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마크
  • 추가메뉴
어디로 앱에서 쉽고 간편하게!
애플 중고 거래 전문 플랫폼
오늘 하루 보지 않기
KMUG 케이머그

일상공감

디지타이징 - 인증 사진 첨부! ㅋ

2012.04.27 15:08 1,032 32 0 0

본문

<사진 설명>

ㆍ제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찍은 사진입니다.
 '60년대에 찍어놓은 단 세 장의 사진 중에 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두 살 위의 제 형이고 어린 놈이 바로 저입니다.

ㆍ비록 친형제 사이라지만 함께 살아보지는 못했습니다.
 형은 문중의 본가가 있는 도시에서 조부모, 고모와 함께 살고 있었고
 저는 첩첩산중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더랬습니다.
 일곱 살 무렵까지는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만날 수 있는 사이였습니다.
 형이야말로 대종가의 십삼대 종손입니다. ㅋ

ㆍ'60년대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대개 사진 전면 구석에 날짜가 새겨져 있는데,
 제가 확인한 다른 두 장의 사진에도 날짜가 보이던데,
 웬일인지 저 사진은 촬영 날짜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사진을 찍은 날짜를 대강 가늠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1964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의 기간 중에 어느 날이었을 걸로 추정합니다.
 모친의 말씀을 들어봐도 대강 저때쯤이라고 하셨습니다.

ㆍ사진에 보면 가운데 쯤에 세로로 찢어진 자국이 보이는데,
 둘이 싸우고나서 열 받은 나머지 찢어버린 걸로 추정합니다.
 제가 그리 했는지, 형이 그랬는지는 피차 기억을 못 합니다. ㅋ

ㆍ600dpi 엡슨 스캐너(SCSI)로 스캔 받았습니다.
 어떤 종류의 보정 작업도 하지 않았고 수평만 잡아서 바로 올렸습니다.




회원 여러분!
저마다 지금까지 살아온 흔적을 정리해서 디지털 도큐멘트로 만드는 일을 하고 계신지요?
저는 평생을 통틀어 일기를 써본 적도 없고 찍어 놓은 사진도 없어서 이 작업이 무지하게 쉽더군요.
심지어 여태껏 다른 사람과 서신을 교환한 적도 거의 없는데다
사회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경로로 제 생각과 의견을 문서를 통해 발표한 적도 없습니다.
일상 생활의 구조도 매우 단순했으며 여기 저기에 제 흔적을 남겨놓지도 않았습니다.
이러다보니 이런 작업조차 별 의미 없는 싱거운 일이 되어버리더란 말입니다.

며칠 전엔 한 시간만에 '70년대 초반까지의 자료를 죄다 정리했습니다.
'단 한 장의 사진을 스캔받아 컴퓨터에 저장하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으하하~
'60년대에 남겨진 저에 관한 유일한 이미지 정보입니다.
이거 뭐~  나머지 '70년대, '80, '90년대도 식은죽 먹기일 것 같습니다.
  
'60년대라고 하면, 사진기를 소유하거나 만져보는 일이 매우 희귀했던 시절이기도 했고
제가 살던 곳이 워낙 첩첩산중의 외진 산골이다보니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 중에서도 사진을 찍는 일이 유독 어려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조차 훗날까지 전통 아닌 전통, 관습 아닌 관습으로 굳어져서
제 가족들은, 특히 저는,  좀처럼 사진을 찍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가끔은 불가피한 상황에 내몰려서도 사진을 찍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텼습니다.
그래서 당시 담임 선생의 갖은 회유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졸업 앨범에 넣는 사진조차도 끝내 찍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해의 우리 학교 졸업 앨범에는 아마도 제 사진이 없을 겁니다.
제 사진이 '없습니다'가 아니라 '없을 겁니다'라고 추측해서 말한 이유는,
앨범을 구입하지도 않았고 남의 걸 빌려서 직접 확인해 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으하하

저는 돐, 백일 사진이 없습니다.
'60년대에 찍어놓은 사진이 단 세 장 밖에 없습니다. 그중 한 장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70년대에도 너덧 장을 넘지 못합니다. 이 사진들은 전부 모친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80년대에는 두 장을 찍었습니다. 이건 아마 국방부와 동사무소에 있을 겁니다.
'90년대에는, 일시에 열 번 정도 찍은 것을 한 번으로 치자면, 두 번이 다입니다. ㅋ
2000년 이후엔 단 한 장의 사진도 찍은 적이 없습니다.

평생을 통틀어 세어 보자면, 열 번 남짓 제 사진을 찍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공문서에 사용되는 신분 증명용 사진도 포함됩니다. ㅋ
이 정도면 그래도 많은 거 아니겠습니까! 으하하~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도통 믿어주질 않더라네~~)



0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32

▦짬짬▦님의 댓글

  얼마전 첫째녀석의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쥔마뉨께서 둘째 사진첩도 맹글어줘야 한다고 하더군요.
출력된 사진만 박스로 한개였는데.... 그걸로 앨범을 어찌 맹글어줘야할지.... 정말 난감했습니다.
(참고로 첫째녀석 앨범 맹글고 나서도 옛날 한복박스 한개만큼의 사진이 남았습니다.)

