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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공감

후무(後無)한 사나이

2011.03.30 13:37 513 10 0 0

본문

고재용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습니다.

2학년에 올라가서,
우리 반 61명 중에 저는 59번이라 3분단의 맨 뒤 왼쪽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개학 첫날 반 편성을 하고 개인별로 번호를 매겨서 자리를 정할 때는 분명히 제가 맨 뒷자리였는데
다음 날 등교해보니 제 뒤에 자리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제 바로 뒤는 아니고 대각선으로 뒷자리에 한 놈이 멀뚱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키도 꽤 작은 놈이…
앞 사람에 가려 칠판도 잘 안 보일텐데…
짝도 없이 혼자…

그가 바로 고재용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39번이라 중간 쯤에 앉아야 했는데 자리 배정할 때 슬쩍 빠져 있다가
다음날 일찍 등교해선 다른 분단의 남는 책상 하나를 옮겨와서
우리 분단 맨 뒤에 자리를 만들어 거기에 앉기로 한 모양이었습니다.
그가 여러 불편을 감수하고 왜 맨 뒷자리를 원했는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놈들이 흔히 그렇듯이,
교탁의 선생 시야에서 가급적이면 사각인 곳에 자리잡고 싶어하는
사특한 생각 때문이겠거니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때는 전통 본고사 시대였기 때문에 학교의 정규 수업이 10시간이었습니다.
수학이나 영어는 보통 하루 두 번 들어 있었고 세 시간이 배정된 날도 있었습니다.
본고사에 대비하기 위해 2학년 1학기까지 확률 통계를 제외한
나머지 고등학교 수학 전 과정을 이수하도록 수업 일정이 짜여져 있었습니다.
1학년 말까지 집합과 명제, 실수 체계, 수와 식, 방정식, 삼각함수, 2차곡선을 배우고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수열, 극한, 변화율과 도함수, 미분, 적분을 배우도록 짜여져 있었습니다.
비평준화 지역의 '자칭' 명문이라는 우리 학교의 학생들도 따라가기 힘든 매우 촉박한 일정이었습니다.
이 때가 바로 학생 간에 진정한 의미에서 '학력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국어는 좀 사정이 달랐지만 영어 과목도 수학과 비슷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보통 오후 일곱 시에 정규 수업이 끝나게 되어 있었고
보충 수업까지 두 세 시간 더 하고 나면 저녁 10시를 넘겨서야 하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재용은 저녁 8시 경이면 어김없이 사라졌습니다.
알고보니 먼 곳에서 통학해야 하는 처지라 시골로 들어가는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담임한테 미리 허락을 얻어 일찍 하교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시를 둘러싼, 같은 생활권인, 군(郡)이 아니라 인접 다른 군에서 통학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매우 담백했고 관활(寬滑)했으며 과묵하고 점잖은 편이었습니다.
각이 선명하면서도 인상이 좋은 얼굴에 늘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유형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고향에서 함께 진학한 중학교 동창도 없는 눈치였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지내는 친구였습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좀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당시 '날치들'처럼 교복을 개조해서 입는 짓은 그래도 열심히 따라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70년대에는 '나팔'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교복에도 그 풍속이 반영되어
일부 날치들은 바지를 입을 때 엉덩이와 허벅지는 꽉 조이게, 밑단은 넓게 퍼지도록 만들어 입었고
또 바지 양쪽 바깥의 재봉선 맨 윗부분에 사선으로 나 있는 앞주머니도 고쳐서
바지 앞지퍼(혹은 단추) 양 옆에 수직으로 만들어 넣었는데 (조금 큰 동전 주머니처럼 ㅋ)
거기에 두 손 혹은 한 손을 꼽아넣고 건들거리면서 다녔으며,
양쪽 뒷주머니도  바지 속으로 나 있는 것(신사복처럼)을 바꿔서
(청바지처럼) 바지 바깥으로 내어 두 줄의 재봉선이 보이도록 했고
교복 상의도 어깨를 딱 맞게 하고 허리 부분은 약간 조이도록 줄여 입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막 새로 유행하기 시작했던 속칭 '단꼬'형 바지를 입는 풍조도 있었는데
바지의 무릎 아래부터 밑으로 갈수록 좁아지게 했으며
바지 전체 길이도 나팔보다는 짧게 복숭아뼈 근처에서 끝나도록 하는 형태였습니다.
어찌 보면 요즘의 스키니 진과 약간 비슷해 보이기도 했는데 그도 바로 이런 차림을 하고 다녔습니다.
평소 행실과 상당히 동떨어진 옷차림이라 그 점이 좀 묘하게 보였습니다.
(그때는 저런 옷차림을 하고 다니면 동네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차곤 했습니다. ㅋ)

한편, 저는 일학년을 620명 중에서 440등인가 490등인가로 마쳤습니다.
학업 면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쭈구리의 전형이었습니다.
2학년 때는 문과를 선택했는데 우리 반에 공부 잘 하는 놈들이 무척 많이 올라왔습니다.
뭐 특별한 계기도 없이 그냥, 1학년 말에 겨울 방학을 맞으면서  결심하기를,
2학년이 되면 심기일전해서 공부를 잘 해보리라 마음먹고
겨울방학부터 2학년 개학할 때까지 계획을 세워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석 달을 줄기차게 하루에 16시간 이상씩…
휴일도 없고 휴식도 없이 그냥 하염없이 굳세게…

