 풀려서 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89년에는 상당한 돈을 모았는데,
고향에 내려가 자금을 추가로 융통해서 큰 종합학원을 차렸다오.
그 무렵엔 나름 지역 유지 행세도 하면서 모친과 어린 여동생을 돌보며 순탄하게 30대를 보낼 수 있었다오.

한편, 그놈은 처음에 입학한 대학을 다닐 때부터 나만 만나면 '차현옥'의 소식을 묻곤 했는데
그놈 자신도 그녀에게 여전한 관심과 미련을 품고 있다는 점을 굳이 숨기려고 하질 않았다는 거요.
'차현옥'은 지방 국립대학의 영문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내 형이 그 학과의 '80학번이었다오.
이진수는 내 형과도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형을 통해 내가 그녀의 소식을 잘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나만 만나면 그녀의 근황을 탐색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아주 만족스러운 소식을 전하곤 했었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삐리 시절에 사귀던 '사윤기'도 그 학과에 입학해서
'차현옥'과 당시엔 보기 드문 캠퍼스 공인 커플로 지내게 되었는데
2학년 1학기를 마치자 '사윤기'가 휴학하고 입대하게 되었는데 그 무렵에 완전히 헤어졌다 하더이다.
물론 우리 형에게 들은 얘기이니 틀림없는 사실 아니겠소!

형이 내게 이르기를, 사윤기와 헤어지고 얼마 후에 '차현옥'은 '79학번 복돌이 형과 새로 사귀기 시작했는데
'84년 가을엔 예기치 않게 회임을 하는 바람에 한 학기를 휴학했고 다음해 봄에 복학했다가
다시 한 학기만에 휴학을 하고나선 영영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더이다.

내가 '83년 여름에 이진수를 만났을 때, "최근에 사윤기가 입대하면서 차현옥과 헤어졌다더라"했더니
그놈이 마침내 때가 왔다는 듯이 만면에 화색이 돌면서 기뻐했더랬는데
정작 그러면서도 차현옥을 직접 찾아가진 못하더이다.
그래도 마음 속에선 어떤 희망의 불씨를 계속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오.

'84년도 초봄에 다시 이진수를 만났을 때는, 차현옥이 새로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그놈이 힘없이 한숨을 내쉬면서 그저 세상과 인심의 표변함이 야속하다는 넋두리를 한없이 늘어놓더이다.(에그~ 불쌍한 놈ㅋ)

'84년도 초겨울에 시험을 막 치르고 난 이진수를 만나서, 차현옥의 신변에 모종의 변고가 있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그놈이 갑자기 분격하여 그 지방대학의 '79학번 선배놈을 찾아가 죽이겠다며 날뛰길래
그걸 달래느라 한참을 고생했다는 거 아니겠소! ㅋ
이진수가 지방 도시에 있던 우리 형까지 찾아가서 그 선배의 거처를 수소문했던 걸 생각하면
그쯤에서 사태가 마무리된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오.
알고보면 이진수 그놈도 무척이나 다혈질이라서... ㅋ

'85년부터 '88년 초까진 내가 사회에 없었기 때문에 그놈도 만날 수 없었다오.
삼 년이 흘러 '88년 초에 법대 4학년이던 이진수를 다시 만났는데 넌지시 그의 옛 사랑에 대해 물었다오.
그러자 그놈이 실로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꺼내더란 말이지!

(계속)

이진수는 '86년 여름에 방학을 맞아 모친의 병환을 살피고자 며칠 귀향한 적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소,
어느날 오후에 시내 중심가 로터리에 위치한 제일모직 매장 건물 앞을 바쁜 걸음으로 지날 때였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길래 무심결에 돌아보았더니 놀랍게도 차현옥 그녀가 아니었겠소.

옛날 같으면 긴장에 휩싸여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겠지만
그날은 웬일인지 얼굴 가득 여유롭게 웃음을 머금고 자연스러운 악수도 먼저 청했다더군.
그런대로 노숙한 대응을 해나가는 자신을 보고 꽤나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이젠 내 열정도 식어버렸구나'하는 씁쓸함에 마냥 흔쾌하진 않았다고 하더이다.