맞습니다. 저도 사진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시대가 다르다보니 쎈자님 보다는 훠~~ㄹ 씬 많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사진첩 두개는 나오니까요.... ^^

본가에서 10여년 전에 가져왔던 사진첩.... 그거 지금 마뉨께서 보관중이십니다.... 오늘 집에가면 한번 꺼내볼까 생각 중입니다.
갑자기 쎈자님 영향을 받은 짬짬이가..... ^^

▦짬짬▦님의 댓글

  근데.... 저 사진만 놓고보면 상당히 우월한 유전자 집안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

아범님의 댓글

  우왓! ssenja님께서 인증샷을!!

ㅋㅋㅋㅋ
냉커피 마시며 사진 설명 읽다가 뿜을뻔했지 뭡니까~
그런데 가운데 찢긴 라인이 예사롭지않게 정확합니다.
형님어린이의 손 부분이 조금 잘려 나갔을뿐
어디 한군데 손상시키지않고 아주 깔끔하게 찢었습니다.
동생어린이가 아주 온전한 상태로 찢긴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저 사진은 ssenja님께서 찢으신듯…  ㅋ

저도 어릴적 사진이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진들도 전부 어머니 댁에 있지요.
어떻게 생겼었는지도 까먹었습니다.
다음번에 몇장 갖고올까합니다.


그나저나 아주 어렸을때부터 쎄보이셨군요. ㅋ흐흐

아범님의 댓글

  엇! 어느새 누가 다운을... 
두명이나. ㅋ

저작권에 걸릴건데...

아범님의 댓글

  음.... 
아무래도 형님어린이는 어디서 많이 본듯합니다.

르클님의 댓글

  여자들은...... 과거의 사진을 잘 버립니다. (얼굴 변천사 들킬까봐)
딱히 수술한것도 아닌데도 촌스런 모습 신랑한테 보여주기 싫어서...
이쁘고 귀엽게 나온 사진만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에 집에서 누군지 모를 그분(나)의 사진이 나오면 ㅠ.ㅜ

▦짬짬▦님의 댓글

  아범님.... 저건 찢은 사진이라기 보다는 접힌부분인 듯 합니다.... ㅋㅋㅋㅋ

고은철님의 댓글

  일단 준수한 외모를 보아 자라면서
수 많은 처자들을 울렸을듯 싶습니다...ㅋ

아울러 60년대 초,중반의 어린아이들의 모습으로는
피부톤과 영양상태가 상당히 좋아 보입니다...^^

允齊님의 댓글

  갑자기 현재의 쎈자님 모습이 궁금해요

쎈자님 저도 백일사진 돌사진 없는 1인입니다......

무자게 우월한 유전자 집안이신데요...

ohnglim님의 댓글

  오호~ 내려받고 싶은 욕구가...ㅎㅎ

저도 백일사진 돌사진은커녕 저맘때 사진도 한장 없네요.
불만은 없지만서도..ㅋㅋ

하여튼 어머님께서 무자게 든든하셨겠어요..^^

duck3437님의 댓글

  1960년대 그것도 시골에서는 사진찍는 일 자체가 몹시 귀했죠!
마찬가지로 그런 흔적이 없던 저로서는 초등학생때 친구집을 놀러갔는데... 떡하니 친구 돌사진이 액자로 걸려있는 거예요. 그 순간 그 친구가 어찌나 부럽던지~^^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8 02:49

  오호! 우월한 유전자!
저희 형제 사진을 보고도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니! ㅋㅋ

두 명의 여동생을 건너뛰면 그 밑으로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70년생 막내 동생이 있는데,
(며칠 전에 국민학교 다닐 때 담임 선생에게 제가 욕을 했다고 말했던 그 무렵에 태어난 놈입니다.
그때 저놈이 태어나는 바람에 모친께서 아침 밥을 일찍 먹여주시지 못해서 맨날 지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어느날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담임에게 제가 욕을 퍼붇게 된 원인을 제공한 놈이기도 하지요.)
그놈은 형제 중에 인물이 가장 출중하다는 평판을 들었더랬습니다. 제가 봐도 잘 생겼지요.

영유아기 때는 잘생긴 외모 때문에 온 동네 사람의 칭송을 받다보니 모친께서 늘 뿌듯해 하셨지만
나중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갖은 구박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거~
왜냐하면 형제 중에서 공부를 제일 못했기 때문에... 으하하~
지금은 순사질 13년차인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 참한 처자 없겠습니까? 누가 중신좀 서시라요!

제가 어릴 때부터 잘생겼다는 소리는 많이 듣지 못했지만
눈빛이 어린이답지 않게 어딘가 예사롭지 않다는 말은 많이 듣고 살았습니다.
아범 님께서 쎄보인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마 그것 때문일 겁니다.

