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가득한 아침. '이런 날은 반드시 맑다',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군대에서 나이든 하사관에게 배웠다. 그도 누군가에게 배운 지혜일 것이다. 그러니 '군 생활 힘들다고 인생 포기 하지 말라'는 의미다. 어떤 책에서 얻은 지혜도, 평생을 통해 이처럼 자주 되새기는 교훈은 없었다.

어쩌면 이 교훈이 진실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 교훈은 반드시 진실이어야만 했다. 지구에 매달리기는, 그처럼 절박했고 안타까웠다. 시간을 돌아보면, 어깨를 다독이며 소주라도 한 잔 권하고 싶은 철없는 젊은이가 있다. 막 되먹고, 지혜롭지 못하고, 경박한 청년. 뭘 모르는지 자체를 모르는 가여운 그가 나였다. 거울 속의 나는 이제 흰머리가 성성하다.

어제 말을 잘 듣지 않았던 말 한 마리를 묶어 운동장으로 나선다. 말은 영리하다. 자신이 왜 이른 아침 안개 속에 운동장으로 나가는지 알고 있다. 나의 작은 손동작에도 깜짝 깜짝 놀라며 긴장한다. 스스로 반항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내 반응이 두렵고 궁금한 것이다. 착하게 말 잘 듣는 말은, 아예 내 동작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동물적 감각이 말과 나의 유대감이며 적대감이다.

나는 말에 오른다. 천천히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며, 말에게 '오늘 네가 넘을 장애물이 이거다'라고 각인시킨다. 나는 적어도 말에게 시간과 여유를 주었다. 나는 운명만큼 잔인하지 않다. 평보를 마치고 속보를 보낸다. 시속 16km의 속도로 말은 첫 번째 장애물에 접근한다. 나는 투 포인트 자세로 말의 중심에 서서 약간 허리를 굽힌다. 말이 장애물 넘기에 부담이 없도록.

시선은 늘 넘을 장애물에서 떼지 말아야 한다. 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이 찰나를 틈 타 장애물 좌우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추진을 주고 말이 장애물까지의 보폭을 스스로 맞추도록 기다린다. 17m의 거리. 절대로 먼저 일어서거나 말을 밀어서는 안 된다. 기다려야 한다. 이 짧은 순간을 기승자는 아주 천천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40대에 들어서자 나는 숲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숲에 있다. 하지만 그 잉여의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지구상에 존재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에너지는 너무 빨리 타버렸고, 대개는 쓸데없는 곳에 소모되었다. 어쩌면 다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불나방 같은 삶이 되지 않은 것은, 오직 유배의 공(功)이다.

그러나 현재의 내 삶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내 삶에 대한 도시 사람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숲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진실이다. 내가 유배되지 않았다면, 나 역시, 나 같은 사람에 대해 지금의 도시 사람들과 같은 태도를 지녔을 것이다. 있어 보이면 그토록 친절한 미소를 보이다가, 없어 보이면 바로 무시한다.

어째서 일까? 부자가 제돈 막 나눠줄 일은 없다. 그런데도 삶이 아닌 소유에 끌려 어리석은 충성을 한다. 제 코로 숨쉬고, 제 손으로 땀 흘려 벌어야 한다. 그게 진짜 돈이고, 그게 진짜 인생이다. 가진 것이 아니라, 진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배워야 한다. 이윽고 말은 앞발을 들고 장애물을 뛰어 넘고, 세상은 갑자기 느려진다.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어쩌면 해뜨기 직전의 시간은, 앞으로 많이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천천히 내 땀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하면서 기다리자. 가야할 곳을 똑 바로 응시하고, 상체를 조금 숙여 늘 겸손함을 지닌 채 나태와 태만으로 일상의 끈을 놓지 않고, 마침내 세상의 장벽을 넘어 비상하는 순간까지, 한 결 같이 기다리자.

그러고 보니 삶의 장애를 넘는 방식도, 승마의 장애물 점프의 방식과 흡사하네. 지나친 아전인수인가? 나는 오른 손으로 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 목을 쓰다듬는다. "잘했어!" 오늘 이 말은 칭찬 받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