그러자 2학년 첫달에 대뜸 진보상을 탔습니다. 고교 입학 후 네 번째였습니다. 음흠!
국영수만 치르는 월말 고사에서 계속 문과 최상위 1%에 들어가는 성적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1%이면 전국 단위에서 상위 0.2%에 들어간다고 추정되던 시절이었습니다.
특히 본고사형 수학 시험은 세 번을 봤는데 두 번은 100점, 한 번은 98점이었습니다.
그때 문과 반의 경우엔 보통 학급 평균이 5~15점 정도였습니다.
98점은, 풀이 과정을 한참 써나가다 맨 마지막에 해답을 적었는데
거기서 '분모를 유리화'하지 않았다고 해서 2점을 깎였습니다. ㅎ
(아싸~ 실로 반 년만에 수학 종결자, 특급 범생이로 복권이요~ … 에라이 ㅋ)

그러던 어느 날,
개학한지 두 달이 넘도록 변변히 말 한 번 섞지 않았던 고재용이 뒤에서 갑자기 제 등을 쿡쿡 찔어댔습니다.
수학 문제를 푸는데 해답을 읽어봐도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으니 설명 좀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내미는 '실력수학 1' (정석ㅋ) 연습문제를 살펴보니 바로 '난문제'였습니다.
그때는 '수학의 정석'도 '기본', '실력'  두 단계 별책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상위 레벨이었던 '실력 수학의 정석 1'의 경우에는
'단원 연습 문제'를 '기본문제', '실력문제', '난문제'로 구분해서 실어 놓았습니다.
당시는 전통 본고사 시절이라 '정석' 연습 문제의 난이도가 굉장히 높았는데 특히 '실력문제'가 그랬습니다.
서울에 있는 중상위권 대학에 합격하는 수준의 학생들이 절반을 겨우 풀어낼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였습니다.
(훗날, 그러니까 '90년 경에 알바삼아 고등학생 수학 과외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문제 수준과 저희 때를 비교해 보았을 때 난이도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연습문제 맨 뒤에  나오는 너덧 개의 '난문제'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난문제'를 풀지 않고 그냥 넘어가곤 했습니다.
물론 말 그대로 문제가 굉장히 어렵기도 했거니와
기본적으로 이 '난문제'는 SNU 합격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문제이다보니
웬만큼 수학을 잘 하는 정도로는 도저히 풀어내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작년에도 제가 밝힌 적이 있었지만, 당시 S대 본고사 수학 문제는 정말 난이도가 높았습니다.
S대 문과 계열의 경우, 다섯 문제 중에서 한 개 반이나 두 개를 맞히면 충분히 합격일 정도였으니…)
그러다보니 괜히 난문제를 풀어본다고 시간 낭비하느니 차라리 그냥 넘어가고
다른 곳에 시간을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인 학습 방법이라는 인식이
평균적인 학업 성취도를 가진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 꽤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느닷없이 이 '난문제'를 좀 풀어보고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름 성의껏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설명을 듣던 그가 문득 약간 겸연쩍어하면서 말하기를,
자기도 시골 면(面)의 중학교 시절에는 맡아놓은 전교 1등이었는데
이 망할 놈의 '자칭' 명문 운운하는 고등학교에 올라와선 밑바닥을 헤어날 길이 없다면서
시큰둥하고 씁쓸하게 그러나 별 스스럼없이 자기 성적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 반에서 61등이었습니다. 석 달 연속으로!

일등하는 놈이 있으면 꼴찌하는 놈도 반드시 있기 마련이겠지만,
정작 누가 우리 반 꼴찌인지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한편 놀라기도 하고 한편 궁금하기도 해서
그에게 진짜 61등이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교실 뒷벽 하단에 붙어 있는 자기 사물함을 열더니 통지표 두 장을 꺼내 보여 주었습니다.
정식 통지표는 아니고 국영수만 보는 월말 고사 성적표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학적부에 기재되는 중간, 기말 고사보다
명문대 입학에 관건적인 의미를 갖는 월말 고사 성적이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질 시절이라,
시험이 끝나면 늘 복도에 학년 전체의 과목별 서열 순으로 방을 붙여놓았었는데
그때는 미처 그의 점수를 주목해서 보지 못했던지라  
그가 보여준 놀라운 점수에 정말 색다른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보았던 점수를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어 18점, 수학 5점, 영어 16점, 평균은 13점, 석차는 문과 241명 중 241등이라… 으하하하~

그날 일을 계기로 그와 말을 제대로 트고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친구들처럼 '씹탱이, 존만이'하면서 격의 없이 지내는 건 전혀 아니었고,
그저 학교에서 만나면 한 책상에 모여 함께 점심을 먹고 수시로 이런 저런 시답잖은 야부리를 까는 정도였습니다.
그가 하교 후엔 시내에 머물 수 없는 처지이다보니
야간이나 주말, 휴일에 함께 어울려 운동을 하거나 놀러다니는 관계도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는 정말 괜찮은 친구였습니다.
친구를 대할 때도 시종해서 예의를 차렸으며 저와는 전혀 달라서 막말을 절대로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불쾌한 일을 당해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고
집단 생활에서 반드시 생기게 마련인,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그런 일도 마다하지 않고 늘 묵묵히 해내는 친구였습니다.
도시 출신의 얍삽하고 까진 놈들에 비하자면, 이건 뭐 옛날 선비를 대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그는 한문(漢文)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냥 학교에서 배우는 한문 시간을 통해 익힌 수준은 훨씬 넘어서는,
그러니까… 한자의 문언문법(文言文法)을 어느 정도 터득해서
낮은 수준에서나마 한적(漢籍)을 읽어낼 수 있는 정도로 보였습니다.