저희 형은 어릴 적에도 동네 아주머니들이 공인한 미남이었습니다. 크흐흐~
아범 님께서 저희 형의 어릴 적 모습이 눈에 익다고 하셨는데
옛날 '70년대 초기의 어린이 배우들처럼 약간 서구적인 외모로 보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제가 잘 생겼다고 언급한 막내 동생도 저희 형과 비슷한 계통으로 친탁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형제 중에서 저만 약간 다른 계통의 외모인데
친탁도 아니고 외탁도 아니었으며 그저 독자적으로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 사진 가운데에 세로로 벗겨진 부분이나 주름이 보이는 것은 찢어져서 그런 게 맞습니다.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모친께서 이르시기를,
어느날 모처럼(근 일년 만에) 집에 온 형을 보고 딱 십 분 간만 반가워하다가
곧바로 무슨 시비가 일어나서 한바탕 엉켜붙어 싸우고 난 뒤에
제가 분에 못이겨 사진을 찾아내어 찢어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나 형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아범 님의 추측이 정확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진 윗쪽의 테두리에 보면 투명 스카치 테이프를 붙인 것처럼 약간 진한 부분이 있는데
저게 사실 테이프는 아니고(저때는 접착 테이프가 없던 시절이라 ㅋ)
문종이(한지)에 풀을 발라 사진 뒷면에서 이어붙이고 남은 부분이 얖으로 약간 넘어와 있는 것입니다. ㅋ

마지막으로,
고은철 님께서 '60년대 초중반의 어린이들치고는 살집이 좋고 피부가 깨끗하다고 하셨는데
저희 형은 몰라도 저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우리 나라에서 서구형의 낙농 산업을 본격적으로 도입해보고자
각 도(道)마다 시범 목장을 설치하고 지방 정부에서 관리했더랬습니다.
저희 부친께서 공무원이셨는데 바로 그 시범 목장에 파견 나가서 7년을 근무하셨습니다.

한데, 그 목장의 위치가 지금도 우리 나라에서 오지로 손꼽히는 지역에 있다보니
그야말로 첩첩산중, 산골 중의 산골에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면 소재지도 아닌 리 소재지) 동네가 비탈이 심한 산길로 30리를 걸어가야 닿을 수 있었습니다.

부친께서 목장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제가 우유를 많이 먹었고 그래서 살집이 좋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저희 모친께서 유달리 젖이 많으셔서 어릴 때 저희 형제들은 늘 배불리 엄마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비록 형은 갓난 아기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 슬하에서 컸지만
(너무 산골이라 갓난 아기를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어서 도시의 조부모께서 양육을 맡으셨습니다.)
저는 산골에 살 때 태어났고 쭉 부모 밑에서 컸기 때문에
언제나 지극한 보살핌을 받았고 엄마 젖을 원 없이 먹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살집이 좋아보인다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태어날 때 산관을 하신 조모와 산모였던 모친께서 전설처럼 말씀하시기를,
저는 태어나자마자 밥을 먹을 줄 알았다고 합니다. 으하하~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8 15:49

  어!
오랜만이외다!
그러니까... 당신 말을 요약하자면,
형 덕분에 당신까지 거기 묻혀서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집안'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니까
모처럼 기분이 와방으로 좋다~ 뭐 이런 말 아닙니까!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8 15:49

  딴은 그렇지. 흐흐~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8 15:54

  댓글을 읽어보니... 돌, 백일 사진이 없는 분들이 꽤 많군요.

그래서 그런가?
한 이십 년 전부터는 사람 많이 모이는 유원지나 관광지를 가보면
온통 사진 찍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구요.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다고 하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지극히 한심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냥 기억 속에 담아두면 될 일을... 크흐흐~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8 20:21

  다른 나라는 가보질 못해서 모르겠고,
근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사진 찍는 일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건 틀림 없는 것 같소.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갔을 때 가장 짜증나는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예전에는 서울의 고궁이나 남산, 유명한 거리 등지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을
경범죄로 처벌하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더랬소. 크흐~

남겨진 사진이 훗날 옛일을 추억하는 사람의 기억을 도와준다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기억을 파편화시키거나 왜곡하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제 사진좀 그만 찍읍시다!
어떤 풍경이나 인물의 이미지를 남기고 싶으면 그냥 잘 봐두었다가 머리에 꼭꼭 저장합시다!
자기 머릿속의 저장 능력이 부실해서 곧바로 지워진다고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지워진다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지워지는 것이니... 으하하~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8 20:36

  저녁 여덟시 반을 막 넘겼습니다.
역시 토요일이라 굉장히 한적합니다.
밥도 배불리 먹었겠다, 야부리나 한 판 까면서 놀아봅시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8 20:37

  나도 준비됐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8 20:38

  여기 댓글 중에 보면, ohnglim님께서 이르시기를,
'어머니께서 든든하셨겠어요'라고 하셨는데, 모친께서 진짜 그랬습니까?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8 20:38

  에... 그걸 질문이라고...
그냥 덕담으로 하신 말일 뿐인데 그걸 구태여 확인할 필요가 있겠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8 22:32

  누가 그걸 모릅니까!
하지만 '든든하다'는 말을 곰곰히 되새겨보자면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 만만치 않은 곡절과 사연을 내포한 경우가 더러 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보는 겁니다.
당신네 형제를 낳으시고 모친께서 어떤 마음으로 어떤 꿈을 안고 키우셨을까하는 것에 대해
당신이 오랜 세월에 걸쳐 모친을 대하면서 알게 되었거나 엿보았을 어떤 감정이랄까,
뭐 이런 게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걸 한 번 풀어내어 보라는 거지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8 22:35

  물론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듣고 느꼈던 우리 어머니의, 정말 흔치 않은, 절절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연이 있소.
하지만 그 이야기를,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대로 설명하자면,
아주 복잡하고 긴 사연을 풀어내야 하기 때문에 실로 만만치 않은 일이라오.
그렇다면... 생각을 좀 가다듬어 봅시다.

