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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공감

Taunta & 정태현

2012.03.13 14:25 889 32 0 0

본문


1980년 겨울이었습니다.
서울로, 다른 대도시로, 대학을 다니려고 떠났던 동네 형들이 방학을 맞아 일제히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두어 살 더 먹었어도 어릴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코흘리며 침흘리며 어울려 지내던 사이였다지만
그 무렵에도 나는 여전히 한심하고 자세 안 나오는 고등학생일 뿐이었고
그들은 그야말로 한 끗발 날리던 대학생이었던지라,
머리를 길게 다듬어 기르고 사제 옷과 구두를 이미 자연스럽게 소화해내기 시작한,
말 그대로 성인이자 준사회인으로 깔끔하게 탈바꿈했던 시절이라서
함께 시내를 돌아다니기엔 서로의 간극이 너무나 넓어 보였습니다.

그해 초겨울에 그들 손에 이끌려 들어가보았던, 시내에서 제일 유명한, 음악다방에서
한 선배가 비장의 초식 구결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리퀘스트 용지에 적어내려가면서 이르기를,
'음악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라고, 'Led Zeppelin, Black Sabbath, Grand Funk Railroad만 있는 것도 아니'며
'진짜 좋은 음악은 바로 이런 노래를 말하는 것'이라고 시답잖은 거만을 떨면서 소개하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Taunta & Natucket Sleighride

보컬리스트이자 유망한 기타리스트였던 레슬리 웨스트(Leslie West)라는 사람이 주축이 되어
펠릭스 파팔라디(Felix Pappalardi)와 함께 1969년에 결성한 하드 락 밴드가 있었는데
그들이 1971년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에 실린 노래라고 했습니다.
처음 들어본 그 노래는 정말 좋았습니다. 그날 이후 그 음반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구 20만 남짓한 중소 도시의 레코드 가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노래는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봄이 되자 학교 생활에 바쁜 나날이 이어지면서
그후 다시는 들어볼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제 의식에서 지워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두 해가 지났고 봄이 되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 다음 주에 가입한 학생회관 3층의 서클 사무실에서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벌써 머리를 덥수룩하게 길렀는데 하얗고 기다란 얼굴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썼던 호리한 중키의 청년이었습니다.
어찌보면, 개그맨 '박세민'을 세로로 약간 늘려놓은 것처럼도 보였습니다.

남학생이 많지 않은 불문과에 입학했으며 서울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하고 있는 외관처럼 성격도 매우 내성적이었고 목소리도 작게 조근조근 말하는 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문학 청년'의 이미지였다고나 할까, 뭐 그랬습니다.

한편, 그때는 대학에 '학생회'는 커녕 '학회'도 없던 시절이었고
학교 당국에 의해 임명되는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명목뿐인 학생 자치 지구의 대표 행세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공개 서클' 활동도 심하게 제약을 받았는데, 우리 학교의 경우에는, '사회과학' 및 '문예', '종교' 서클들이 많이 몰려 있던
학생회관 3층, 4층의 장학과 사무실에 여러 명의 사복 경찰관이 반공개적으로 상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 캠퍼스 곳곳에는 (당시 추정하기에) 7~8백명의 사복 경찰 병력이 진주해서 학생 생활 전반을 감시했더랬습니다.
돌발적인 학내 시위가 발생하면 (오더를 받은) 시위 참가 학생들보다도 오히려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매우 과격하고 신속하게 시위를 초동 진압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5공 정권이 정식으로 출범한 지 1년쯤 되었을 무렵이라 정권의 물리적 기반이 가히 최고조에 이를 때였습니다.
교내 학생 시위는, 상대적으로 운동 역량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 세 군데의 학교조차도,
시위 참가 인원 2~3백명, 시위 지속 시간 5~10분, 시위 후 검거 및 구속 인원 1~3명,
체포 연행 후 강제 징집되는 인원은 셀 수 없을 정도로, 학생 운동 공간 자체가 매우 협소하고 열악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두세 번 정도의 교내 시위를 하고나면, 학생 운동 지도 세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심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감내해야 했으며
역량을 회복하는 일에 거의 한 학기를 전부 소모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상시적으로 기획되고 진행되는 소위 '조직사건'에 엮여 들어가는 일도 다반사라
타겟으로 찍혀 괴멸적인 타격을 받는 학내 정파 조직도 속출하다보니 매 학기마다 인적 손실이 엄청났더랬습니다.

또 당시에는, 훗날인 '80년대 중후반처럼, 시내 요소에서 진행되는 대규모의 학교 간 연합 시위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고
그 시절의 '가투'(가두 투쟁)라고 해봐야... 개별 학교 '권내'에서 '기간 요원' 2~3백명이 동원되어
간헐적으로 시도하는 소규모 '기동전'이 고작이었습니다. 말이 거창해서 '기동전'이지, 알고 보면 별 거 아니었습니다.
사전에 약속된 교통 요지나 인구 밀집 지역에 은밀하게 집결해서 계획된 시간에 기습적으로 도로나 시설을 점거하고는
길어야 5~10분 동안 스크럼을 짜서 돌며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 병력이 접근하기도 전에  해산한 다음,
다음 집결지로 신속하게 이동하고 거기서 다시 잠깐 시위 투쟁을 하다가 또다시 다음 집결지로 이동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그러는 중에 'P'(유인물)를 배포하는 일도 선전 사업으로서 매우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에는 신문 방송 등의 보도 매체 통제가 거의 극한을 달리던 시절이다보니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유인물에 의한 선전 투쟁이 핵심 사업 중 하나였더랬습니다.