시간이 개울처럼 흐르고…
2학년 5월 중순, 저는 진로와 관련해서 중대한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자는 암중의 결심을 마침내 굳히게 되었습니다.
생활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서,
아무리 가늠해봐도 도저히 대학을 다닐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결국 그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는 이렇게 될 줄 미리 아셨던 부친께서 중3 말에 (국립)공고 진학을 넌지시 권하셨던 적이 있었는데
철없던 시절이라 그걸 매몰차게 물리쳤던 제 행동에 대해 뒤늦은 후회에 잠기기도 했고
자식에게 그런 권유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부친의 비감함을 조금도 헤아릴 줄 몰랐던
그 각박했던 제 의식과 행동이,  한없이 좁고 모질던 마음이 한심하고 또 슬프기도 했고…
그때 그냥 구미나 부산 쪽으로 공고 진학을 했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먹먹한 회한에 잠겨있는 시간도 부쩍 많아지고…
이러다보니 이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는가하는 문제도 고민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때의 힘든 고민을 통해 제가 내린 결론은 단순하고 명확했습니다.
기왕 다니던 것이니,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었으니, 고등학교는 그냥 여기서 졸업하되,
졸업하자마자 바로, 동네 친한 선배가 하던 시내 건축 설비 사무실에 들어가
거기서 일을 배우고 자리를 잡아보기로 작정했습니다.
내친 김에 일곱살 위인 동네 선배의 대대적인 환영과 약속도 받아 놓았습니다.
그 선배는 농고를 나와 옆 동네에 있던 (국립)공전 건축과를 졸업했는데
아버지가 하던 집장사 가업을 물려받는 중이었고 벌써 괜찮은 실적을 내던 처지였습니다.
전망도 꽤 좋아 보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학교를 일년 반 더 다니다가 무사히 졸업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되고보니 제 학교 생활의 기본 목적이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담임 선생에게 상담을 신청해서 비진학 의사를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전달했습니다.
네 성적이 아깝다느니, 돈 없이도 대학 다닐 방법을 찾아보면 의외로 많다느니,
젊은 시절 한 때의 시련이라면 극복 못할 일이 결코 아니라느니, ...
뭐 이런 쓸 데 없는 설득을 피해보려고 상황을 약간 과장해서 아주 절박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한참을 묵묵히 듣고 있던 담임 선생도 저의 결정에 동의해주었습니다.
(사실 뭐… 내가 안 간다면 마는 거지, 지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선뜻 나서서 자기 돈 대줄 것도 아닌데… ㅋ)
게다가 그는 이런 저의 처지를 우호적으로 고려해주기도 했습니다.
(진짜 법정) '정규 수업 6시간'만 받고 바로 하교해도 된다는 허락도 얻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2학년 5월 말부터 오후 세 시 반에 하교하는,
우리 학교 2학년에서 단 한 명 뿐인, 희귀한 비진학 고삐리가 되었습니다. 으하하하~

그 무렵 고재용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제 처지를 지나가는 말로 슬쩍 던져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듣고서도 그는 특별히 뭐라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고 위로하는 말도 없었습니다.
그냥 관심 없어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자식이 저도 대학 갈 가능성이 별로 없으니까 내 처지가 그저 심상해 보이는 모양일세.'

며칠 후인 5월 말, 이틀에 걸쳐 중간 고사가 실시되었습니다.
국영수 뿐만 아니라 교과 과정에 편성되어 있는 모든 과목의 성취도를 측정하는 시험이었습니다.
물론 학적부에 정식으로 기재될 뿐만 아니라 내신 성적의 근거가 되는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당시에는 이 중간 고사를 아주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내신 성적이라고 해봐야 나중에 대학 입시에서 거의 무의미한 비중으로 반영되던 시절이라 더욱 그랬습니다.
(참고로, 당시 서울대는 650점 만점에서 예비고사가 340점, 본고사(국영수)가 300점,
내신 성적은 불과 10점 만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제 '비진학'이 된 저는 중간 고사를 그냥 놀이처럼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1학년 2학기 때의 살떨리던 롤러 코스터의 기억과 만장했던 낭만이 새삼 솟구쳐 오르면서,
'자유롭고 분방한 답안 작성의 오묘한 미학'을 극한까지 추구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성과가 확실히 나오도록 집요하고 완벽하게 답안을 작성해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후에 나온 그 결과가…
전과목 평균 17.2였고 우리 반에서 60등을 찍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절세적인 성적을 마주하면서도 저는 해연히 놀라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최선을 다해 낮은 점수를 얻으려고 그토록 노력했건만,
어찌 이런 난감하고 불완전한 성적이 나올 수 있단 말이가! 하고 말입니다.