잠시 기다리시오.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9 02:00

  아니 이거!
야부리좀 까자고 했더니 몇 시간째 소식이 없네~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9 02:02

  중간에 잠깐 딴짓좀 하다가 이제 막 다 썼소.
3분만 더 기다려보시라!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29 02:28

  길고 복잡하며 지루하기도 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소.

맨 위에 있는 본문의 '사진설명'에서 내가 말하기를, 우리 형과 내가 비록 친형제였지만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만날 수 있는 처지였다고 했잖습니까? 그것과 관련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위에 다른 댓글에서도 내가 잠깐 설명하기를, 첩첩산중으로 발령을 받아 부임하는 우리 부친과
당시 나를 막 임신하셨던 모친께서 이제 갓 돌이 지난 우리 형을 키우기엔 여건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해서
도시에 거주하시던 조부모께서 형을 맡아 기르시고 부모님만 산속으로 들어가셨다는 얘기도 했잖소.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첩첩산중의 외진 산골 살이를 감수해야 할 처지라고 하더라도
대체 어느 어머니가 이제 막 돌이 지난 갓난아이를 떼어놓고 발길이 떨어지겠습니까!
저희 부친의 전혀 평범하지 않은 진로 선택을 막아서기엔 당시의 풍속으로 봐서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잠깐 등만 돌려도 눈에 밟힐 소중한 자식마저 떨어뜨려 놓고 싶진 않았을 거요.
따라서 제 형의 양육을 조부모께 맡겼던 것은 제 모친과 부친의 뜻은 전혀 아니었다는 거지요.

오로지 조부모의 강권에 따른, 특히 조모의 형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따른 일이었소.
시집 온 지 두 해를 지났고 당시 겨우 스물 네 살에 불과했던 모친께서
시부모의 그런 강경한 의지을 물리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오.
그래서 결국 형을 시어른께 맡길 수 밖에 없었고 이제 막 아이가 들어선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하염없는 눈물과 함께 남편을 따라 깊은 산 속의 오지로 무거운 발길을 돌리고 말았지요.
그리고 드디어 우리 모친께서는 칠 년 간의 참담하고 지옥 같은 산골 살이를 시작하셨다오.
거기서 생떼같은 첫째 딸을 가슴에 묻으셨고 둘째 딸을 낳다가 목숨이 경각에 처하기도 하셨으니...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거요.
우리 조부모께서는 두 살짜리 손자 녀석에 대해서 도대체 왜 그리도 강한 집착을 보였을까?
아이 어미의 간절한 의지를 잘 알만한 처지에서 대체 왜 생이별을 시켰을까?
누구라도 이점이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흐흐~

전에도 몇 차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희 집안은 13대째 종갓집입니다.
17세기 말, 지금으로부터 삼백 수십 년 전인 숙종(肅宗) 연간에,
한양에서 당쟁에 밀려난 어떤 사대부 형제 집안이 낙향하게 되었는데,
형의 가족은 강원도 영서 지방의 감영이 있던 도시 외곽에,
동생의 가족은 충청도의 중심 도시 중 한 곳에 터를 잡고 정착하게 되었소.
두 형제 중 동생이 바로 우리 형제의 13대조 할아버지이셨다오. ㅋ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이, 종갓집에서는 왜 그리도 대(代)가 자주 끊기는지,
우리 형제 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계통이 끊어져서
툭하면 지차(之次) 집안 중에서 양자를 골라 들여 대(代)를 이을 수 밖에 없었다는 거요.

우리 조부께서도 본래는 종손이 아니었으나 일곱 살 무렵에 양자를 가셨다오.
원래는 조부의 증조부의 백씨께서 종손이었는데 그의 손자가 후사가 없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 조부 입장에서 보자면, 칠촌 당숙의 집으로 양자를 간 것이라.
그렇게 해서 우리 조부께선 집안의 11대 종손으로 계통을 잇게 되었다오.

그런데!
조부로부터 불과 두 대도 내려가지 못하고 또다시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는 거요.
원래 우리 조모께서는 무려 열한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중 다섯이나 잃고
4남과 2녀를 합해서 겨우(ㅋ) 여섯 명만 장성하도록 살아남았소.
우리 부친은 그중 둘째 아들이었는데 부친의 형, 내 입장에서 보자면 백부께서 또다시 후사가 없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큰어머니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처지였다는 거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종부(宗婦)를 갈아치울 만큼 가혹한 가풍을 가진 집안은 아니었던지라,
결국 둘째 아들인 제 부친을 통해 후사를 이을 수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요.