그 엄중했던 햇병아리 시절, 일년을 '학생회관 3층'의 몇몇 친구와 함께 보냈습니다.
물론 불문과 '정태현'도 당연히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 무렵 서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과학 이론 학습'과 '토론'에 늘 함께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높은 수준의 보안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은밀하게 선배로부터 전달되는 '오더'를 함께 받았으며
교내 시위 투쟁에 참가했을 때는 언제나 제 옆에서 혹은 제 앞뒤에서 함께 어깨를 걸고 움직였습니다.
'가투'에 나설 때는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보안이 유지된 상태에서 '오더'를 받았는데
그때도 언제나 가투 지역까지 함께 움직이곤 했던 몇몇 동료 중에 늘 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시월 중순의 어느날부터 저는 더이상 학생회관 3층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자주 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서브로 내려간 인자(因子)"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OC(공개 서클)' 조직들의 하부에  속칭 'SUB'라고 하는 여러 개의 '비공개 조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설명을 단순하게 도식화해서 해보자면, 그게... 그러니까... 개별 단위의 '공개 대중 조직'(서클)과  
'상위 학생 운동 지도조직(비공개)'을 연결하는 중간 지대에 위치하는 조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각 '서브' 조직은 설계된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역할을 부여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단순한 '서브'에서 깊숙한 'UC'에 이르기까지 존재 형태도 다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명을 보다 구체적으로 하자면, 예를 들어, 어떤 단일 서브 조직에는 여러 곳의 공개 서클 출신들이 함께 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공개 서클 조직을 (막후에서) 운영하는 임무를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클 상호 간, 여러 학내 정파 조직 간의 (낮은 수준의) 협의 기관으로 설정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주어진 특정 기간과 공간에서 CT 쪽에서 내려오는 방침에 맞추어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투쟁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거나
큰 규모의 정치 투쟁 과정에서 손실이 불가피한 조직 역량을 은밀하게 보존하는 임무를 맡을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지향을 갖고 있는 정파에서는 '현장 진출을 위한 준비 조직'으로 설정해서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다른 경우에는 특정한 임무를 위해 활동하는, 예를 들어 '이론 선전가 그룹', 조직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해 시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지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과거 'OC' 시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심한 '생활 보안 수칙'을 실천하면서 지내야 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더이상 학교 캠퍼스 안에서 동료들과 어울리는 일을 자주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에 가입해서 활동했던 서클에도 거의 출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복 경관들이 감시의 눈을 번뜩이는 학생회관의 출입 자체를 꺼려해서 거기 지하 학생식당도 잘 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지하 활동' 초기에는 같은 선배 조직원에게 속해 있는 옆 동료의 인적 사항도 알지 못하고 시작했더랬습니다.

'운동 인자'로 활동하다보면 그렇게 활동 공간이 달라지는 일도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 일이 남의 일이 아닌 것이 되고보니 갑자기 차단된 옛동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새로이 변화된 신분과 역할에 맞추어 유연하게 재조정하는 것이 그리 수월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두어 달 지나다보니 자연스럽게, 혹은 어색하게 그들과 소원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제가 활동을 청산하고 일반 학생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짐작하고 있었고
다만, 일하는 공간과 맡겨진 임무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걸 대강은 알고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불문과 '정태현'과도 역시 더이상 자주 만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해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며칠 지났을 무렵,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습니다.
그가 나를 보더니 그날따라 몹시 반가워하면서 지금 집에 가는 길인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제게 권했습니다.
모처럼 마음이 동했는지 저도 그러자고 했고 곧 함께 버스에 올라타고 방학동에 있다는 그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방학동'이라는 곳을 TV 드라마에서 언급되는 것만 보았지 실제로 가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당시 지극히 흔했던 단층 개량 주택 밀집 지역 중에 있었는데 평범한 가정으로 느껴졌습니다.
그의 집에 들어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함께 저녁을 먹은 다음 그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는 세 평에 약간 못 미치는 작은 방에서 어릴 적부터 살았는데 놀랍게도 방 안에 큰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쪽 벽에 거의 천장까지 붙은 책장에는 어림 짐작으로 거의 천 장 남짓한,
(당시 대학생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LP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거의 전부가 외국 팝음반이었습니다.

그날 그가 나를 보자마자 집에 가자고 했던 것은, 단순하게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자는 얘기는 분명히 아닌 것 같았지만
막상 그의 방에서 둘이서만 마주 대하는 순간이 되었다고 해서 별다른 얘기를 더 꺼내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내게 이르기를, "그쪽 생활이 힘들지?"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심드렁하게, "말 그대로 생활이 힘들긴 하지. 돈이 없어서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라고 대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시익 웃으면서 옛날(벌써 옛날이라니, 불과 몇 달 전인데) 신입생 시절에 함께 했던 추억을 들추면서
이런 저런 심상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다가 갑자기 책장에서 음반 한 장을 빼어 들었습니다.

바라보던 제가 웃으며 대뜸 말하기를, "이런 부르조아 시키, 양키 음악을 여태도 듣고 있다니~ " 했더니,
그가 대꾸도 없이 그저 크게 웃으며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려놓았습니다.
역시나 '빽판'이라 음질이 꽤 지저분했지만 피아노로 시작되는 잔잔한 전주가 흘러나오면서 바로 이어지던 그 곡이야말로...
몇 년전에, 고삐리 시절에 동네 선배 형이 음악다방에서 들려주던 바로 그 노래라는 걸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노래에 집중하는 기색을 그도 느꼈는지, "역시 이 노래를 잘 아나보지?"라며 웃고는 노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다른 음반을 걸었는데, 그 음반 중에서는 마이클 쉥커가 있던 'UFO'의 'Try Me'라는 곡을 들려주었습니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대답을 전혀 하지 않던 제가  잠시 후에 그에게, 예전에 그 노래를 알게 된 사연과
음반을 구해보려고 좁은 시골 구석에서 눈물겨운 노력을 했었다는 추억을 함께 풀어 놓았습니다.

그말을 듣던 그가, "지금 당장 녹음해서 줄게"하더니 바로 'SMAT'(ㅋ) 공 테이프 하나를 데크에 넣었습니다.
60분짜리 테이프라서 한 곡만 넣기는 아쉬워서 몇 곡을 더 채우기로 마음먹고
그와 함께 수집된 음반을 차례대로 뽑아 훑어가면서 본격적으로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의 음반 컬렉션을 찬찬히 훑어보면서 제가 받게 된 인상이 있다면,
그는 '팝음악을 아주 많이 듣는 서울 출신 먹물들의 지극히 표준적인 컬렉션'을 갖추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와 함께 한참 고른 끝에 선정된 몇 곡이 있었는데 그중에 지금도 기억하는 걸 한 번 떠올려보자면,
Taunta & Natucket Sleighride (1971, Mountain, 앨범 'Nantucket Sleighride'),
I'd Love to Change the World (1971, Ten Years After, 앨범 'A Space in Time'),
Throw Down The Sword (1972, Wishbone Ash, 앨범 'Argus'),
Do What You Like (1969, Blind Faith, 앨범 'Blind Faith'),
July Morning (1971, Uriah Heep, 앨범 'Look At Yourself'),
White Room(1968, Cream, 앨범 'Wheels Of Fire'), ...
그 외에도 두세 곡이 더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아니면 혹시... 기억에 남아 있는 저 여섯 곡이 전부일 수도 있고... ㅋ

그가 녹음하느라 바쁘게 음반을 갈아끼우는 중에 문득문득 말하기를,
자기는 요즘 부쩍 고민이 많은데 어디 믿고 가슴을 열어놓을 곳이 없어서 정말 답답하다고,
일을 하다보면 가슴은 뛰는데 한편으론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많아졌다고,
예전에는 대의를 좇고 동료들과 함께 하는 일에 신념과 보람을 느껴가면서 했지만
요즘에는 뭔가 주체적인 결단과 선택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가는 느낌이 크다고,
하지만 이제 이런 고민을 하는 시절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주변에 없어졌다고,
자기는 글을 쓰고 싶은데 지금의 생활과 양립시켜 나가기가 너무 힘들다고....