그때 머리 속에서 퍼뜩 스치는 것이 있어 얼른 뒤돌아보며 고재용에게 대뜸 추궁했습니다.
"얌마 고쟁아! 성적이 어찌 나왔냐?  너 몇 등이냐?"
그가 시익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야 뭐 당연히 수석일세~"
분에 못 이긴 나머지 귀에서 연기가 나고 온몸을 부들거리던 제가 다시 묻기를,
"이 쉽새야! 평균이 얼마길래 니가 수석이란 말이냐!"
그가 사뭇 거만한 태도로 답하기를,
"평균이… 음…. 12.6이라네~"
나는 17.2였는데…
정말 간발의 차이였고 억울한 간격이었습니다.
과목 평균의 차이가 4점이 넘으면 중간 수준에서는 꽤 큰 간격일 수 있지만
59등한 놈의 평균이 25점을 넘었던 걸 감안하면 최하위권에서는 정말 간발의 차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의 성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평소 수업에도 매우 충실했고 노트 필기도 정말 꼼꼼하게 했습니다.
그의 노트 필기는 어느 과목 할 것 없이 매우 정확했고 굉장히 상세했으며
게다가 상당한 달필이라 남이 읽기에도 아주 수월해서
시험 때는 이놈 저놈이 수시로 빌려갈 정도로 평판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위에서도 소개했지만, 남들이 싫어하는 수학 공부에도 아주 열심이라서
틈만 나면  저에게 '난문제'의 해법을 묻던 그 열성적인 공부쟁이의 모습하며…
그런데도 그 망할 놈이 성적은 늘 최하위라니!
이 놀랍고도 불가사의한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상황과 처지에 여유가 생겨서 막상 제가 그걸 한 번 해보려니,
그게 보통 능력으로 되는 일이 전혀 아니라는 생각을, 고재용을 보면서, 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공부 안 하던 시절에는, 학년이 올라가면 두꺼운 백지 연습장 하나를 장만해서
그 한 권으로 전 과목에 (매우 유연하게) 대응해 나가면서,
일 년이 다 가도록 채 절반도 채워넣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나중에 넘겨보면 공부한 흔적보다 오목 놀이한 흔적이나 낙서한 흔적이 훨씬 많을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엔 등교하자마자 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은 다음
가장 먼저 잡히는 책을 꺼내 펴놓고 그걸로 항상 하루를 때웠습니다.
때론 영한 사전, 또는 영문해석연습 1200제, 국사책, 국어책, 지리부도, … 뭐 아무거나... ㅋ
첫 교시부터 마지막 수업까지 책 한 권 달랑 올려놓고 혼자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숨 안 쉬기 운동을 하고 있거나(이거 몇 번 하면 한 시간이 금방이라네~),
무협 소설이나 다른 매우 유익한 잡서를 책 밑에 깔아 놓고 그걸 읽는 재미로 하루를 보내거나,
옆에 있던, 공부와 관련이 매우 적게 생겨먹은, 모기 닮은 짝놈과 히덕거리거나 오목을 두거나하면서,
하루 하루를 정말 열심히 철저하게 살았는데도 성적이 고재용만 못 하다니…
정말 생각할수록 미스테리한 일이었습니다.

주관식 문제가 약간 섞여 있는 국어나 영어는 50문제, 100점 만점이라서 한 문제에 2점씩이었고
수학은 다섯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전부 주관식이었으며 한 문제당 20점이었고
8절지 답안지 앞뒤에 2단으로 빽빽하게 답안을 작성하면,
선생이 채점할 때, 풀이 과정에 따라 점수를 가감하는 방식이었고,
다른 과목들은 대개 25문제에 전부 객관식이었으며 문제당 배점이 4점이었습니다.

전부 주관식인 수학은 그렇다치더라도
다른 과목은 아무리 개판으로 답안을 작성한다 하더라도 백지를 내지 않는 이상
20~25점을 도저히 하회할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백지로 제출하면, 나중에 학사 징계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건 애초에 가능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고재용은 평균이 10점대 초반을 늘 유지했던 걸 보면 정말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이 지점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틀린 답만 골라 적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가 일부러 틀린 답을 적을 만한 성품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저 평소처럼 성실하게 공부하고 최선을 다해서 시험보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제가 그에게 직접 몇 번이나 물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늘 같았습니다.
그냥 열심히 하다보니 그리 된 것일 뿐이라고…
인력으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수석은 하늘이 내는 거라고…

아무리 수석이 좋아도 그걸 해보려고 일부러 공부할 수는 없는 일인 데다
두 달 후 학기말 시험에서도 그의 천의무봉한 실력을 재차 확인한 저는
결국 경쟁을 포기하고 60등에 만족하는 걸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비우니 길이 열린다고, 2학기 중간 고사 때는 마침내 제가 61등을 차지 했습니다.
그 때 시험은 잘 기억나진 않습니다만, 아마…그와 평균이 소수점 단위에서 갈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기말 시험에서는 다시 뒤집혔고 결국 학년 통산 그가 61등, 제가 60등으로 마쳤습니다.
2학년 말에 우리 학교 문과 정원이 231명 혹은 234명이었는데
최하위 3%가 15등급이었고 총 7명이었으며 우리 반에서는 고재용과 제가 당당히 거기에 포함되었습니다.
우리 담탱이 쩝쩝이의 복장이 터져나갈만한 일이었습니다.

성적 경쟁과는 관계 없이 고재용과 저는 내내 잘 지냈고 정도 꽤 깊게 들었습니다.
그와 저 외에 59등 하는 놈도 늘 정해져 있었는데 저쪽 1분단 맨 뒤에 있는 놈이었습니다.
그(59)는 성적만큼이나 성품도 매우 일관성이 있었고 아주 느긋했습니다.

58등은 두 명이 번갈아 해먹었는데,
한 놈은 그냥 찌질이였고 또 한 놈은 '흑장미'의 대가리였습니다.
이름이 최규현이고 중학 시절부터 써클의 대가리였는데
시내 몇몇 업소에 근무하면서 이미 반은 사회인이 되어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는 학교에선 매우 과묵했고 일면 소탈했기 때문에 반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주로 밤에 많이 나돌아다녀서 그런지 학교에 오면 조용히 자는 일이 많았습니다.
다만, 체육 시간에는 갑자기 활기가 넘쳐 이리 저리 날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해에는 학교 밖 사회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격동과 파란의 세월'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전년 늦가을에 박정희가 최측근 부하에게 총맞아 죽었고 곧바로 12.12 군사 반란이 있었으며
해가 바뀌고 '서울의 봄'이 피어나다가 남도에서 유혈낭자한 참극이 터져 나왔고
여름에 접어들면서 '국보위'라는 괴상한 탈을 쓴 새로운 집권 세력이
국민의 허락과 동의도 없이 갑자기 전면에 등장해서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우리 국민 경제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면서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 5%를 한참 밑도는, 훗날의 외환 위기보다 더 극심한, 경기후퇴를 겪었습니다.
그 해에 지방의 수많은 영세 자영업자들이 파산했습니다.