이런 조부모의 간절한 바람대로 저희 모친께서는 시집오신 뒤에 바로 태기가 있었는데
몇 달 뒤에 무사히 첫아이를 순산했고 그 아이가 바로, 위에 있는 사진에 나오는, 내 형이었다오.
백부께서 성혼하신 이래 무려 십여 년만에 마침내 집안의 대통을 잇게 될지도 모르는 아이가 태어났으니
우리 조부모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전체 문중의 일대 경사였던 거지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13대 종손이 반드시 우리 형으로 정해진 상황은 아니었다오.
왜냐하면, 가통을 이을 양자를 들이는 권한을 가진 당사자는 어디까지나 우리 백부와 백모였고
그들이 나중에 더 태어날 여러 명의 조카 중에서 양자를 선택하는 절차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오.)

우리 형은 태어나자마자 젖을 물릴 때를 제외하고는 종일토록 조부와 조모의 품에서 떠날 수가 없었소.
아기의 어미인 우리 모친께서는 워낙 경황 없이 낳은 첫아이인데다
낳자마자 시어른께 아이를 사실상 빼앗기고 그저 젖어멈처럼 가끔만 아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
아무리 문중의 경사라지만 우리 모친의 입장에서는 그리 흔쾌하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훗날 내게 술회하셨다오.

그로부터 일 년 남짓 지났을 때 부친께서 도립 시범목장 근무를 지원하셨고
위에서 미리 설명한 것처럼 우리 부모께서는 아이를 조부모께 떼어두고 산골로 들어가셨던 거지요.
그때 이미 모친께서는 나를 잉태하셨는데 산중 생활을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바로 내가 태어났소.
산달이 가까워질 무렵, 조모께서 산관(출산을 돌보는 일을 일컫는 중부지방 방언)을 하기 위해
이제 막 두 돌을 앞두고 있던 형을 데리고 산골 우리집을 방문하셨다오.
우리집까지 오는 동안 고생을 말도 못하게 하신 조모께서는 도착하자마자 모친께,
"너는 대체 이런 곳에서 어찌 살 수 있단 말이냐!"하시며 근심과 한탄을 금치 못 하셨다고 하더이다.

며칠 뒤에 내가 태어났고 그로부터 달포가 지나자 조모께서 형을 데리고 본가로 떠나셨는데,
조모께서 머무시는 동안에 모처럼 어미로서 형을 대하게 된 모친께서는 산후의 불편한 심신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정을 주고 나누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벌써 세 살이 되어 말도 곧잘 하고 눈치가 빤했던 형은,
모친을 대하면서도 시종해서 데면데면하게 굴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속이 몹시 상했다고 나중에 내게 말씀하시곤 했소.
그때 이미 형의 마음 속에는, 조부를 아버지로, 조모와 (함께 살던 시집 안 간) 고모를 어머니로 여긴 지 오래라서
새삼 생모를 대면하면서도 그 애끓는 정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말았던 거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때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첫아들을 대면하면서 겪었던 제 부모님의 느낌이랄가 심정이야말로,
당사자인 제 형은 물론이고 그때 막 세상에 태어난 나에게도, 또 우리 조부모와 부모에게도,
더 나아가 또다른 당사자였던 (12대 종손인) 제 백부와 백모에게도,
그야말로 인생 전체의 행로가 뒤바뀌는 실로 중대한 계기가 될 줄은 그땐 정녕 꿈도 꾸지 못했다는 거 아니겠소. 흐흐~

알면 알수록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라...
세 살짜리 어린 형이 동그랗고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모친에게 '아줌마는 누구야?'하는 표정으로 바라볼 때,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에 잠겨드는 중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그토록 간절하게 그리워던 마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식어가는 느낌도 동시에 생겨나더라는 훗날 모친의 회한어린 회고담마저 내가 듣게 되었소.
이걸 아주 단순하고 거칠게 표현하자면, 정을 떼는 과정이었다고나할까, 뭐 그랬다는 거지요.

모친께서 이런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되신 것은 단순히 어린 아들의 일관된 낯설어하는 태도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소.
첫아이를 낳고서도 시어머니의 손자에 대한 과도한 애정과 집착에 가로막혀
아이의 어미로서 제대로 마음껏 정을 쏟아내지 못한 것이 어느덧 정한으로 남게 되었을 무렵에,
마침내 때맞춰 둘째 아들이 태어나게 되었으니, 그 못 다한 정을 모조리 쏟아낼 만한 대상이 생겼으니,
그로부터 우리 부친과 모친께서는 오로지 나에게 가없는 정을 베푸시며 그야말로 장중보옥처럼 귀하게 키우셨다오. 크하하~

우리 조모와 고모의 형에 대한 강렬한 집착만큼이나 내게 향한 우리 부모의 애정도 정말 대단했소.
훗날, 내 밑으로도 두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이 더 생겼다지만,
내 부모님께서 나를 키울 때처럼, 아니 그 반만큼이라도, 그들을 대하시는 걸 결코 본 적이 없다는 거 아니겠소.
심지어 나는 고삐리가 될 때까지도 부모님께 반말을 하고 살았지만, 내 동생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오.
고삐리인 나는 서슴없이 반말로 "아부지! 돈좀 줘!", "엄마! 지갑좀 줘바!"라고 말했지만,
초등학생인 내 동생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저... 아버지, 돈이 좀 필요한데요."라고 말했소. 으하하~

