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마크
  • 추가메뉴
어디로 앱에서 쉽고 간편하게!
애플 중고 거래 전문 플랫폼
오늘 하루 보지 않기
KMUG 케이머그

자유게시판

사랑후의 여인들

본문

사랑후의 여인들

아직 새벽이 스며들지 않은 거실. 나는 부드러운 감촉의 나무 계단을 내려와 차가운 돌바닥 위에 선다. 밤의 차가움이 천천히 발바닥으로 스며온다. 냉기가 종아리쯤 기어 올라올 때, 나는 왼손으로 거실의 작은 실내등을 켠다. 탁! 소리와 함께 닌자의 칼자국처럼 어둠이 단숨에 잘려 나간다. 그리고 스위치를 켜기 전엔 절대로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커튼을 열고 베란다 밖의 어둠, 불안, 추위, 폭력과 야만의 세계를 훔쳐본다. 밤새 비가 왔나보다. 액체가 되어 흐르는 세계는 아주 약한 빛에도 번들거린다. 수은이나 크롬처럼 부드러운 표피 속에 숨긴 강하고 거친 야성. 빗속에 녹아버린 밤의 음모는 싸늘하다.

나는 커피를 끓인다. 커피가 끓고, 어울리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초록색 작은 잔에 옮기고, 나는 그 커피를 조금씩 나누어 입에 머금을 것이다. 마침내 커피가 내 몸 속으로 스며들면, 절대로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나도 존재하게 될 것이다. 빛에 의해 잘려나간 어둠처럼.

진공관앰프를 켜고 내 주위를 유령처럼 맴돌며 나를 깨워줄 CD를 찾는다. 손가락은 CD 케이스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날카로운 CD케이스의 감촉이 손가락으로 전해진다. 손가락이 멈춘 곳은 Good Time Blues. 이건 참 오랜만에 듣는 음악이다. Eric Clapton의 Double Trouble. 아마 새벽 공간에 흘려 넣기에 이보다 자극적인 음악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CD를 내게 소개해 준 사람을 떠올린다. 그리고 혜화동의 Uno레코드를 떠올린다. 어, 정말 죄송해요. 일단 제 CD듣고 계시면 제가 구해 드릴게요. 라며 자신의 CD를 불쑥 내밀던 레코드가게 사장. 그와 나눈 몇 번의 술자리도 떠오른다. 이런, 이런... 이런 메두사처럼 꼬리를 물고 번지는 잡념들, 나는 Play 버튼을 누르고 진공관 앰프 앞에서 돌아선다.

여전히 85%의 어둠 속에 머문 거실 소파에 가라앉는다. 나는 새벽 시간의 내게 필요한 것들을 손이 닿는 반경 안에 배치한다. 커피 잔, 노트북, 그리고 작은 담요. 작은 담요는 스스로 발열하지 못하지만, 내 온기를 담아 오히려 나를 데워준다. 마치 달이나 추억처럼.

무엇을 생각할까? 나는 생각할 것을 생각해 내기 위해 잠시 집중한다. 어둠 속의 내 이마는 조금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뭔가 기분 좋은 일. 내 삶에 조금의 온기와 빛을 나누어 줄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 한 알 같은 좋은 기억들을 필사적으로 찾아야 한다.