초중고생들도 원래 엄연한 사회의 구성원이다보니
당연히 사회 현상의 변동에 영향을 받고  반응하며 결국 선택하고 대응하게 마련이라,
이 시기 '국보위'가 민심을 선무하고 집권의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해 시행했던 몇몇 정책 때문에
당시 고등학교 현장에서는 엄청난 충격 속에 다대한 혼란이 빈발했습니다.
다름 아닌, 이른바 '7.30 교육 개혁 조치' 때문이었습니다.
(이 7.30 조치는, 혹시 시간이 나면, 밑에 따로 댓글로 설명하겠습니다.)

당시 이 조치 때문에 우리 교실에 불어닥친 가장 즉각적인 영향이라면,
우선, 악명 높은 월말고사가 폐지되었고,
둘째로, 수업 시간이 재편성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수업 시간이 줄어들었으며
거기에 국영수의 비중도 상대적으로 많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입시를 코앞에 둔 3학년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지만
적어도 2학년까지는 음악, 미술, 체육 시간이 부활되어 실질적으로 수업이 정상화되었습니다.
그 전엔 거의 명목상으로만 편성되어 있었고 실제로는 자습, 타과목 보강에 할당되곤 했었습니다.

그 무렵 갑자기 엄청나게 비중이 커진 '내신 성적'과 관련해서 제가 고재용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15등급(하위 3%) 중에서도 맨 밑으로 첨단인데 이래서야 대학이나 가겠냐고.
그러자 그가 말하길, 자신은 오직 한 방에 승부를 보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거 뭐 별 걱정 없다고.
자기야 어차피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에 갈 처지도 아니라서
결국 예비고사만 잘 보면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는 일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제가 속으로 생각하길,
'그래도 그렇지. 내신 30% 반영이라면 1등급과 점수 차이가 35점도 넘을텐데…'
그는 진심으로 이 새로운 제도에 대해 괘념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물론 저도 이 치명적인 제도 변화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고 또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그 이전부터 '비진학' 예정인 처지였기 때문에…
(그러나 다음해 봄에 저의 처지(진학과 관련해서)가 일변하면서 엄청난 질곡에 처하게 됩니다.
정말 죽다 살아났습니다. 힘들어서.… 흐흐)

또 한 가지는 바로 '삼청 교육대'의 설치 운영에 관한 조치였습니다.
우리 반 '최규현'은 여름 방학 중에 아무도 모르게 삼청 교육대에 끌려갔고
고삐리임에도, 전과가 없음에도, 특별한 범죄 혐의가 전혀 없었음에도!
설령 삼청 교육대 운영 규정에 따른다 하더라도, 나이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분명한 훈방 대상임에도!
그 악명 높은 '순화 교육'을 감당하고 견뎌내야 했습니다.
입소 훈련 후에도 나오지 못하고 계속 강제 노역에 종사해야 했던 많은 사람들에 비해
그나마 고등학생이라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석방된 것만 해도 정말 다행한 일이라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는 2학기가 개학하고서도 두 주 넘게 지나서야 학교에 복귀했습니다.
학교에 다시 나왔을 때,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지만 인간으로선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결석과 등교를 반복하다 언제부터인가 학교에서 사라졌고 끝내 고향을 등지고 먼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이런 참혹한 일이 우리 친구에게 일어나는 걸 보고
그저 방송으로만 접하던 삼청 교육대 얘기가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닌 걸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다음엔 혹시 내가 잡혀가지 않을까하는 괜한 걱정을 하는 놈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등교해서 1교시 수업을 앞두고 멍하게 앉아 있던 제가 뭔가 허전해서
무심코 뒤를 돌아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당연히 나타나야 할 멀뚱한 면상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결석은 커녕 지각도 절대 하지 않던 놈이었는데...
새벽차를 타는 처지라서 평소 남보다 삼십 분은 족히 일찍 등교하던 놈이었는데...
그날따라 그가 보이질 않자 저는 걱정하는 마음에 살짝 잠겨들고 말았습니다.

한데, 근심에 막 빠져들기 무섭게 교실 뒷문이 조용히 열리고 그가 헐떡거리며 뛰어 들어왔습니다.
모자를 벗고 자리에 앉아 땀을 삐질거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낯선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위화감의 정체가 뭔가 싶어 새삼 아래 위를 훑어보니 그의 행색이 어딘지 후줄근해 보였습니다.
더 찬찬히 살펴보니 그의 옷차림이 달라져 있는 걸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원래 명찰이 달려 있는 부분에는 새로 명찰을 밖아넣은 표시가 났고
옷의 색깔도 전보다 더 바래보였으며 크기도 더 커졌고 한층 낡아보였습니다.

그도 제 눈길의 의미를 알았는지 약간 머뭇거리면서 이야기했습니다.
전에 입던 옷은 유행을 따르느라 좀 멋을 부려 여기저기 고쳐 입었는데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자기 행색이 남에게 보여지는 일이 부담스럽고 한편 걱정도 되길래
아는 사람을 통해 수소문해서 졸업한 선배의 학교 교복을 어렵게 구한 다음
급하게 명찰만 바꿔 달아 입고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피식거리면서 묻기를,
"고쟁이 너 혹시 삼청에 잡혀갈까봐 겁이 나서 옷을 바꿔 입는 거 아니냐?
이리 급하게 애쓰는 걸 보니 암만 봐도 그런 거 같은데 말이지?"