물론 이런 생각은 내 혼자만의 것은 아니고 훗날 모친과 부친께서 늘 같은 얘기를 하시곤 했다오.
또 우리 동생들도 내가 부모님께 특별한 대우를 받는 걸 적어도 겉으로는 매우 자연스럽게 여겼다는 거요.
어려서 형을 잃고(빼앗기고 혹은 헤어지고), 다섯 살 무렵엔 바로 밑의 여동생도 잃고(죽고) 했던데다
우리 부모께서 생애를 통틀어 가장 힘들고 절박한 순간에 태어난 아이라서 특별히 더 그런 감정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소.
위에서도 말했지만 우리 부모의 나에 대한 이런 강렬한 애정은 결국 형과 나의 운명을 뒤바꾸고 말았다오.

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 드디어 문중에서 종통을 이을 후계자를 선택하는 순간이 다가왔다오.
멀리 떨어져 산골에 살고 있던 우리 부모와 나, 당시 막 태어난 둘째 여동생도 모두 도시의 본가로 불려 나왔소.
당시 오랜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그 뒤로 또 몇 년간 '시립도서관장'으로 재직하시던 조부께서
칠순이 가까워오자 마침내 퇴임하셨고 다른 도시에 살고 있던 큰아들(백부)과 살림을 합치게 되었는데
그와 때맞춰 종손이 될 손자를 선택해서 함께 백부댁으로 옮겨가게 되었던 겁니다.

한데, 그때 아주 충격적이고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소. 정말 심각한 문제였소.

원래부터 우리 조모와 고모 및 다른 숙부들은 당연히 우리 형이 백부의 양자가 될 줄 알고 있었는데
또 문중의 어른이신 조부께서도 평소부터 그런 가족들의 의견에 대해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기 때문에
누구나 다, 심지어 우리 부모까지도, 제 형이 백부의 양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미 양자를 선택할 결정권을 가진 백부와 백모께서 몇 년만에 본가를 방문해서
조부모, 우리 부모, 숙부 내외, 고모 등과 함께 안방에 앉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때때로 밖을 내다보면서 마당에서 놀고 있던 형과 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친께서 부르시길래, 형과 함께 안방에 들어갔는데
우리를 잠시 바라보던 백부께서 대뜸 저를 품에 안으시면서
이놈을 내 아들로 삼고 싶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더란 말입니다! 크하하~

순간, 온 집안에 싸~한 분위기가 돌면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정적이 흐르더군요.
(제가 그때 비록 여섯 살이었지만 어제 일처럼 아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ㅋ)
잠시 후에 당황한 조모께서 이르시기를, "예전부터 네 처에게도 미리 말해 두었고
옆에 있는 네 처도 아주 좋다고 했으며 그리 알고 준비를 다 해놓았는데
네가 갑자기 둘째를 택한다면 그건 옳지 않은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소.
(지금은 오래 돼서 정확하진 않겠지만, 대강 저런 얘기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오.)
그러자 곧바로 뒤이어 숙부 내외와 고모까지 들고 일어나 조모와 똑같은 의견을 내놓더란 말이지요.

조모는 물론 다른 형제들의 강경한 반대에 얼굴이 벌개진 백부께서는 이윽고 부인(백모)를 돌아보며,
"당신은 어떻소? 꼭 첫째여야만 좋겠소? 나도 예전에 첫째가 태어날 때부터 마음 속으로는 내 아들로 여겼지만,
그동안 둘째도 태어나고 쟤네들이 커나가는 걸 계속 지켜보다보니 나도 모르게 둘째로 마음이 기울더이다.
하지만 당신이 첫째가 좋다고 하면 나는 당신 의견을 따를 것이오" 하시더란 말이지요.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백모께서도 예상 밖의 말씀을 하시더이다.
백모께서는 "나는 둘 중 누구라도 괜찮아요. 당신이 알아서 해요." ㅋㅋ

그러자 얼굴이 환해진 백부께서 이윽고 조부께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아버지! 저는 둘째를 갖고 싶습니다. 이 일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인지 살펴 주십시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계시던 조부께서 무겁게 입을 열며 답하시기를,
"내가 옛날에 재당숙 어른댁에 종손으로 입적할 때는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맏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되었지만, 가능하다면, 사내 형제가 여럿이라면,
본래 맏이는 자기 직계 혈통을 잇는 것이 우선이고 둘째를 종가의 양자로 내주었니라.
그러니... 네 선택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소.

재차 자신을 얻은 백부께서는 부인(백모)를 돌아보며 마치 확정이라도 지은 듯이 단호한 목소리로,
"그러면 저는 둘째를 호적에 입적하겠습니다! 당신도 그리 아시오."하시더란 말이지요.