그는 몹시 외롭고 지쳐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게 필요한 말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저 한다는 말이라곤, "2학년 올라가면 더 깊숙한 성찰의 기회가 올 거야."
덧붙여, "자기 존재에 대해 결단이 필요하다면 그때 가서 하면 되는 거지"라고 무심하게 던져놓고는 말았습니다.
내 말을 듣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는 확실하게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무언가 다른 수준의, 다른 차원의, 결심이 임박했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제게 안겨 주었습니다.

녹음이 끝났을 무렵, 시간이 밤 열시를 넘어가고 있어서 저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도 나를 따라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 나와서 배웅해주었습니다.
제가 버스에 올라타고 밖을 내려다보니 그가 나를 보며 웃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멀어지는 그를 그냥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불문과 정태원과 헤어진 것이 학생 신분으로는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고는 정녕 생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해 겨울방학 동안 귀향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원래 함께 생활할 예정이었던 선배가 갑자기 도바리를 치는 바람에 일시에 거처가 없어져서
며칠을 서울에 머물면서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결국 귀향하고 말았습니다.
시골 집에 내려오자마자 기차역에서 화물 열차에 광석을 싣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긴 겨울을 보냈습니다.

다음해 봄이 가까워지고 2월 말에 상경해서 새달 초부터 2학년으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삼월 초순의 어느날, 대강당 남쪽 화단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내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어떤 씹어먹을 종간나 쉐키가!" 하면서 뒤돌아봤더니 경제학과에 다니는 '조인식'이라는 놈이었습니다.
제딴엔 너무 반가워서 하는 짓이라 제가 뭐라 할 수도 없어서 그냥 조용히 그러나 예리하게 부자지를 걷어차 주었습니다.

한참을 웅크려서 덜덜거리던 그놈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아참! 너 태현이 소식 아냐?" 하길래,
"태현이가 왜! 겨울방학 초에 잠깐 봤는데 잘만 지내더라."라고 했더니,
그놈이 소리를 죽여가면서 급박하게 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지난해 연말에 갑자기 기획된 소규모 '가투'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 나갔다가 붙잡혀서 연행되었다가 바로 다음날 논산으로 실려가서 입대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 드문 일도 아닌데다 저학년이다보니 구속되어 기소된 일도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그저 몇 마디 보태는 것으로 헛헛한 감상을 대신할 따름이었습니다.

그해 봄에는 그 지난 해와는 학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져서 4월이 되자마자 학내 시위 투쟁이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4월 초부터는 학예제 행사와 4.19 행사가 이어지는 '황금 시즌'이라
학내에 진주해 있는 공권력도 그렇고 학생 운동 세력도 각자 준비된 역량을 최대한으로 쏟아내는 시점이라
일주일에 두세 차례씩 크고 작은 시위가 빈발했고 중순부터는 대규모의 가두 투쟁도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활동가의 숫자와 정치 투쟁 역량 면에서 지난해에 비해 비약적으로 성장했던 학생 운동은
아직도 여전히 학내에서 경찰 전투력을 압도하진 못했지만 두세 번에 한 번 정도는 호각을 이루어
비교적 장시간(1~2 시간) 시위 투쟁을 지속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은 적어도 서울 시내에서 관악을 필두로 안암이나 신촌에서는 비슷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4월 투쟁이 끝나고 5월이 되자마자, 당시 대학가는 축제(대동제) 기간에 접어들게 되고
곧이어 오월 항쟁 기간을 맞아 투쟁 열기가 상반기 중 최고 수준으로 고양되는 시점을 맞게 되는데
우리 학교도 오월 초부터 며칠간에 걸쳐 축제(아직 대동제로 완전하게 바뀌기 전이었음) 기간이었습니다.
당시의 축제 기간에는 훗날인 '80년대 중후반처럼 정치 투쟁이 대종을 이루는 국면이 아직은 아니었고
기존의 전통적인 '축제'와 훗날의 '대동제'가 내용 면에서 뒤섞인 과도기적인 형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축제 첫날은, 이젠 뭐...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본교 및 타교 학생들이 교정의 이곳저곳에서
그냥 평범한 여러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종일토록 웃고 떠드는 행사가 많았고
둘째 날 오후에는 대학 본관 아래 대운동장에서 굉장히 큰 야외 행사가 벌어질 예정이었는데
그날 정오부터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 벌써 2천 여명이 참석한 별도의 집회가 개최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학생 운동 지도 조직에 의해 계획된 실로 오랜만의 대규모 정치 집회였습니다.

저도 그날 오전부터 안면이 있는 동료들과 그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행사가 진행되고 있던 중에 지루해하던 제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는데
멀리 문과대학으로 올라가는 언덕 중간에 빽빽하게 들어찬 일반 관중 무리 속에서
군복을 입은 군바리 하나가 내 얼굴이 그쪽을 향할 때마다 이쪽으로 손을 흔드는 게 보였습니다.
입대한 학생이 휴가를 맞아 친구 만나러 학교에 찾아오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저는 누군가 휴가를 나와 친구를 찾고 있는가보다하면서 별 생각 없이 그냥 스쳐볼 뿐이었습니다.