그가 갑자기 정색하고 말하기를,
그 무렵 자기 고향에서도 잡혀 간 사람이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적절한 이유를 가늠할 수가 없다보니
그냥 막연히 생각하기에, 평소 동네에서 약간 건들거리는 사람 중에 만만한 놈이 있으면
담당 공무원의 숫자 채우기 놀음의 먹잇감이 되어 거기 잡혀가는 수가 있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문득 자기 행색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이러다 자칫 자기도 거기 딸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어,
이참에 아예 교복을 바꿔야겠다고 마음 먹고 새로 살까 했지만 돈이 없다보니...
게다가 그런 걸 이유랍시고 가난한 부모님께 교복좀 새로 장만해야겠으니 돈좀 달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급히 수소문하다가 다행히 졸업한 동네 선배의 옷을 얻어 입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학교가 달라도 교복(심지어 하복도)은 같은 색깔, 모양인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얘기를 듣던 제가 껄껄대며 말하길, "아따~ 고쟁이 십센치는~ 희대의 새가슴일세~"
그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저에게 속삭이듯 말하길,
"너도 평소 선생들에게 툭하면 개기고 선배들하고도 싸움박질이 잦았으니
혹시 그걸 못마땅해 하는 선생 하나가 서(署)에 찔러버리면 그날로 달려가는 수가 있단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바짝 낮추고 조심해야 되는 거여."

제가 피식거리며 말하기를,
"이런 제기랄!
암울한 세상을 떨쳐 일어서는 사나이의 시린 마음을 네 어찌 짐작이나 하겠느냐!
그리고… 그럴 거면 규현이 잡혀갈 때 같이 갔겠지 이사람아!
방학 때 워낙 갑자기 일어난 일이다보니 규현이 잡혀갈 때는 쩝쩝이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또 듣기로는 쩝쩝이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학생 과장을 비롯한 몇몇 놈들이
경찰과 붙어먹고 나서서 한 일이라는 믿을만한 얘기도 있고 하니… 퉤~~
그래도 우리 쩝쩝이가 그런 문제가 있으면 가만 있을 사람은 아니지 않냐!
혹여 낌새가 있다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겠지.
그렇게 믿고 살아야지...
(쩝쩝이=담임 별명. 말할 때 항상 '스읍- 쩝~'하면서 시작함)
그나저나 우리 고쟁이는 이번에 교복 바꿔 입느라 고생도 많았는데,
이걸 어쩐다냐~ ㅋ. 앞으로 두 주일 후면 동복을 입어야 할 건데… 키~히~"

그 말을 듣던 그가 움찔하면서,
"아차차! 어?… 그럼 동복도 빨리 구해야 되는데…"
한 술 더 떠서 제가 염장을 지르는데,
"그런데 말이여. 매주 월요일마다 입어야 하는 교련복은 또 어쩐다냐?
교련 수업이 있는 날도 마찬가지고…
니 교련복도, 특히 바지를 보면,  날티가 충만하던데 말이지!
그러게 뭐하러 교련복에까지 그 지랄을 해놓았다냐~"

재차 화들짝하던 그가 이윽고 아득해하며 가라앉는 걸 실실거리며 바라보던 제가 덧붙이기를,
"고쟁아! 생각좀 해봐라.
너처럼 옷에 장난질쳐서 입고 다니는 놈이 한 두 놈인가 말이다.
아마도 한 반에 열 놈은 충분히 넘어갈 거다.
적게 잡아도 한 학년에 백 명은 넘을테고 학교 전체로는 수백 명 아니겠냐.
니 걱정대로라면 그놈들이 죄다 잡혀갈 수 있단 얘긴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니… 쓸 데 없는 걱정은 접어두고 그냥 조용히 버텨봐라!"
그가 무척 솔깃해하며 간절한 표정으로 되묻기를,
"아무래도 그렇겠지? 괜한 걱정이겠지? 괜찮겠지?... 엉?"
……

고재용의 이런 과민한 대응은 언뜻 생각하면 가당찮은 걱정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지만,
삼청 교육대의 존재라는 것이  그 시대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이번 기회에 '사회의 쓰레기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인간 개조를 시켜 새 사람을 만들던지, 그래도 안 되는 놈들은 죄다 총살해버려야 한다는
가혹하고 무책임한 여론도 분명히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삼청 교육대 사업에 대해 동의하고 성원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집권 세력은 이런 쪽의 여론이 유력하다고 판단해서 감히 저런 일을 저질렀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훗날 삼청 교육대의 운영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참혹한 피해 사례를 제대로 접하기 전까지는
그저 사건 피해자들의 메아리 없는 절규와 소리 없는 비탄만이 무심한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갈 따름이었습니다.
그 혹독했던,  정치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그 엄청난 폭력과 인권 유린의 극한을 보여주었던,
한국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던, 지극히 반문명적인 사건은
억울하고 원통한 수많은 목숨을 희생하고 나서도 긴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뒤늦은 교정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노태우 정권부터 시작해서 노무현 정권까지, 근 10여 년에 걸쳐 겨우 겨우…

한데 가끔 보면, 그로부터 무려 30년이 지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조차
이런 류의 발언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엄존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자니…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삼청 교육대에 먼저 입소해서 교육을 좀 받아봐야 하는데…
맛을 봐야 맛을 알지! 으하하하~

사단 삼청 교육대 교관을 지냈던 군 시절 우리 소대 선임하사가 누차 말하길,
자기도 그런 일을 겪는다면 아마 틀림없이 자살하고 말 것이라… 했습니다.
자기 생애를 통틀어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라고 했습니다.

그해 여름부터 시작해서 한 겨울까지 삼청 교육대 입소자 '모집'은 계속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고재용의 불안도 여전해서 그는 매사에 자중하며 2학기를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끄떡 없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그의 '압도적인 성적'이었습니다.
공부 못 하는 놈도 삼청에 잡아간다는 얘기가 있었다면 아마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면 수석은 틀림없이 내 차지였을텐데…
(풍소소 : 그러기 전에 너도 달려갔겠지 이 사람아!)