한데, 바로 그 순간!
그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묵묵하게 앉아 계시던 제 부친께서 갑자기 형(백부)을 노려보면서,
"얘는 절대 안돼! 큰놈을 데려가든지 아니면 그냥 가든지 그렇게 해!"하시더란 말이지요.
이에 크게 당황한 백부께서는 곧바로 조부를 향해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고
한편에 있던 조모와 고모는 몹시 기꺼워하는 표정을 드러냈으며
큰어머니께서는 옆에 앉아 있는 동서(제 모친)의 손을 꼬옥 잡아주시며 눈을 감으셨소.
제 모친께서는 이러나 저라나 어떻게 되든 간에 아들을 잃게 되는, 가슴이 부서져나가는, 일이라서
그저 입을 두 손으로 막은 채 말도 하지 못하시고 오직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계셨다오.

(중략)

바야흐로 누군가 타협을 알선하고 또 필요하면 결정을 내려줘야 할 순간이 되었다오.
당시에 가족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권위에 기반해서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려줄 사람이라면,
당연히 조부 밖에 또 누가 있었겠소. 결국 조부께서 무거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소.
"이 사안은 아이들의 친권자인 부모의 의사가 가장 무거운 힘을 갖는 것이니라.
옛날에 너희 친조부께서 나를 양자로 내어주기 싫다고 하셨다면 아마 종가로 입적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맏이였는데도 너희 친조부께서 양자로 선뜻 내어 주셨기 때문에
종가인 양조부댁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둘째의 친부인 네 동생이 내어줄 수 없다고 한다면
너는 그 말에 따라야 하느니라. 그러니 첫째를 양자로 받아들이도록 하여라!"하셨다오.
그러자 못내 아쉬워하는 얼굴로 앉아 계시던 백부께서 잠시 후에 마음을 정리하시고 그리하겠다고 말씀하셨소.
그러면서 내 부친에게, "형이 못 나서 너에게 정말 못 할 짓을 저지르고 마는 구나. 미안하다.
내가 데려가서 정말 잘 키울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아우야!"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더이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백모께서 제 모친을 꼭 안아주시며 같은 말을 여러 번 하시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셨오.

이제 드디어 떠나갈 자식이 정해지자 모친께서는 형을 가슴에 깊숙하게 파묻어 안아주시면서
마침내 천둥처럼 굉렬한 통곡을 쏟아내시는데 그걸 바라보던 나도 큰 소리로 함께 따라 울기 시작했다오.
하지만 바로 옆의 부친께서는 의외로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계셨소.
이건 순전히 내 짐작이긴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어딘가 홀가분해하시는 기분도 보이시더란 말이지.

형이 여덟 살, 내가 여섯 살이 되던 '60년대 말의 어느 설날 아침에
우리 형제의 운명은 이렇게 뒤바뀌어 갈라져 버렸다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형은 그저 계속해서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기쁨 때문에,
또 만약에 동생(접니다. ㅋ)이 백부댁으로 가게 되면 자기는 낯선 친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걱정 때문에
그날 일이 그저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했다면서 당시의 철없는 행동을 씁쓸하게 회고하곤 했다오. 흐흐~

결정이 있고 난 일년 뒤에, 형은 조부모, 고모와 함께 백부를 따라 강원도 원주로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나는 전과 다름없이 계속해서 부모와 함께 또 동생들과 함께 살아가는 행운을 누릴 수 있게 되었소.
형이 백부 댁으로 옮겨간 지 얼마 후에, 우리집도 7년 간의 긴 산골 오지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도시로 이사오게 되었다오.
원래 부친께서는 모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산골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들어가셨던 것인데,
내가 취학 연령에 이르게 되자 결국 모친의 극렬한 주장을 수용하셔서 마침내 뜻을 꺾고 도시로 전근 신청을 하신 거라오.


이제 이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소.

위에서도 두어 차례 이미 말했다시피, 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우리 형제는
일 년에 한 두 차례 밖에 만나지 못하는 사이였다고 했는데,
사실은, 내가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도 계속 그렇게 자주 만나지 못하고 지내게 되었다오.
일곱 살까지는 형이 조부모와 함께 본가에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자주 못 만났고
일곱 살부터 열여덟 살 무렵까지는 형이 백부 댁에 옮겨가서 살았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했소.
하지만 자주 만나지 못 했다고 해서 서먹하거나 낯선 사이는 전혀 아니었소.
우리는 만날 때마다 온종일 영켜붙어 싸움박질을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냈다고 볼 수 있소. 크흐흐~

이쯤에서 다시 환기해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지 않겠소!
다른 게 아니라, 옛날에 백부께서 나를 입적시키고 싶다는 의견을 내보이셨을 때,
우리 부친께서 강력하게 반대하시면도 단호하게 물리치셨던 일 말입니다!
그때 모친께서는 깊은 절망감, 상실감에 따로 의중을 드러내지는 않으셨지만,
훗날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에 모친께서 옛 일을 회고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나 나나 너를 큰집에 양자 보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단다.
네 형을 보낸 일에 대해 우리는 한시도 후회한 적이 없어. 네 형은 그리 될 운명이었던 거지.
형이 큰댁으로 옮겨가고 얼마 후에 네 아버지가 나한테 말씀하시기를,
첫째를 잃고서는 살 수 있지만 둘째를 잃는다면 절대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시더구나.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너를 보냈다면 아마 너희 아버지와 갈라서던지 죽어버렸을 게야.
그 외진 골짜기에서 갖은 고생 속에 낳은 두 자식 중에 벌써 하나를 잃었는데
너마저 떠나간다면 내가 어찌 하늘을 보고 살 수 있었겠느냐."