그날은 따로 볼일이 있었음에도 그녀를 보자마자 선뜻 근처 찻집으로 이끌었는데 그녀도 흔쾌히 응하더라네.
6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건너 뛰어 우연히 그녀와 마주하고 있자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고 하더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 장면을 자꾸 대상화해서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유체이탈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고도 했는데
실은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놈 말의 뉘앙스를 금새 이해할 수 있었다오. ㅋ

막상 마주 대하면 할 말이 있겠는가하는 걱정도 없진 않았지만,
서로의 근황을 묻는 걸로 시작된 대화는 의외로 중간에 끊어지지도 않고 계속 이어졌다고 하더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그녀가 어딘지 쑥스러워하는 기색으로 요즘엔 사귀는 사람 없느냐고 묻길래,
그놈은 그냥 시익 쪼개면서, "나는 그쪽 일엔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는지 여태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했더니
그녀가 깔깔거리면서,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며 잠깐 동안이나마 웃음을 멈추지 못하더라네.
그 무렵엔 이진수 그놈도 자기가 연애사업에 재능이 없으며 그리 우수한 품질도 못 된다는 걸 자각하고 있을 때라서
듣기에 따라선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반응에도 별 저항감조차 생기지 않았다고 하더이다.

그놈은 대화 중에도 그녀의 대학 생활에 대해선 일절 묻지 않았는데 그녀도 그 시절 얘기는 회피하는 눈치였고
오직 옛날 고교 시절에 그놈과 얽혔던 여러 추억을 되새기면서 가끔은 그놈의 못났던 행동을 놀리기도 하고
그 시절 자신의 무례한 태도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을 전하기도 하면서 그의 용서를 청했다고 하더이다.
이진수 그놈도 실로 육 년여만에 그녀가 밝혀주는 옛일에 대한 솔직한 고백에 뭐라 말할 수 없이 아련한 기분에 젖어들어
한 순간엔 눈물이 날 것처럼 격정과 회한에 잠기기도 했고 때론 몸둘 바를 모르고 부끄러워하기도 했다더군.

그놈 말로는, 고향에 머무는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그녀를 두 차례 더 만났다는데
이 망할 놈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더이다.
내가 여러 차례 어르고 집요하게 채근했으나 끝내 자세한 전말은 듣지 못하고 말았다는 거 아니겠소.
아무래도 더 진전된 뭔가가 있었던 것이 틀림 없어 보였는데,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더란 말이오.

옛날 같으면 의형제 놈들이 언제나 주변에 진을 쳤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그놈의 비밀도 죄다 까발려졌겠지만
그 무렵에는, 어떤 놈은 군대 갔고 어떤 놈은 타도에서 학교 다니고 또다른 놈은 졸업했을 시절이라
그놈의 특별한 '썸씽'에 대해 알아낼 방도가 도무지 없었다는 거 아니겠소. (나는 이점이 두고 두고 아쉽다오. 크흐흐~)

그 후로도 그놈 입을 통해서는 둘 사이의 관계 진전 여부라든가, 관계의 강도라든가,
관계의 정리 여부라든가, 뭐 이런 쪽으로는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88년 현재 시점에서는 더이상 그녀를 만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 정도였소.
이진수 그놈이 평소 말하는 태도로 봐선, 그녀와 깊히 사귀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달리 보면, 얼마간 교제하긴 했지만 나중에 매우 우호적인 관계로 정리된 듯한 느낌 외에
내가 추가로 짐작해낼 수 있는 내막은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있소. (정말 아쉬워~ )

그후 몇 년 간 그를 볼 수 없었소.

'88년 봄에 이진수를 만난 뒤로 근 오 년 간이나 서로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93년 5월쯤에 난데없이 정환진을 통해서 소식을 듣게 되었다오.
나는 정환진 그놈도 사 년 넘게 소식을 몰랐다가 그가 '꽈백이'를 통해 내 번호를 알아내 연락을 한 거였소.
이진수의 아들이 돌을 맞이해서 잔치를 하는데 이번 기회에 친구들 얼굴좀 보자는 얘기였소.

나는 그때까지 그놈이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들 돌이라니,
문득 그의 부인이 누구일까 너무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통화하던 정환진에게 다급하게 물어봤다오.
그러자 그놈이 킬킬거리면서, "차현옥은 분명히 아닐 걸~"하더란 말이지. ㅋ
정환진은 그동안 이진수와 자주 만났을 것이 틀림없는데도 그 자식이 나를 놀리려고 그러는지
아무리 물어도 부인의 정체에 대해선 시종해서 입을 다물고 이상한 변죽만 날리더란 말이지.