중략… (너무 길어져서 중간을 왕창 날립니다. ㅋ)


어느덧 해가 바뀌어 3학년이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반이 달라져 고재용과는 전처럼 자주 어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3학년 4월 초에 다시 대학에 갈 수 있는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를 맞이했고
지난 10개월 간의 쭈구리 생활 때문에 엄청나게 촉박해진 학습 일정을 채워내느라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시험까지 불과 7개월, 그 이전에 완벽하게 날려버린 10개월, …

비록 많이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내 처지에 이게 어디냐싶어
다시 작심하고 하루 16시간 이상 공부하는 결사적인 생활을 흔들림없이 계속했습니다.
시간이 그때처럼 빨리 갔던 시절은 제 인생에서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정말 섬전처럼 달려나갔습니다.

드디어 그해 11월에 시험을 봤고 다음 달에 결과를 얻었으며
해가 바뀌자 바로 대학에 지원했고 합격했으며 기숙사 입사 심사에도 통과했습니다.
이런 일로 바쁘다보니 금방 2월이 목전에 다가섰고 어느덧 학교를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미 3학년 5월부터는 고재용을 전처럼 자주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다시 입시 준비를 하게 되니까 그가 제 시간을 아껴주려고 그리 하는 걸로 느껴졌습니다.
그의 사려깊은 배려가 고마워서 저는 더 마음을 두고 한 달에 두 세 번은 반드시 그를 만났습니다.
내가 그의 교실로 찾아가거나, 그가 오거나, 때론 점심 시간에 학교 본관 앞 나무 의자에서 보거나,
그렇게 가끔 만나서 서로의 사정을 살피고 이런 저런 얘기도 하면서 놀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날도 입시가 임박할수록 점차 줄어들게 되었고
시험 직후인 11월 말부터는 좀처럼 그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사실상 학교 수업이 종료되고 발표만 기다릴 때라
아침에 학교에 와서 출석만 부르고 이리 저리 일보러 다니는 놈들이 꽤 있었습니다.
고재용도 뭔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학교를 비우는 날이 많았습니다.

2월 초순의 어느 날, 드디어 학교 졸업식이 있었는데
한동안 고재용을 보지 못한 제가 그의 반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찾아봤지만
그가 졸업식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얘기만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기, 후기에도 모두 실패해서 뒤늦게 입학 사정을 하는 지방의 몇몇 전문대학을 알아보려고
삼남 지방 전체를 종횡하면서 찾아다니고 입시를 치르느라
도저히 학교에 나올 짬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전날에도 담임에게 전화로, 영주인가 뭐 그쪽에 있는 전문대로 가본다는 연락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날이 아니면 이제 그를 다시 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울적한 생각 때문에
졸업식이 끝나고 오랜 사진 타임이 교정 이곳 저곳에서 떠들썩하게 계속될 동안에도,
평소 알고 지내던 놈들이 여기 저기서 같이 찍자고 불러대도,
다 물리쳐 버리고 사열대 뒷 계단을 느릿하게 걸어 올라간 다음
거기서 서성거리며 멀리 교문 쪽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와 자주 어울렸던 본관 앞 나무 의자에 쌓인 눈을 치워내고 거기 앉아서
혹시 그가 늦게라도 졸업장을 찾으러 학교에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두껍게 쌓였고 날씨도 굉장히 추워 처음에는 양 손바닥을 엉덩이 밑에 괴고 앉아 있다가
점점 기분이 스산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손을 빼낸 다음 느슨한 팔장을 끼고 석상처럼 굳어져
해가 지고 어둑해질 때까지 그저 망연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함께 기다려주던 또다른 친구가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했습니다.
함께 했던 그 친구와도 그날로 작별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이 헛헛하고 쓸쓸한 마음을 안고 교문을 나서야 했습니다.

그날의 걱정대로 그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소식도 전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뒤로도 친구들을 통해 수소문을 열심히 했지만
그는 마음을 나눈 다른 친구가 전혀 없었는지, 600명이 넘는 동기들 시야로부터
어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증발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직 그의 소식만은 전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무(後無)한 사나이 고재용은 제 청년기 추억에서 첫 번째 화석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열 아홉 청년 고재용으로…

이상, 난공불락의 전설을 남긴 후무(後無)한 사나이 고재용에 관한 간단한 회고였습니다.




주) 전무후무(前無後無)에서 前後를 시간 개념으로 보지 않고
  공간 개념이나 서열 개념으로 전용(轉用)해서 임의로 후무(後無)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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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0

允齊님의 댓글

_mk_참으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봄날에 잠시 외출할일이 생겨 한번에 쉬지 않고 지루하지않게 읽었습니다
정멀 필력과 기억력이 대단하십니다

내숭님의 댓글

  잼있게 읽었습니다~~ ^^

향기님의 댓글

향기 59.♡.215.78 2011.03.30 17:31

  금요일에 읽을수 있겠습니다.

안산사랑님의 댓글

  저와 같은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신것 같은데 저는 생각이 가물가물 하기만 합니다.
쎈자님 글을 읽으니 저의 지난 고교시절이 다시한번 떠올라 추억에 젖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1.03.30 19:54

  제가 이 년 전에 6.25 전쟁에 관한 글을 올렸을 때,
안산사랑님께서 댓글로 말씀하시기를, '84년에 입대하셨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때 속으로 "아! 이분은 나하고 동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만약 '84년 상반기에 입대하셨다면 동기일 가능성이 거의 백프로다'라고 추정했습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보니 우리는 '동기'가 틀림없어 보입니다. ㅎㅎ
이제 살아가야 할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게 남겨진 나이가 되고 보니
이 동네에서조차 동년배를 만나는 것이 그저 반가울 뿐입니다.