오후 두시를 넘어서 이윽고 집회가 끝나자마자 광장에 가득 들어찬 군중의 뒷쪽부터
농악대를 선두로 스크럼이 짜여지며 광장을 한 바퀴 순회하자 다른 학생들도 일제히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선두가 문과대학 쪽 언덕을 완전히 넘어가서 서관 서북쪽의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대학 본관 앞에서 잠시 멈춘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올라가 대학원 앞을 지나
중앙도서관 앞에서 경영대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다가
대운동장 울타리를 따라 본관 쪽으로 다시 움직이면서 입구를 통해 대운동장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크럼의 거의 맨 선두쪽에 있었는데 대열이 문과대학 앞을 지날 무렵에,
누군가 뒷쪽에서 다가와 제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을 받아 무심코 돌아보았습니다.
노란 일병 계급장을 새긴 작업모를 쓰고 검붉은 피부에 껑충하고 호리한 군인 하나가
대열 바로 옆에서 제 뒤를 따라 걸으면서 히죽거리며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드디어 그가 바로 불문과에 다니던 '정태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를 알아보자마자 저는 대열을 이탈해서 그와 포옹하고 곧이어 반갑게 손을 맞잡고 흔든 다음에,
그날 시위 대열의 최종 목적지인 대운동장 쪽으로 그를 이끌고 내려가 스탠드에 함께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잠깐이긴 하지만 뭐라 형용할 말이 딱히 떠오르질 않아 그저 망연하게 그를 살펴볼 뿐이었습니다.
그도 그저 어둑하게 조용히 웃어주면서 저를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안부를 묻는 제게 그가 말하기를, 겨울에 강집되어서 곧바로 육군 제2훈련소에 수용되었고
신병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아 생활하던 중에 일병 첫 휴가를 받아 이렇게 나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난 세월에 그가 겪었을 무수한 절망과 고통에 대해 끝내 뭐라 해줄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찍 입대한 것이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면서 담배 한 개비를 건네고 불을 붙여 주었습니다.

함께 풀밭 스탠드에 앉아 얘기하던 중에 드디어 스크럼의 선두가 대운동장으로 진입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학생회관 앞에서 출발했을 때는 천명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는데 캠퍼스를 한바퀴 돌면서 숫자가 많이 불어나서
거의 팔천명을 넘는 정도였고 스크럼 길이가 수백 미터에 달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학교 정문 쪽에는 이미 전투 경찰이 십여 대의 차량으로 교문을 봉쇄하고 있었고
담장 너머 멀리 북쪽 삼거리에는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송 차량 대열이 보였습니다.

그때 대운동장에서는 학도호국단에서 개최하는 무슨 대규모 쇼처럼 보이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는데
본교 출신 유명 방송인이 진행하고 있었고 수천 명의 타교생들도 함께 커플을 이루어 참여하는 행사였습니다.
참가 인원은 언뜻 추산하기에 적어도 육, 칠천 명은 넘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대운동장으로 진입하던 시위 대열의 선두에서 행사장 쪽으로 돌이 날아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투석이 무슨 신호인지 알고 있던 제가 함께 있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군복을 입고 있으니 여기 있으면 곤란하니까 지금 당장 대학 본관 옆 언덕 쪽으로 올라가 있다가
나중에 시위가 끝나면 학생회관 앞에서 다시 만나든가,
혹시 상황이 격렬해져서 그것도 곤란해지면 우선 빨리 학교 밖으로 피한 다음
이따 밤늦게 다시 들어와서 학생회관 5층으로 올라와라,
오늘 거기서 철야농성할 것이니 친구들이 전부 거기 모일 예정이라"면서 그를 재촉했습니다.

그가 운동장 스탠드 상단을 돌아 대학 본관쪽 출구로 나가는 걸 확인하고  
저는 시위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서둘러 스탠드를 달려 내려갔습니다.
'쌍쌍파티' 행사장으로 우박처럼 날아들던 돌 때문에 그곳은 목불인견의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수많은 커플들이 행사장을 벗어나려고 아우성치면서 울부짓는 소리가 운동장 곳곳에 가득했습니다.
순식간에 운동장 북쪽 스탠드 중단에 있는 무대는 물론 행사장 전체가 텅 비어 버렸고
그들이 필사적으로 빠져나간 행사장에는 수많은 핸드백, 손수건, 하이힐이 주인을 잃고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행사가 중단되던 순간부터 거의 동시에 시위 준비를 하는 인원들이 대형을 편성해서
정문쪽으로 방향을 바꿔 돌과 화염병을 일제히 던져대기 시작했습니다.
정문 좌우로 백여 미터에 걸쳐 전개해 있던 전투경찰도 일제히  대운동장 쪽으로 최루탄을 소나기처럼 쏘아대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세 시 무렵, 드디어 본격적으로, '80년 서울의 봄 이래 처음으로 진지전 형태의 시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최루탄 가루를 흠뻑 뒤집어쓴 채 투석에 몰두하던 제가 운동장 남쪽에 있던 수돗가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스탠드 하단에서 손수건을 뒤집어 쓰고 헐떡거리던 철학과의 '현대승'이가 다가와 담배 하나 달라면서 문득 말하기를,
"휴가 나온 정태현이 만날 때 조심해라! 원래 휴가도 아닌 놈이 두 달이나 당겨서 지금 나온 이유가 뭔지 아냐?
군에서 녹화사업 받으면서 프락치로 학교에 찾아온 거야. 가급적이면 만나지 않는 게 피차 좋을 거야"

그 말을 듣던 제가 난감해 하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하기를,
"그걸 누가 모르나, 이사람아! 그래도 친구라고 찾아왔는데 너 같으면 안면 몰수할 수 있겠냐?" 했더니
그가 이어 말하기를, "나라도 그건 어렵지. 그래서 나는 멀리서 그를 보자마자 지금 열심히 피해다니고 있니라. 크크"
농담처럼 말을 나누면서도 그놈와 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한 기분에 잠겼더랬습니다.

그날 시위는 어둑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비록 하루였지만 학내에서 경찰 병력을 완전히 몰아낸 날이 되었습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시위도 마무리되었고
학생회관에는 칠팔 백명 정도의 인원이 모여 철야 농성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가 아직도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해서 동료들과 학생회관에 진입하면서도
주변의 언덕이나 화단, 숲속 쉼터 등을 쉼없이 훑어보았는데 너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가 기다리다 지쳐서 학교 밖으로 나갔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같은 과의 일반 동기생, 선배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저... 아직 휴가가 남았을 테니 다음날 다시 그가 학교에 나온다면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도 학교에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시위 현장에 군인 신분으로 있었기 때문에 혹시 모를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았는지,
그런 문제를 다 떠나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안부가 몹시 궁금하고 해서
학생회관 3층, 4층 서클 사무실을 모처럼 찾아 돌아다니며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습니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몇몇 남녀 동기들이 그를 본 적이 있었고 잠깐이나마 인사도 나누었지만
그날 저녁에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면부지의 불문과 학생들을 붙들고 '정태현이 봤느냐'고 묻기도 어렵고 해서
결국 그의 행방에 대한 수소문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그가 남은 휴가 기간 동안이라도 다시 학교에 나타나기만 기다려볼 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도 더 지났을 무렵까지 저는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 속으로 애타게 기대했지만
휴가가 끝났으리라 짐작되는 날까지 끝내 그는 학교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학교에 기관의 정보원이 되어 나타났든, 그냥 평범한 휴가를 나온 것이든,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도 그를 대하는 수많은 옛동료들의 반응과 태도를 보고
그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큰 마음의 상처와 좌절감, 소외감을 받았으리라는 암울한 짐작만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 낫지 않는 상처처럼 살아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다음해 가을에 저는 드디어 학교를 떠났습니다.
근 일 년을 떠돌다가 군에 갔고 '88년 2월 초순에 30개월이 약간 넘는 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했습니다.