나는 본래 남의 경조사는 물론이고 집안 경조사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는 편인데
순전히 이진수 부인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그놈 아들의 돌잔치 참석을 선뜻 결정하고 말았다오.
그주 토요일에 단성사 앞에서 정환진을 만나 근처 금은방에서 각각 한 돈짜리 금반지를 구입한 다음
일요일 아침 6시에 모처럼 일찍 일어나 동서울 터미널로 항했고 5년만에 고교를 졸업한 그 도시로 내려갔다오.

정환진과 나, 거기에 또 한 명의 그놈들 의형제가 동행했는데 위에서 나왔던 '조경진'이라는 놈이었소.
정환진은 항공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조경진은 관악산에 있는 대학교의 법대를 재수 끝에 '83학번으로 입학하고나서
이상하게도 고시를 준비하지 않고 졸업하자마자 H 그룹에 입사해서 해외에 파견나갔다가
그 즈음에 막 국내로 복귀한 상태였는데 아직 미혼이었다오.

그 무렵, 이진수는 심혈을 기울여 시작했던 학원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꽤나 윤택한 생활로 접어들었는데
옛날 연탄배달부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또 굴곡 많은 학창 시절 내내 가장으로서 돈 버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시절을 돌이켜보면,
이제 옛말하며 살 수 있는 처지가 되었던 터라 사는 집도 꽤나 널찍한 고급주택이었는데,
나는 그놈 사업의 성공이나 사는 집의 호화스러움보다도 온통 그 부인의 정체를 알아보는 일에 사로잡혀서
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타고 그놈 집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옆에 있는 조경진을 붙잡고 수사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오.

이윽고 이진수의 집에 도착했더니 이미 그댁 집안 친척들이 넓은 거실에 가득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친의 안내를 받아 안방으로 항했고 거기엔 따로 도착한다던 나머지 의형제 두 놈도 이미 자리하고 있더이다.
이진수를 포함해 그놈 의형제 다섯과 외부 친구로는 오직 나 혼자 그날 잔치에 참석했는데
우리가 안방에 좌정하자 곧이어 그놈의 부인이 아기를 안고 들어와 인사를 하더란 말이지.

나는 아기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오로지 부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옛날 그 '차현옥'의 모습이라고 해봐야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에 잠깐 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아무리 요모조모 뜯어봐도 지금의 부인이 옛날의 코찔찔이 그녀였는지 도저히 알아보지 못하겠더라네.
그러자 옆에서 내가 하는 꼴을 한심하게 보고 있던 정환진이 이르기를,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냐, 미친놈아! 아닌 걸 아직도 모르겠냐?"하면서 낄낄거리더란 말이지. ㅋ

곧이어 모친께서 들어오시더니 유독 나를 붙잡고 그동안 어찌 살았냐고 눈물까지 비치시며,
"아버지 세상 뜨셨다는 얘기는 진작에 들었단다. 부디 모친께 효성을 다하고 행복하게 살거라"하시더군.
이진수의 다른 의형제 놈들이야 그동안 자주 보셨기 때문에 새삼 반가워하실 일도 아니었다지만
나는 고교 졸업 후에 십 년이 넘도록 뵙지 못하다가 그때서야 모친을 만나게 되니 한켠에선 울컥하는 기분도 들더이다.

잠시 후에 큰 상이 들어오고 대번에 음식이 가득한 잔칫상으로 탈바꿈하자마자
우리 여섯은 아귀처럼 달려들어 이것저것 집어넣다가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히히덕거리기 시작했다오.
그러던 중에 내가 마침내 이진수에게 부인과 결혼하게 된 전말을 듣고자 했더니,
그놈이 이르기를, 모친의 동네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부인과 중매로 만나 두 해를 사귀다가 결혼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차씨는 어쩌고?" 물었더니, 그놈이 개의치도 않고 "어차피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하면서 웃더이다.

이렇게 해서 이진수 부인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간단히 풀렸지만,
나는 잠시나마 살짝 아쉬운 기분에 잠겨들고 말았다오.
차현옥과 끝내 맺어졌다면 꽤나 근사한 해피엔딩이었을 텐데하는 마음 말이오. ㅋ

점심을 먹고나서 두어 시간을 더 놀다가 오후 네 시가 넘어가자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소.
집에서는 어른들이 계시기 때문에 음주에 몰두하면서 마음껏 떠들고 놀 수 없다보니
저녁에는 따로 밖에서 장소를 잡아 거기서 한 잔 거나하게 흡입하자는 계획을 진작부터 마련해 놓았더라네.