만약 고양이처럼 영리한 여인들이 말이야, 이상형을 만나야만 사랑하게 된다면 이미 인류는 멸망 했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지?
생각해봐. 너와 헤어진 여인들을 만났던 이유를.
음.
신은 여인들의 이상에 맞는 남자를 만나게 해주는 것보다는 일시적으로 여인을 바보로 만드는 방법을 택했지. 아무리 신이라도 여인의 꿈을 다 들어줄 수는 없었을 거야. 그건 전지전능의 범위를 훨씬 건너뛰는 일이지.
그래?
너를 만났던 여인들은 호르몬에 의한 일시적인 흥분과 착각으로 너를 사랑하게 되었고, 너와 잠자리를 하게 되었고, 때로는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지. 신이 장난을 시작할 때, 그녀들은 마침내 자신이 삶의 이유를 발견했다고 생각하지. 영원한 사랑, 절대로 놓치면 안 될 사랑을 잡은 거야. 그건 분명히 신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그녀들을 바보로 만든 탓이야. 아니라면 어떻게 너의 쓸모없는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이어줄 수 있었겠어? 시간이 흐른 뒤 여인들은 깨어나지. 내가 왜 그랬을까? Oh my God! 내가 왜 이 남자와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그리고 다시 꿈을 꾸지. 너와 함께 하는 삶을 꿈꾸었던 것처럼, 너로부터 탈출을 열망하게 되는 거야.
증명되지 않은 이론에 너무 열중하는 것은 아닌가?
무슨 소리. 그 증거는 바로 너라구. 여인들은 열심히 탈출을 기도하지. 그녀들이 보다 어렸던 시절 그 부모로부터 탈출을 꿈꾸었던 것처럼. 대개는 탈출에 성공해. 그리곤 결국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왜 원죄가 남자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해? 그건 남자들의 이기적인 생각이야.
여자의 원죄?
이게 바로 신의 저주야. 고양이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더 영리한 여자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간혹 말도 안 되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깨어나고, 후회하고, 결심하고, 다시 사랑에 빠지고. 
음.
사랑엔 유효기간이 있어. 그래서 사랑 후엔 두 종류의 여인들이 있지. 견디는 여자와 탈출하는 여자. 어쨌든 견딘다고 해서 사랑이 남은 것은 절대 아니지.
설마.
그래서 우리는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를 잘 음미해 보아야 해. 생각해봐. 하늘나라에 있는 최고의 궁궐에서 신선들만 상대하던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여자가, 정말 가진 것 하나 없는 나무꾼에게 옷이 없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 가능한지. 그 거짓말이 정말이라면, 그건 선녀들이 목욕하는 그날이 바로 신의 저주가 내린 날, 자신을 복제하고 싶은 젊은 육체의 욕망을 감당하기 힘든 날이었을 거야. 동화에 불과한 짧은 이야기에, 왜 3명의 아이를 낳기 전에 날개옷을 돌려주지 말라고 했는지? 그게 아이에 대한 모성에 관한 경고인지, 3명의 아이를 낳는 동안 흘러간 시간과 세월에 관한 이야긴지. 탈출을 결심하기에 적당한 또는 너무 늦은 기간에 대한 구체적인 예인지. 이건 동화라는 형식을 빌려 남자 아이들에게 하는 경고라고. 아주 구체적인 교육이지. 돌에 새기듯이.
그럼 여자가 바보가 되는 때가 아니면 사랑도 불가능하다?
그렇지. 그러니까, 한 여자를 30번 이상 계속 만나면 반드시 한 두쯤 기회가 생긴다고 하잖아. 그게 어리석은 남자들을 위한 신의 배려야. 다시 말하지만 이상적인 남자를 만드는 것보다, 여자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 아마 스무 배는 더 쉬웠겠지.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 당신을 유혹하고 있는 거라구요, 바보 같으니.
제가 그저 어린 동생으로만 보여요?
거기는 추워요. 이리 오세요.
호호호... 마지막으로 키스해 본 게 언제죠?
흠, 손 전화에 여자 전화번호가 3개. 나쁘지 않네요. 하지만 모두 지워요. 이제 당신은 내거야.
나 이런 건 처음인데... 이런 나라도 괜찮겠어요?
나 갖고 싶지 않아요? 당신 남자 아니야?
나 없을 때 다른 여자 만나는 것은 괜찮아. 하지만 내가 당신 앞에 있을 때 반드시 돌아봐야해 제자리로.
내가 이제부터 당신을 외롭지 않게 해줄게요. 영원히.

어때? 이 중 네 기억에 남은 대사는 어떤 거야? 더 확실하고 유혹적이었어? 어쨌든 거기서 거기였겠지.

술자리 도중, 여자 친구의 여자 친구를 택시에 태워 보내기 위해 걷던 골목길 끝. 더 이상 가려하지 않는 완강한 그녀를 침묵의 실랑이 끝에 골목길어귀 두고 돌아서던 일.

떠나요.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지구 반대편에라도 같이 사라져 버려요.
휴우, 갑자기 진땀이 난다. 지구 반대편에까지 가서 그녀가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면 어쩔 뻔 했니?

이런, 이런 또 생각이 제 멋대로 길길이 날뛰는군. 이런 건 결코좋은 기억이 아니다. 시간은 많지 않다. 나는 머지않아 문 밖의 어둠, 불안, 추위, 폭력과 야만의 세계로 나가야 한다. 나가서 힘찬 말들과 또 버거운 하루를 보내야 한다. 나는 자꾸만 미간을 좁히며 생각할 것을 떠올리려 애쓴다. 뭔가 좋은 것. 음모가 녹아버린 싸늘한 하루를 버티게 해줄 따스한 그것.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 한 알 같이 따스한 어떤 것.   


송화마을에서...

www.allbro.com
0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포인트 81,347
가입일 :
2004-02-26 08:43:02
서명 :
미입력
자기소개 :
미입력

최신글이 없습니다.

최신글이 없습니다.