1988년 여름에, 다른 일 때문에 누굴 만나러 옛날에 다니던 학교 앞에 잠깐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막 레스토랑에 들어서던 '83학번 후배 두 놈을 실로 사 년여만에 우연히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놈은 '84년 늦가을의 민정당사 점거 농성 투쟁 때 잡혀갔었고
또 한 놈은 '85년 봄에 미문화원 점거 투쟁 때 역시 학교에서 쫓겨났는데
마침 둘이서 '88년 여름에 함께 복학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둘 중 경영학과에 다니던 빗자루처럼 생긴 놈이 대뜸 저더러 "형도 이번에 복학하는구나!"하면서 반가워하길래,
제가 말하기를, "나는 복학 안한다. 복학해서 졸업하면 뭐 할 건데? 게다가 돈도 없고..."
그들이 제비새끼들처럼 이구동성으로, "형! 돈은 필요없어요. 보증인 둘만 세워서 민주화운동 종사자로 인정받으면
남은 학기 동안 학비는 내지 않는 걸로 학교측과 협상해서 결론을 봤어요!"라고 하길래,
제가 다시, "그래도 복학 안 할란다! 나는 고졸이면 충분하다니까! "라고 말하면서 뒤이어 덧붙이기를,
"그나저나 혹시... 옛날 너희 서클 선배였던 정태현이를 학교에서 본 적 없냐?
니들이 신입생일 때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래도 다른 선배로부터 얘기를 들었거나
나중에라도 그가 직접 서클 사무실에 찾아왔을지도 모르는데, 혹시 만난 적은 없더냐? "

둘 중 경제학과에 다니는 놈이 말하기를,
"그 선배 알지요. 제가 직접 안면은 없지만 지훈 선배가 친했기 때문에 얘기는 가끔 들었어요.
전역하고 '85년도 하반기에 복학했다고 들었는데 아마 이번 여름에 졸업했을걸요~ "
다른 놈도 말하기를, "저는 '84년 하반기부터, 이놈은'85년 상반기부터 학교에 없었기 때문에
그 선배의 자세한 소식은 몰라요. 후배들 말로는 그형이 복학했을 때 서클 사무실에 들른 적이 있긴 한데
그때는 이미 동기나 선배들이 거의 다 학교를 나갔을 때라서...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

그들 얘기를 통해서, 그가 결국 무사히 전역했고 복학했으며 학업을 마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무렵엔 제가 굉장히 바쁘게 살았던데다 살던 곳이 서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수소문해서 다시 한 번 만나볼까하는 마음을 끝내 실천으로 옮겨보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저 세월만 도도하고 무심하게 흘러갔을 뿐이라...

불문과 '정태현'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1983년 5월이었으니 벌써 삽십 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 옛날, 청순하고 운치 있던 서울 청년은 세 번이나 변한 강산에도 여전히 그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을지.

이제 남겨진 시간보다 밟고 지나온 세월이 훨씬 길어져서 문득 문득 뒤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그 옛날 빛나던 청년 시절의 한 모퉁이에서 언제나 그가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 본래 이 글은 제가 몇 년전부터 일 년에 한두 꼭지씩 써서 올려놓곤 했던
 옛 친구들에 관한 간략한 회고담 중에서 일곱 번째 쯤에 써볼까했던 이야기였는데
 오늘 점심 때 유투브에서 한가하게 노래를 찾아 들으면서 놀다가
 갑자기 Taunta & Nantucket Sleighride 이 노래가 생각나서 듣던 중에
 모처럼 의욕이 생겨 예전에 하던 그 시리즈를 다시 이어보게 되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홍똘 님께서 혹시라도 이 글을 읽어보신다면 필히 댓글을 달아 주시라요!
만약에 보고도 그냥 지나간다면, 당장 비행기 타고 제주도에 쳐들어갈 거외다~
그런데 올해도 선거 때문에 바빠서 당분간 여기 못 오시는 건 아닌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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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32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3 15:15

  정오부터 두 시간이나 걸려서 썼는데 사람들이 댓글을 안 달아주네...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3 15:16

  너무 길어!
읽기가 피곤하다니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3 15:17

  찬찬히 다시 읽어보면서 교정을 한 번 정도는 봐줘야 하는데
나도 지금 같아선 다시 읽어보기 귀찮다네~
누구 교정좀 봐줄 분 안 계십니까? 크흐흐~~

ohnglim님의 댓글

  끝발 아니고 끗발입니다. 이런거요? ㅋㅋ

넘 길어요~ 밤에 시간이 허락하면 다시 올게요..ㅎㅎ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3 16:00

  아싸!  '끗발' 하나 잡았고~~
감사합니다!