모친께 미리 하직 인사를 올리고 다른 집안 어른들께도 인사를 올린 다음,
우리 여섯은 함께 봉고 차량에 올라탔는데 당시로선 놀랍게도 이진수의 부인이 직접 운전대를 잡더란 말이지. ㅋ
매우 능숙한 운전 끝에 예약된 중국집에 도착했는데 거기는 상상외로 호화스럽더군.
호텔을 제외하면 서울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고급 중화요리집이더란 말이지.ㅋ
부인은 우리를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저녁 여덟시 경에 다시 데리러 올 예정이라고 하더이다.

요리의 명칭과 실제 모습을 구별할 능력이 원래부터 없었던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저 젓가락만 부지런히 놀릴 따름이었는데,  
옆에서 폭풍처럼 술을 들이키는 나머지 다섯 놈을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문득,
"진수 네 이놈! 여태도 차씨와의 전말을 토설치 못하겠느냐!
십 년의 애타는 기다림이 어찌 그리도 허망했단 말이냐!"했더니,
그놈이 실실 웃으면서 "그러게. 일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라..."라고만 하더이다.
그래서 내가 짐짓 엄중한 목소리로, "이따가 부인께 모든 걸 고하겠노라!"했더니,
그놈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해볼테면 해봐라, 미친놈아!"라고 대꾸하곤 이내 화제를 돌리려고 하더이다.

그러자 다른 놈들도 관심이 생겼는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구동성으로 그놈을 닥달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은 지금의 부인을 만나면서 완전히 개심했고 옛일은 돌이켜보고 싶지 않다면서
친구들의 열화 같은 진상 요구조차 일거에 물리치고 입을 굳게 닫아버리더이다.
역시... 분명히 뭔가 있긴 있었는데... 그거 참...

술자리가 무르익어가고 한두 놈씩 혀가 꼬부라지기 시작할 무렵,
이것저것 처음 먹어보는 안주가 신기해서 젓가락만 부지런히 놀리던 나는 갑자기 답답한 기분이 들자,
잠시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와선 근처 하천 뚝방을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눈에 익은 한곳을 발견하지 않았겠소.
거기 장방형 배수구 뚜껑 옆으로 다가서선 그 속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담뱃불을 붙여놓고 그저 묵묵히 상념에 잠겨들고 말았다오.

"거기서 뭐 하세요?"
흠칫하면서 돌아보니 이진수의 부인이 하천변 주차장 쪽에서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더이다.  
"옛 추억이 서린 곳을 둘러보고 있지요."했더니,
그녀가, "무슨 사연인데요?"하면서 초롱한 눈길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소.

"옛날에 제가 온 정성을 기울여 써놓았던 편지 수십 통이 이곳에 버려졌다지요."했더니
그녀가 대번에 진상을 눈치챈 듯, "그 여자분이 무척이나 매정했나보네요."라고 하길래,
"그녀가 매정했다기보다는 그놈이 한심해서 벌어진 일이겠지요."하면서 씁쓸한 표정을 내보였더니,
그녀가 웃으면서, "지금 집에 계신 분은 아니었나보네요?"라길래,
"아마 그럴 걸요?"했더니,
"히히, 나중에라도 그댁에 계신 분을 만나면 일러야지." 하더이다.
그러자 내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껄껄 웃기 시작했는데 한참 동안이나 멈출 수 없었다오.


(약간 더 남았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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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32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29 12:17

초고 상태라 오탈자도 무지하게 나올 텐데,
무책임하게 그냥 올려놓고 내빼다니... ㅋ

아범님의 댓글

  ssenja님.
금연백신 나온답니다.


본문과 하등 상관없는 댓글이지만…. 흐
너무 길어… 시간이 무척 많이 생겼을때 읽을랍니다.

지훈아빠님의 댓글

  점심먹고입가심으로 커피한잔 하면서 끝까지 잘 읽고 갑니다....ㅎ
당시 기억력이 어찌그리 꼼꼼하신지 몇몇 오탈자외에는 퍼펙트하네요...ㅎ

짬짬님의 댓글

  이런 장문의 소설(?)이 연재되는 줄 알았으면 참으로 많은 유부들이 몰려왔을 거인데.....
이제사 연재를 시작하셨으니....