댓글목록 4

삼덕님의 댓글

사랑후의 남자들도 그렇지 않나요? ㅋㅋ

김명기님의 댓글

그러지도 모르지요... ^~^

yjgreen님의 댓글

글서두의 느낌과 말미부분의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흰둥토깽님의 댓글

전체 50,528 건 - 9 페이지
제목
김명기 1,838 0 0 2009.12.23
조준호 1,837 0 0 2010.03.10
상한가 1,837 0 0 2015.10.31
김일환 1,835 0 0 2005.01.20
김명기 1,834 0 0 2008.01.11
향기 1,832 0 0 2015.09.22
김명기 1,828 0 0 2004.09.24
구운빵 1,825 0 0 2011.07.10
김명기 1,823 0 0 2005.02.24
Kyeymh 1,823 0 0 2014.09.01
최기영 1,823 0 0 2005.01.24
김명기 1,822 0 0 2004.08.02
루나 1,822 0 0 2016.05.11
김명기 1,820 0 0 2004.11.20
향기 1,819 0 0 2007.02.04
김명기 1,819 0 0 2004.09.10
해초초 1,819 0 0 2021.01.28
MacGeekPro 1,817 0 0 2007.10.01
MinJae 1,817 0 0 2007.11.15
EVA 1,815 0 0 2014.06.20
영환군 1,812 0 0 2004.06.14
박승규 1,811 0 0 2005.04.30
애플쥬스 1,810 0 0 2015.08.12
황석현 1,809 0 0 2015.04.16
duck3437 1,808 0 0 2013.05.10
dusk132 1,808 0 0 2016.06.02
열라면 1,805 0 0 2016.01.18
gyu1993 1,804 0 0 2015.10.21
향기 1,804 0 0 2015.06.12
김명기 1,803 0 0 2007.09.17
Vanessa 1,803 0 0 2008.07.03
김명기 1,803 0 0 2007.09.14
김명기 1,799 0 0 2004.04.26
김명기 1,799 0 0 2004.10.24
제리고고 1,798 0 0 2015.04.10
악동시니 1,797 0 0 2005.12.10
hongjuny 1,796 0 0 2007.10.12
아스 1,796 0 0 2009.10.12
새침한천년이 1,795 0 0 2009.11.16
김명기 1,795 0 0 2004.05.10
안호정 1,794 0 0 2015.08.31
skyscraper 1,793 0 0 2007.06.29
김두영 1,793 0 0 2016.12.19
EVA 1,793 0 0 2013.11.05
구운빵 1,793 0 0 2008.04.10
여백 1,793 0 0 2006.12.23
매가져 1,791 0 0 2015.03.25
향기 1,790 0 0 2010.08.31
향기 1,790 0 0 2010.02.13
영환군 1,789 0 0 2004.10.28
김명기 1,788 0 0 2004.03.30
영환군 1,788 0 0 2004.09.10
nara 1,788 0 0 2010.03.04
MacPlus 1,788 0 0 2010.01.23
향기 1,787 0 0 2009.01.15
동성... 1,787 0 0 2010.03.23
제과 1,786 0 0 2008.01.23
김명기 1,786 0 0 2009.01.28
레벨 hs1 1,785 0 0 2022.07.19
김명기 1,784 0 0 2007.11.05
누들리에 1,784 0 0 2008.11.05
베리 1,783 0 0 2006.03.17
레벨 귀여운anny2325 1,783 0 0 2019.07.17
NERV 1,781 0 0 2015.12.03
김명기 1,780 0 0 2011.05.10
향기 1,779 0 0 2009.10.22
김명기 1,776 0 0 2007.08.06
김한솔 1,776 0 0 2008.05.25
재미솔솔*신짱* 1,775 0 0 2004.12.14
향기 1,775 0 0 2007.10.08
1,773 1 0 2015.12.30
김명기 1,772 0 0 2007.12.12
여백 1,772 0 0 2006.08.03
EarlyAdopter☆ 1,772 0 0 2007.02.04
심재원 1,771 0 0 2009.11.12
김명기 1,770 0 0 2006.11.24
매입 1,769 0 0 2013.05.17
玄牛 1,769 0 0 2010.05.17
원똘 1,769 0 0 2005.01.26
엘프고야 1,766 0 0 2010.05.10
mac돌이 1,766 0 0 2010.07.07
김명기 1,765 0 0 2007.04.05
이승일 1,765 0 0 2010.10.15
영환군 1,765 0 0 2004.09.14
김명기 1,765 0 0 2009.05.21
한글사랑 1,765 0 0 2014.04.01
김명기 1,763 0 0 2009.11.11
레드닷 1,760 0 0 2021.02.25
김명기 1,760 0 0 2004.04.01
김명기 1,760 0 0 2007.08.17
향기 1,760 0 0 2015.08.11
소나무 1,759 0 0 2016.01.10
김명기 1,758 0 0 2004.05.17
김명기 1,758 1 0 2008.03.18
봉천곰부인 1,758 0 0 2017.08.28
김명기 1,757 0 0 2009.12.06
shkim 1,757 0 0 2004.12.16
김명기 1,756 0 0 2009.03.12
김명기 1,756 0 0 2004.07.05
김명기 1,756 0 0 2007.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