아범님의 댓글

  이럴땔 대비해서 속독 훈련을 했었어야…. -,.-"


시간이 허락하면 다시 올게요…ㅎㅎ x2

允齊님의 댓글

  너무 오랜만에 에세이를 한편 읽었습니다
겪동의 시기에 추억과 어우러진 글이 고즈넉하게 느껴지기도 하구 쎈자님의 그 총명한 기억력에 또다시 감탄을 하며 잘 읽었습니다

저의 기억속에서 이렇게 장문의 글을 써내려갈 친구가 있던가하는 생각이듭니다

제갈짱님의 댓글

  진짜 길군요...
시간이 허락하면 다시 올게요…ㅋㅋx3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3 20:06

  저녁 여덟시입니다.
10분에 걸쳐 올려놓은 글의 간단한 교열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거... 다시 온다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 거여~ ㅋㅋ
길고 지루한 내용인데도 끝까지 읽어주신 允齊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범님의 댓글

  금일중엔 꼭 읽어봐얄텐데.....  ;;

홍똘님의 댓글

  쎈자님, 아련한 옛날을 떠올리며 읽어봤습니다. 근데 기억을 묵직하게 길어올리질 못하겠어요.
저는 천생 책상물림이어서 저 때도 후배들 앉혀놓고 강의(?)만 하다 세월보냈습니다. 책 몇 권 더 읽었다고 폼 좀 잡았던 모양입니다. ㅋㅋ.
요즘은 선거 때문에 잠시 바쁩니다. 지지율이 형편없는 정당의 당원이지만, 하던 일 하랴, 선거 일 하랴 신경쓸게 많아 정신이 사나워졌어요.
댓글을 달지 말았어야 쎈자님이 뱅기 타보는건데, 좋은 기회 뺐습니다. 흐흐.

ohnglim님의 댓글

  어제 늦은 시간에 다시 와서 찬찬히 읽어봤네요.
긴 글에 짧은 소감을 말하자면... 짠해요~
뭔가 아련하니..

초등학교 시절 한 친구 생각이 나네요.
그 친구는 태어났을 때 중병을 앓아서 병원에서도 포기했다는데
그 친구 엄마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면서 어디선가 독한 약을 구해다 먹였는데
살아나기는 했으나 입술 주위가 오그라들고 목소리가 변할 정도로 독한 약이었는지
말할 때는 항상 쉰소리가 나고 아무리 큰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소리가 나지 않던 친구였어요.
우리집은 그때 학교 근처 단칸방에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아침마다 그 친구가 제 집 앞에 와서 같이 학교가자고 부르곤 했더랬어요.
그때마다 주인 아줌마가 목소리도 이상한 애가 아침부터 재수없게 와서 떠든다고 어찌나 구박을 하던지..
그 다음부터는 제가 그 친구 집으로 가서 같이 학교에 가곤 했더랬지요.
그러다가 어느해 방학을 지나고 학교에 가보니 그 친구가 없는 거에요.
집안이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모양인데 오빠를 군대 보내지 않겠다고 외국으로 이민을 가버린 거였지요.
그때만 해도 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면 소식을 전해듣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몇 해가 지나 그 종교단체에 있는 다른 친구에게 부탁에 부탁을 해서
힘들게 연락처를 받아냈더랬습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을 때니까 정말 오랜만이었지요.
마침 그 친구가 국내로 들어올 일이 있다 해서 약속을 잡아 꼭 한번 만났는데
외국물을 먹어서인지 세련되기가 저랑은 많은 차이가 있더라구요.ㅋ
도시아그와 촌년이 만난 것처럼 처음에는 서먹하다가
청진동 생맥주집에서 훈제족발에 부추김치를 먹으며 한잔 하고..
종각일대를 쏘다니며 옛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덧 서먹함도 모두 사라지고
예전에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듯한 기분도 들었더랬습니다.

흐~ 그 친구와도 그 만남이 마지막이었는데..
지금도 어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한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네요.

그 친구 집은 드물게 집에 바나나 나무에 커다란 피아노까지 있던 집이었는데..ㅎㅎ

아.. 아침부터 말이 길어졌습니다.
일하러 가야쥐~ ㅋ

네모돌이님의 댓글

  공지영씨의 소설을 한편읽은듯....

dEepBLue님의 댓글

  두시간짜리 글 치고는 느므 길어요~ ^^

저는 틈나는대로 읽겠사옵니다~ ^^

고은철님의 댓글

  어제부터 읽어봐야지... 봐야지 하다가...이제서야 읽었습니다.
그 때 그 시절의 이야기..어렵고 힘들었던 그런 시절이었지만
다시금 20대로 돌아가라면...두 말 않고 가고 싶습니다...

음악도 잘 듣고 있습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4 13:27

  재미없는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을 올려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4 13:29

  역시 홍똘님은 이렇게 억지로라도 청해야 겨우 인사를 나눌 수 있다니... ㅋ
이제 몇 주 동안 굉장히 바쁘실텐데 부디 건투하시라요~
저는 그 정당보다 더 지지율이 낮은 정당 후보에게 투표할 예정입니다~ 흐흐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4 13:43

  ohnglim님 댓글을 읽어보다 생각난 옛날 얘기 한 토막을 풀어봅니다.

유신 말기부터 '80년 무렵까지 잠깐이긴 하지만,
초등학교 동창회 같은 행사를 금지한다는 교육 당국의 조치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없었다지만
실제로는 학교 당국에서 그런 류의 행사나 모임조차 통제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지방에서는 초등학교 동창회를 대개 고2때 치르는 관행이 있었는데
당시 시절이 하도 수상해서 어느 학교 출신할 것 없이 동창회를 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여름 방학 직전에, 초딩 시절에 우리 학교 부회장이었던 여자애가 갑자기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국민학교 때 저랑 1학년부터 5학년까지 한 반이었습니다.
원래 4학년부터는 남녀 별로 분반을 하는데 그때 남학생 45명, 여학생 20명 가량이 남아서
할 수 없이 예외적으로 남녀 합반을 했던 곳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게 우리 반이었습니다.
4학년때 함께 공부한 여학생 스무 명 중에 그녀도 있었습니다.

또 그 다음해부터는 고학년(4~6학년)을 성별로 나누어 분반하는 제도가 없어지고
오직 6학년만 남녀 별로 나누는 편성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때문에 성적별로 학생을 뒤섞어 새로 만든 5학년 때도 그녀는 저랑 같은 반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그녀는 저랑 보통 인연은 아닌 셈이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려 5년을 같은 반이었어도 서로 말을 섞은 적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
입학 직후인 1학년 1학기에는 반장을 뽑지 않았지만
(국문도 못 뚫은 놈이 수두룩해서 기표 행위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함.
심지어 반장이 뭔지도 모르는 놈이 꽤 있었음. 특히 우리 옆집 사는 놈!)
1학년 2학기부터는 선거로 반장을 뽑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5년을 제가 줄창 반장 노릇 하는 동안 그녀도 계속 함꼐 부반장으로 뽑혔다는 사실!