근데... 몇편까지 기획을 하셨는지요? 주 3회 1년 발행 하신다면 책으로 10권은 나올 듯 싶은데 말입니다.... ^^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00:32

익!
소설처럼 보이면 안 되는데...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00:32

   
 ------------------------ 날짜 구분선 ------------------------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00:33

종일토록 뭐하다 이제서야 추가분을 올린 거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00:35

  비오기 전에 밖에 일좀 보러 다녔시다.
저녁 10에 들어와서 다시 쓰기 시작했는데 두 시간이나 걸렸소.
그런데도 아직 마무리짓지는 못 했다오. ㅋ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00:36

  하긴...
읽어줄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느긋하게 합시다~

아까 저녁 무렵부터 드디어 비가 오기 시작했소.
지금까지 계속 오긴 하는데 빗줄기는 여전히 시원찮다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00:37

  지금은 또 잠시 그친 것 같더이다.
오늘 밤에라도 와장창 내렸으면 좋겠는데...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1:07

  토요일 오전 11시.

계속 내립니다.

그동안 먼지에 찌들었던 앞뒤 발코니 창문과 방충망이 빗물에 씻겨내린 지 한참 되었는데
지금도 시커먼 물이 계속 창틀에 고이고 있습니다.
벌써 두 차례나 창틀 청소를 했는데도 여전히 생깁니다. 

빗물이 더러워서 그런 건 아닐까하는 추정도 잠깐 했었지만
가만히 관찰해보니 역시 앞뒤 발코니 창문 바깥쪽 면과 방충망에 붙어있던 먼지때인 걸로 밝혀졌습니다. ㅋ
아따~ 그동안 얼마나 비가 오지 않았으면 저리도 먼지가 많이 끼었을까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1:09

  비와 함께 바람도 적절한 세기와 방향을 유지하면서 불어줘야 창문 청소가 잘 될 거요.
예를 들어, 오전엔 남서풍, 오후엔 북동풍,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크흐흐~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1:10

  한데, 본문에 올려놓은 얘기는 대체 언제 끝낼 겁니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1:13

  글쎄... 그게 지금 난감하다니까!
원래는 저 시점까지의 기억만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는데
써내려가다보니 하나의 이야기로서 완결되었다고 보기엔 어딘지 미진한 느낌이 들더란 말이지요.
물론 저 시점 이후에도 기억이 살아있긴 하지만
그 얘기까지 전부 지껄이다보면 사실상 끝이 없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ㅋ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1:14

  이야기를 끝낼 지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 아니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1:16

  이를테면, 그런 거지. 크흐흐~

이야기라도 재미있어야 하는데 저걸 읽어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듯이
재미있는 에피소드라기엔 내용이 다소 평이하지 않소!
그래서 저쯤에서 끊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지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5:00

토요일 오후 3시.
오늘 자로 올라온 중요한 뉴스 한 꼭지.

내년도에 적용될 최저임금 결정에 관한 소식입니다.
올해는 4,580원이었는데 내년에는 6.1%를 인상해서 4,860원으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최저임금위원회의 사용자측 대표는 4,580원(동결), 근로자측 위원은 5,780원을 주장했으나
최종적으로 '공익위원'의 안을 놓고 표결해서 저렇게 확정되었답니다.

기사를 인용하면, 주당 40시간을 노동한다고 봤을 때 한달에 101만 5,740원이 나온답니다.
저 정도의 금액이라면 정상적인 생활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고
그저  혼자서 간신히 목숨만 이어나갈 수 있는 수준의 소득이지요. ㅋ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5:06

아직은 장관 고시와 이의 제기 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에 완전히 확정된 건 아니잖소!

하여튼 최저임금이 너무 적다니까!
내가 보기엔, 사용자 측이 주장하는 경제 여건을 최대한 감안하더라도,
내년엔 최소한 6천 원 정도는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5:07

  한데, 이 문제와 군사 협정 문제 중에 어느 게 더 중요한 문제라 생각하시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5:12

  성격이 다른 두 사안을 놓고 굳이 그런 걸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겠소!