정말 새삼 반갑습니다!

저도 고교 시절에 관한 기억이 이젠 어느덧 다 흩어지고
파편처럼 몇 토막이 겨우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그토록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우리 때 내신 1등급 간 점수 차이도 이젠 자꾸 가물거리다보니
그게 2.6점 차였는지 2.7점이었는지, 아니면 2.5점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고1, 고2, 고3때 행군갔던 기억은 있는데
각각 어디로 갔었는지도 이제 흐릿해졌습니다.

당시 교련 조회가 월요일이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하는데
교련 수업이 일주일에 두 번이었는지 한 번이었는지도 이제 기억하지 못합니다.

위에 제가 적어 놓은 글에 등장하는 '고재용'이라는 인물이
워낙 특이한 행적을 보였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기억이 상대적으로 생생했을 뿐이지
그 시절 다른 수많은 추억은 이제 주인을 잃고 제 머리 속 어디에선가 방황하고 있거나
아니면 완전히 소거되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왕 얘기하는 김에 당시 교련 과목과 관련된 기억을 덧붙여 봅니다.

저희 학교는 1학년 여름방학 때 교련 숙제가 있었는데
바로 120cm 짜리 나무를 깎아 목총을 만들어 오는 일이었습니다.
그걸로 집총 훈련과 총검술, 각개 전투 훈련을 받았고
열병과 분열 등의 제식 훈련도 목총으로 받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때는 교련 과목이 편성되어 있다보니
우리 학교의 경우 운동장 건너편 산자락에 미니 유격장도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격술 훈련 교장도 있었고…
학교 병기고에는 M1 소총도 몇 자루 있었습니다.

교련 수업 과정에 이 M1 소총 조작 훈련도 편성되어 있다보니
수업 시간에 M1 소총 분해 결합 훈련도 꽤 여러 번 받았습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M1은 분해 결합하는 것이 M16, K2에 비해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용수철이 너무 빡빡해서...
제 기억으론 고교 3년 동안 실탄 사격은 딱 한 번 해봤습니다.
학교 뒤에 영점 사격장도 있어서 거기서 했습니다.
그것도 단 세 발… 흐흐

얘기하고 보니 이거 뭐...
요즘 분들이 보시기엔 고삐리가 아니라 새끼 군바리처럼 느끼실 수도 있겠군요. 으하하하~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1.03.30 21:19

  아참!
이 이야기에 관한 간단한 배경 설명을 덧붙여 봅니다.
원래 제가 이곳에 '시리즈'로 여덟 토막의 에피소드를 올리려고 마음 먹고
첫 번째로 지난 2009년 10월에 '22년만의 해후'를 써 올렸습니다.

근 이 년이 지난 이달 초에 '세 가지가 큰 사나이'를 올렸고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이 에피소드들을 관통하는 제재(題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제 인생을 통해 겪었던 인상적인 '사나이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멋진 사나이' 시리즈입니다. 크하하하~

올려놓은 세 토막의 이야기는, 인물의 이름만 빼고, 전부 실화입니다.
물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제 신상에 관한 내용도 모두 사실입니다.
또 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S병장'은 두 번째 이야기에도 출연합니다. ㅋ
크레모아 오발 사고를 저지른 '황기호'와 함께 근무했던 '신일병'이 바로 그입니다.

고교 시절 친했던 친구 이야기로 세 번째와 네 번째 이야기가 구성되는데
지금 올린 '고재용' 이야기의 말미에 저와 졸업식 날을 함께 지냈던 또 한 명의 친구가
바로 네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으하하하~
이 친구는 정말 독특한 인물입니다.
제 생각엔, '고재용'보다 더 기이한 행적을 남긴 친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기억을 더듬어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일이 계속될수록
점점 더 써내기가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년 전 어느 날, 그저 장난처럼 가볍게,
청년 시절의 어느 지점에서 저와 함께 인생을 보냈던 그리운 인물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행적을 통해 제 인생을 회고해보려고 기획한 일이긴 합니다만,
막상 실천에 옮기고보니…
애초의 생각보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제 기억이 빈약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걸 관둘까하는 생각이 큽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기억이 환기되고 의욕이 생기면 계속해볼 수도 있겠지만…

'최수경' 이야기까지는 꼭 해야 하는데… ㅋㅋ

ohnglim님의 댓글

  어제 일하는 중간에 읽어보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하고
잠자리 들기 전에 아주 재미나게 읽었네요..

어찌보면 기억에 의해서 단숨에 써내려간듯도 보이는데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기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인생선배님이 겪은 인상적인 '사나이들'에 관한 이야기..
쭈욱 기대하겠습니다. 멈추지 말아주세요....ㅎㅎ

모모님의 댓글

  정말 한편의 소설!!

쩡쓰♥님의 댓글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말 기억력도 좋으신듯~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1.03.31 15:32

  제 긴 글은 대부분 단숨에 써내려간 것입니다. ㅎ
일단 다 쓰고 나면 아싸~ 끝! 하면서 잽싸게 먼저 올립니다.
먼저 여기에 올려 놓고 나서 찬찬히 한 번 더 읽어보면서
어법상의 오류나 부적절하게 사용된 단어를 약간 교정합니다. ㅋ

즉흥적으로, 필받을 때 막 써대는 경우가 많다보니
당연히 이곳저곳에 고쳐야 할 부분이 많이 생기지만,
그걸 자꾸 손대기 시작하면, 글의 리듬이랄까, 운율이랄까
뭐 이런 것이 무너지기 때문에 제가 다시 읽어볼 때
어딘지 술술 잘 안 읽혀지는 문제가 있더군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그냥 내버려둡니다~

단어 고치는 것은 대부분 속어, 비어, 은어를 없애는 일입니다. 크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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