제가 반장으로 뽑힌 이유는 힘이 세고 성격이 포악해서 안 뽑으면 맞을 것 같아서 그랬다지만,
그녀가 부반장으로 뽑힌 이유는, 아버지가 시청의 고위 공직자이며 집안이 매우 부유했다는 점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또래 여자아이들 중에서 압도적인 비쥬얼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
나중에 6학년에 올라가 자기반 반장으로 출마한 전교 부회장 선거에 당선된 것도 다 비쥬얼 때문이라는 사실! ㅋㅋ
(한편, 저는 6학년때도 반장이었지만 회장 선거에는 출마하지도 못했습니다. 가난해서... 크흐흐~)

한 반에서 오년을 함께 지냈음에도,
반장과 부반장으로 4년 반을 함께 했음에도,
결코 서로 말을 붙여보지 않았다는 놀랍지도 않은 사실!

서로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제게 있었습니다.
"차라리 혀를 물고 죽을 지언정 쪽팔리게 여자 사람이랑 말트고 지내는 짓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는
당시 시골 어린이들의 '시대 정신'에 매우 투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피차 어색한 사이로 초등학교를 마치고 진학하면서 각기 남중, 여중으로 흩어졌는데,
또 그 뒤로 고교에 진학하면서 피차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을 오 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인데, 
난 데 없이 그녀가 저를 수소문해서 찾아왔더란 말입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를,
"여름 방학에 동창회를 했으면 좋겠어요~"(갑자기 어색한 존댓말)
제가 퉁명스럽게, "요즘 동창회 못 하게 한다던데?"
그녀가, "우리 동창 '장선희' 알죠? 백혈병에 걸렸어요!"
뒤이어 말하는데, "죽기 전에 어릴 적 친구들을 꼭좀 보고 싶대요.
"그래서 학교(모교)에 찾아가서 부장 선생께 어렵게 강당 사용 허락을 얻었어요.
시내 각 여고에는 벌써 협의가 끝났고요, 남학교 쪽만 협조하면 가능할 것 같네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런 문제라면, 회장이었던 '방대기'를 찾아가야지,
나를 찾아온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거 같은데?"
그녀가 씁쓸해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동창회 여는 것에 반대한대요. 협조할 뜻도 없다네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댁을 찾았어요. 꼭좀 도와주세요. "
(원래 방대기와 그녀는 중학교 시절에 사귄다는 소문이 있었음 ㅋ)

피차 친하고 편한 사이도 아닌데 간절하게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거절한다는 말을 꺼내기가 어렵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얼떨결에(미모에 현혹된 것이 절대 아님!),
"다른 남학교에 연통을 해서 대표자를 선정하고 이번 주 일요일에 모교로 모이라고 할 테니
너도 여학교 대표들에게 연락해서 모교에서 만나 실무적인 얘기를 해보자 "

그주 일요일 점심 무렵, 설렁거리며 오랜만에 옛날 국민학교에 가보았더니,
십여 명 정도의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벌써 모여 있었습니다.
(휴일에도 왜 교복을 입고 다녔느냐고 물으신다면,
그때는 원래 누구나 다 교복 또는 체육복을 입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ㅋ)

그날 회합 자리에는 6학년 때 제 담임 선생도 나와 있었는데 여전히 그 학교에서 근무 중이었습니다
(그 선생은 제 담임이었을 때도 5년째 근무 중이었는데
어째서 공립학교 교원이 그때까지도 전근을 안 갔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동창회 개최 일시와 장소를 합의하고 연락 책임을 분담하고 회합이 마무리 되었는데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동창들에게 연락하는 것이 몹시 곤란해지기 때문에
서둘러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동기놈들에게 동창회 개최 사실을 통보하느라
일주일 내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저녁 무렵에 갑자기 그녀가 또 찾아왔습니다.
몹시 어두운 얼굴이었습니다.
"동창회 개최 소식을 들은 모교 교장 선생님이 최종적으로 장소 사용을 할 수 없다고 했다네요."
"지금 막 권종택 선생(6학년때 제 담임)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그러면서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속으로는 옳거니! 하면서도 저는 그녀에게 간단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으로
초등학교 동창회 관련 업무에서 해방되는 순간을 조용히 자축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초등학교 동창회는 끝내 열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몇 년 흐르고, 대학 2학년 6월 말쯤이었습니다.
서울서 대학에 다니다가 여름 방학을 맞아 귀향하려고 고속버스 터미널에 갔는데
그날따라 열 명도 넘는 고향 동기들이 같은 버스에 우연히 함께 앉아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서울에서 각기 다니는 학교는 달랐지만
피차 뻔한 생활이라서 귀향도 같은 날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연 같지만 사실 저런 일이 매년 반기마다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함께 버스에 타게 된  몇 명의 여학생도 있었는데
그중 한 여자애가 맨 뒷쪽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저에게 다가와 반가운 인사를 건넸습니다.
저는 '도대체 누군데 이토록 이쁜 여자가!'하면서 그녀를 자세히 살폈습니다.
다름아닌 '부회장' 그녀였습니다.
그녀는 서울교대에 진학했는데 그동안 한 번도 만나거나 소식을 들은 적도 없던 터라,
게다가 고삐리 시절에 비하자면 거의 탈태환골한 수준으로 용모가 화려해져서
언뜻 보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달라져 있었습니다.

한데, 그녀를 보자마자 제가 불쑥 던진 말 한 마디!
"장선희는 죽었냐?"
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내 말뜻을 금새 알아듣고 베시시 웃으며 하는 말이,
"아니. 지금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그 말을 듣자 제가 껄껄거리며 말하기를, "옛날에 뻥쳤구나!"
그녀가 당황하면서 길게 설명을 이어붙이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병세가 악화되지는 않은 채 그냥 저냥 일상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대학에도 갔고...

(심상치 않은 뒷 얘기도 더 있지만 너무 길어서 이만 생략합니다~)

아범님의 댓글

  이제 다 읽었습니다.
한참을 벼르다 읽으니 그 읽는 맛이 더 쏠쏠하지 싶습니다. ㅎ

음…  다 읽고 문득 생각이 드는건
알고지냈던 누군가가 언제고 또 어딘가에서 나를 추억하고 있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척 기쁘고 설레고 에 또.. 감사한 마음까지 들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쎈자님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차분차분 끄집어내어
등장인물들과의 추억을 자주 그리시는것 같습니다. ㅎ
예전에 올리신 '후무한 사나이 고재용'이나 '큰 사나이 황기호'… 를 봐도 그렇고
그리운 사람이 많으신게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거 놀랍습니다.
장문의 글을 읽고 난 후, 이제 '사나이' 시리즈보다는 '그녀'시리즈나 뭐 그런 종류의 스토리를
들려달라고 청하려는 댓글을 올리려 폼을 잡았는데 이렇게 또 한편의 글을 올리시다뉘~ ㅋ

시리즈가 변경되면 댓글이 더 불어나리라 확신합네다!!