물론 내 생각으론, 최저임금 결정 소식이 세 배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잘못된 협정이야 수틀리면 폐기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이 망할 놈의 최저임금을 적정하게 책정하고 제대로 강제하지 못하면
당장의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사람들이 무척 많이 생겨나기 때문이오. 크흐흐~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5:19

지금도 여전히 최저임금 기준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 놈들이 무척 많긴 하지.
더 비극적인 것은, 최저임금에도 미달하는 알바비로 청소년 노동력을 착취해가며 업을 영위하는 업주들 중에는
알고보면 거기 알바생보다 소득이 더 빈약한 케이스도 주변을 돌아보면 의외로 많다는 현실!
빈사상태에 처한 자영업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 아니겠소.
하지만, 그래도 최저임금 기준을 준수하지 않는 사업주는 지금보다 훨씬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거~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15:29

  처벌 규정이야 지금도 꽤 강력하지~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형사 처벌의 대상이고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 만원 이하의 벌금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오.
그렇지만 해마다 수만 건의 위반 사례가 적발되는데도 정작 형사 처벌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거~

이거 형사 처벌을 회피할 수 없게 만드는 방법좀 없을까? 크흐흐~

允齊님의 댓글

_mk_장문의 글을 손전화기로 읽어나가려니 많이 버겁습니다
두번에 나눠서 읽었습니다
쎈자님의 기억력은 거의 초능력이옵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6.30 20:47

  오!
允齊님께서 토요일에도 들어오셨군요.

성진홍님의 댓글

  그니까 호주처럼, 각 직종별 직급별 년차별 연령별 기본 임금을 의무화해야 한다니께요.
이게 있어야 제살깎아먹기식 영업도 막을 수 있고, 중소기업들 허리도 튼튼해진당께요.

특히 디자인이나 영상 뭐 이런 전문직 서비스 직군 회사들이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죵.
이럼 깨끗하게 투입 입원 x 작업 일수로 해서 디자인비 책정해서 견적 딱 내면 되고, 노동부와 국세청에서 이걸 의무화해서 공시해놨으니 뭐라고도 못하고~~
이럼 야근 철야 굳이 안해도 먹고 살기 좋아지고~ 회사 환경 좋아지고~
함부로 네고해줬다간 세금 내기가 허덕일테니 묻지마 싸게 영업도 줄테죠.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7.01 11:31

직종, 직급, 연차별 기준 임금을 매해 산정해서 공표하고
그 기준을 모든 종류의 인적 용역 분야에 강제할 수 있는 제도가 생긴다면
우리 나라의 현실을 놓고 봤을 때,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ㅋㅋ

다른 쪽은 모르겠습니다만,
디자인 출판 분야에서는 몇 년 전에 조달청에서 고시한 공임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일당이 대략 6만원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요즘 제가 현장에서 직접 확인한 몇몇 사례를 보면, 일당 10~12만원을 주더군요.
일당 10만원을 받은 사람은 중식을 제공받았지만
12만원짜리의 경우엔 중식이 자가 부담이었다는 거~ 크흐흐~

하지만 이 정도가 요즘의 평균적인 시세인지는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올 상반기에 기획실과 출판사 몇 군데서 알바를 했던 분들 세 명에게 직접 확인한 금액일 뿐입니다.
페이지물 조판작업을 하면서 일당을 저 정도 받았으니
아마도 다른 디자인 분야의 일당은 액수가 다를 것이고 또 달라야 하겠지요.
하지만 또다른 몇몇 사례를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 으하하~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7.01 11:43

   
 ------------------------ 날짜 구분선 ------------------------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7.01 15:03

  일요일 오후 3시.
하늘이 조금씩 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내일 중으로 비는 더이상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 와야 하는데...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7.02 02:06

   
 ------------------------ 날짜 구분선 ------------------------
 
   02시입니다.
   밤 하늘에 달이 보입니다.
   바람도 잦아들어 조금씩 더워지고 있습니다.

아범님의 댓글

  아...  본문 글을 아직도 읽지못하고 있다니.. 
에 또..  글을 아주 천천히 읽는편이라 차마 읽어볼 엄두가.... ㅋ;




디자인 출장알바의 평균일당 역시 그정도 선으로 생각됩니다.
웬만한데아니면 그 이상 안줄거 같은데요… ㅎ

박선미님의 댓글

  쎈자님, 글 ~ 이제사 읽었네요...
한줄한줄 너무 아까워서.. 어느대목은 몇번씩 되뇌어 읽게 되네요..
자주 올려주세용~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7.03 15:35

  박선미님!
허접한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 2009년부터 이곳 유부방에
제 지난 시절의 인상 깊은 인물이나 사건을 돌이켜보는 글을
일 년에 서너 차례씩 띄엄띄엄 올리곤 있습니다만,
이젠 소재가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크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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