그때 나는 모친의 저 말씀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은 감회에 젖어 하루 종일 울었다오.
나에 대한 부모님의 한없은 사랑에 감격한 것도 있겠지만, 함께 그 어려운 시절을 살았던,
결국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등졌던 두 살 아래의 여동생이 미치도록 그리워져서...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 부모께서 큰댁에 나를 종손으로 내어주지 않고 형을 보낸 것은
형보다 내가 부모와 함께 오랫동안 정을 나누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비록 두 살 위의 형이 우리 부모의 첫아들이었다지만 일찌기 품에서 떨어져 살다보니
나중에 두 형제의 인생과 운명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을 때, 주저없이 저를 선택하셨던 거지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제 형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또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럴 리야 없겠지만, 지금 제가 이곳에 써놓은 글을 부디 그 사람이 읽지 말아야 할 텐데... ㅋㅋ


밤도 깊었으니 이쯤에서 문제를 하나 던저놓고 종을 쳐야겠습니다.

유부방 회원 여러분!
만약에 당신이 우리 큰아버지의 입장이라면,
즉, 큰 문중의 12대 종손인데 마침 후사가 없어서(ㅋ 죄송!)
동생이 낳은 두 아들 중에서 양자로 입적할 놈을 골라야 한다면,
또 그 두 아들이 저 맨 위에 있는 사진 속의 두 아이들이라면,
당신은 둘 중에서 누구를 자식으로 선택하겠습니까?
자! 한 번 골라보시라요. 으하하~

아범님의 댓글

  음… 만일 그 입장이라면
백부님의 선택과 같았지싶습니다.
생긴걸로만 보자면 형어린이가 더 미남이지만…
동생어린이에게 더 눈이 갑니다.
뭐 지극히 개인적 판단에 따른 선택입니다. ㅋ흐흐



동생분에 대한 말씀을 예전에 잠깐 하셨던것 같은데
그리움이란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지는거 같습니다….

맛간토시님의 댓글

  전 중고딩시절 사진부터 10년전 사진까지
모두 구석에 박혀있습니다
이상하게 내 자신의 사진을 보자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잘 보지않게 되더군요
인화지위에 송곳으로 기념적인 문구(?)를 적어놓은걸보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더이상은 못보겠습니다

아범님의 댓글

  음.. 중고딩시절 사진이나 함 찾아봐야겠군.

그런데 그 시절 사진들을 보면 첫사랑 여인이 자꾸 생각나서 안되는데...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30 18:55

  아범 님의 중고딩 시절에 뭐가 있긴 있었나본데...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30 18:55

  조만간 진실이 밝혀질 날이 올 거요! ㅎ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4.30 18:55

  저 위에 댓글을 올리셨던 르클 님의 말씀을 보았고 또 맛간토시 님의 얘기도 읽어봤습니다만,
그게... 알고 보면 누구나 겪는 일 아닌가 싶습니다.

제 친구들을 보면, 벌써 20대 중후반만 되어도 옛날 중고딩 시절에 찍어놓은 사진을 차마 눈 뜨고 쳐다보질 못하더군요.
한마디로 "참을 수 없이 쪽팔리다"는 거지요. 크흐흐~

르클 님 말씀처럼 남에게, 특히 신랑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꼭꼭 숨겨두었던 청소년기 사진들을
어느날 친정에 들른 신랑이 마침내 찾아내어 킬킬거리며 열심히 보고 있는 걸 발견하는 아득한 순간이나,
모처럼 집에 놀러온 (어른이 되어 사회에서 사귄) 친구 녀석이 허락도 없이 내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옛날 중고딩 시절의 사진첩을 발견하곤 사진 주인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기어이 사진첩을 들춰서 거기 있는 수없이 많은 오그라드는 사진을 쳐다보면서
때론 비웃고 때론 썩소를 날리고 또 때론 껄껄거리며 끝까지 다 보게 되는 순간을 만나는 것도,
사실 막상 겪어보면 그런대로 참을 만한 일 아니겠습니까. ㅋㅋ

저도 옛날에 친구 집에 놀러가서 그의 옛날 사진을 보면서 가가대소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더랬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울긋불긋하던 사진 주인놈도 나중에는 함께 킬킬거리며 사진을 보게 되더란 말입니다.
사진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치밀어오르는 낯뜨거움이야 뭐 꼭 사진 속의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겠지만
그럴 때마다 서로 수없이 등짝을 두들겨패면서 겨우 버텨내다보면, 결국엔 끝까지 다 보게 되더란 말이지요. 크흐흐~

아범님의 댓글

  에이~  뭐가 있긴 뭐가 있겠습니까~~
제 나이때의 중고딩 시절에 연애 한 번 안해본 고등어들이 어딨습네까~~ ㅋ

그저 그 옛날 그 때가 그리울 뿐이지요. ㅋㅋ

전체 944 건 - 2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