允齊님의 댓글

  댓글중 여친글이 나와서 열심히 읽는데 내용이 뚝 끊겼어요

(심상치 않은 뒷 얘기도 더 있지만 너무 길어서 이만 생략합니다~)

심상치 않은 뒷 이야기도 궁금해져요...."옛날에 뻥쳤구나!"  그 뒤로 무슨 말씀을 나눴는지 대화의 내용보다 헤어질때 그냥 바이하고 헤어지셨는지 급궁금해요...

그 여인에게 쎈자님이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4 17:10

  允齊님!
저건 철면객씨가 한 얘기라서 제가 첫사랑이다, 아니다 얘기할 처지는 아닙니다만,
저 물건을 잘 알고 있기에 대신해서 잠깐 말씀드리자면,
글에서도 중간에 괄호 속에 밝혀놓았듯이 그녀는 일찌기 '방대기'랑 사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십대 중반이었지만 그래도 꽤 오래(한 삼년) 사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중고교 시절)에는 소문만 무성했지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저때 버스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철면객이 직접 물어 확인해 보았답니다.
"예전에 중학교 다니면서 방대기랑 사귀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냐?" 이렇게 말입니다.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는 철면객도 정말 덜 떨어진 놈이긴 하네요.)

하여튼, 철면객에게 전해 듣기로는, 사귀긴 했지만 금방 멀어졌다더군요.
또 철면객이 이르기를, 그날 버스에서 다른 사람과 자리를 바꾸어 그녀와 함께 앉아
두 시간을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도착하자마자 바로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는 만난 적이 없답니다.
그러고보면, 철면객 저 인간도 참으로 청백하고 순결한 놈이어요~~

참고로, '방대기'는 철면객이 일곱 살 무렵, 도시로 이사나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입니다.
일곱살 때, 철면객이 집안 전체가 독실한 신자인 방대기를 따라 천주교회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아주 늙은 외국인 신부님과 인자하기 이를 데 없는 코쟁이 수녀님들이 계신 교회였습니다.
방대기에게 이끌려 교회 유년부에 갔더니 거기 이쁜 누나 선생님이 '주기도문'을 들려주며
이걸 다 외우면 카스테라 두 덩이를 준다고 해서 금방 외워서 들려주었더니 실제로는 한 덩이만 주길래,
그길로 교회에 발을 끊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방대기는 훗날, 다른 대도시로 고교 진학을 했는데
나중에 재수 끝에 공과대학이 일류라는 서울 모대학을 졸업하고
벤처 열풍이 한창일 무렵, IT 관련 회사를 설립해서 꽤 유명해졌답니다.

벤처 관련 무슨 단체의 장 노릇도 하면서 TV에 나와 인터뷰하는 걸 저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얼마 뒤에, 친인척, 친구, 동창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투자를 이끌어내서
회사 규모를 한껏 키운 것처럼 보였다가 한순간 주식을 팔아치우고 미국으로 날랐습니다.

그때 방대기를 믿고 투자해서 손해를 많이 봤다는 철면객의 또다른 친구가 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공모자들에게 나눠준 걸 제하더라도, 160억 정도는 해먹고 튀었다는 얘기를 들었답니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는 일이라는 얘기도 들었으니,
철면객의 죽마고우 '방대기'는 돈 무지하게 많이 쌓아놓고 미국에서 잘 살고 있을 겁니다~~ 으하하~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4 19:55

  모처럼 펼쳐 보이는 允齊님의 상상의 나래에 재를 뿌리는 댓글이로다~
하지만 ssenja씨의 설명은 100%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거.

그런데 댓글에서 말씀해주신 아범님의 생산적인 제안을 검토해볼 의향은 없소?
'멋진 사나이'보다는 '이쁜 그녀들'이 영업이 확실히 잘 되긴 할 거 같은데...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4 19:59

  내 인생에 '멋진 사나이'는 많이 만났지만, '이쁜 그녀들'은 거의 만나보질 못해서...
구라 만땅의 소설을 쓰지 않는 이상에는 불가능한 영업 전략이라네~

그쪽으로는 아무래도 아범님이 소스가 많을 거 같긴 한데...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4 20:00

  아범님께서 범상치 않은 경력을 숨기고 있다는 당신의 판단에 강력하게 동의하오!

아범님의 댓글

  청춘시절을 되짚어보면 소스가 될만한게 전혀 없습니다.
그저 영양가 없는 숫컷들과 술퍼먹고 허송세월 보낸것밖에는…. ㅡㅜ

에 또 그런 세월을 보내고 있던 망나니를 걷어준 지금의 마누라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


아….
강력한 소스가 딱 하나 있기는 한데.. ㅋ

대리영업 할 기회가 온다면 한 번 풀어보겠사옵니다. ㅋ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4 22:54

  대리영업 그거 기다릴 필요 없이 당장 가게 하나 내보자구요~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4 22:58

  그런데 말입니다.
가만 보면, 한결같은 게 하나 있습니다.
사적인 공간뿐 아니라 심지어 공개된 공간에서조차
어떤 식으로든 옛날에 이성 친구를 사귀었던 경험을 생각 없이 드러내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전부가 남성들이더란 말입니다.
여성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도무지 본 적이 없는 것 같더라구요~

사실 저도 워낙 그쪽으로 경험이 빈약하다보니 얘기를 못 하는 것일 뿐이지,
만약에 두어 번 정도라도 묵직한 연애 경험이 있었더라면, 아마 별 저항감 없이, 또 조심성 없이,
그런 얘기를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각색해서 함부로 떠들고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한심한 동물들이지요. 크흐흐~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4 23:05

  누가 한심하다고?
내가?
아니면, 여성들이? ㅋ

아범님의 댓글

  여기 한심한 동물..  이제 퇴장합네다~ ㅋ

내일이 벌써 목요일이군요.
다음주에 마무리돼야 하는것들이 네 놈이나 있습니다.
이거 주말 근무를 해도 턱없이 부족하지 싶습네다. ㅜㅜ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5 10:35

  늦도록 야근하셨군요~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라 다음주까지 무려 네 건이나!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2.03.15 10:36

  사장은 직원을 더 뽑으라!

아범님의 댓글

  제가 나가야 뽑을겝니다.  아마도....


늙어죽을때까지 붙어있을테다! 간헐적으로다 사고도 빵빵 터트리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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