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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상류층에 관한 간단한 外傳-nara님 글에 붙여서

2009.09.01 15:50 3,279 23 0 0

본문

이 글은 원래 밑에 있는 nara님께서 열어놓으신 글타래에 답글로 씌어진 것입니다만,
그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할 수 없이 새로운 글로 올립니다.
글타래 밑에 ↳ (Re)..... 뭐 이렇게 올리는 것을 해보질 않아서... 낯설고...
결국 이렇게 새글로 올리게 되었지요.


'80년대 초반에 대학가의 '일반'(이 일반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ㅋ) 학생들에게
꽤 인기 있던 책 중에는  nara님께서 소개해 주신 Charles Wright Mills의 '파워 엘리트'와
Jeremy Rifkin의 '엔트로피'(entropy=무질서함의 정도) 및 Alvin Toffler의 '제3의 물결' 등이 있었지요.

당시 저도 그저... 대충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는 '원전'을 읽기도 바빴기 때문에
여러번 반복해서 읽어보고 그 내용을 통달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위에 nara님께서 설명해주신 그런 내용의 대강은 이해하고 지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뭐....아무튼 그건 그렇고.... 사실은 좀 다른 방향에서 일종의 가십성 글을 하나 올리고자 해서
이렇게 뒤늦게 답글 삼아 써올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nara님께서 열어주신 그 글타래의 핵심적인 취지와는
약간 다른 방향에서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해당 글타래에서 nara님께서 댓글로 정리, 요약해 올려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지배 엘리트 집단의 성격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을
한국적인 현실 속에서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로서 그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는 판단도 있고 해서
내친 김에 그냥 한 말씀 엮어서 올리고자 합니다.

쓰다보니 글이 워낙 길어져서,
또 내용이 그저그렇기 때문에, 바쁘신 분들은 이 부분에서 그치거나,
밑에 1.번의 글만 읽어보시고 그냥 넘어가시기를 권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파워 엘리트 집단이라면
나이로 보았을 때, 대략 1940년대 중반~196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가
아무래도 그 대부분을 점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 나이 대에 속한 세대 중에서, 우리 사회의 지배 집단으로 성장했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배출 경로라고 할 수 있는
1950년대~1970년대의 소위 '명문 고등학교'나 '명문 대학'에서의
신입생 선발의 개괄적인 양상에 대한 몇 가지 설명과 그 소회를 기술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항상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생각할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현재 우리 사회의 사회 경제적 상황에 근거한 가치관이나 사회 통념을 대입해서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기 어렵습니다만,
비교적 가까운 과거인 30~50년 전의 우리 사회를 돌이켜 생각할 때에도
이런 종류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기술한 이 당시의 상황이라는 것은
엄연히 현재의 한국 사회와는 상당히 다른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서의
사회 현상이라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1. 1940~1950년대의 명문 학교 진학 상황에 대하여

이 시기에 소위 '명문'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는 문제는
당시 우리 국민 일반의 이해 관계 속에서 보자면 전혀 관련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저 서울 4대문 안에 거주하는,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 이래 시종해서 터를 잡고 살아왔던
종로구 일대의 고위 관료층과 일부 부유층에게만 중요한 문제였지요.

그리고 일부 지방 대도시의 상류층 역시 이 문제에 관심과 열성을 보이긴 했습니다만,
그 계층에서조차 명문학교 진학을 위한 열망의 치열성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지금의 도시 서민층과도 비교하기 힘든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 일반 국민들처지에서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 국민 일반에게는 '고등교육'을 받는 문제라는 것은
아주 먼나라 이야기처럼 현실감 없는 문제였지요.
당시 한국은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나였으며,  중고등학교 진학은 커녕
국민학교조차 제대로 다니기 힘든 처지인 사람들이
국민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한국 사회에서 서민 대중이란,
요즘의 서민이나 도시 빈민층, 지방도시 및 농촌의 서민층과는
그 삶의 절박성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비교하기 어려운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그야말로 끼니를 거르지 않는 문제가
가장 절박한 해결과제였고, 어린 아이의 노동력조차 최대한 쥐어짜서
생활 전선에 내몰아야 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증등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그래도 도시 중산층을 훨씬 넘어서는 경제적 능력을 가져야 겨우 희망을 품어볼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40~50년대 후반)의 입시 전쟁은 주로 서울의 상류층과
지방 대도시의 대지주, 명망있는 유지, 지방 고위 관료층들만의
문제였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또 입시 전쟁이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정도의 경쟁 상태였다는 점도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시도 있었기 때문에
이 상류층 자녀들은 초등학교 3~4학년부터 가정교사를 동원해
사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그 목표는 단연 명문 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지요.

이 시기에 유명한 명문 중학교는 전국적인 명성을 누렸기 때문에
당시를 살아온 세대들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 같은 이름을 가진 고등학교와 함께 명문으로 이름을 날렸지요.
당시 학제가 5년제 중학교 제도에서 3+3의 중학교, 고등학교제도로 변화하기도 해서,
이런 현상(명문중=명문고)이 서울, 지방할 것 없이 비슷한 양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60~70년대의 명문 고등학교를 다룰 때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1940~50년대 우리나라에서 주요한 명문 중학교, 명문 고등학교 및
명문 대학교를 입했했던 사람들은 그 층이 아주 미약하게 형성되어 있던
매우 소수의 사회 상류층 자녀들이 별 경쟁 없이 아주 쉽게 받아먹던
일종의 정보 선점에 의한 기회 포착이라는 의미가 매우 컸다는 판단이지요.

당시 서울의 명문 중고등학교, 서울대학교에 입학생을 많이 냈던
4대문 안에 있던 전통있는 공립 국민학교를 알려드립니다.
사실상 이 시기에는 이 학교들의 인맥이랄까 학맥이 훗날 한국 사회의
지도층(주로 정계, 관료계, 법조계, 특히 교육계)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서울 4대문 안에 거주했던 상류층 자녀들이 주로 다녔던 명문 초등학교
- 재동 국민학교 (가회동, 공립, 1895 설립)
- 효제 국민학교 (효제동, 공립, 1895 설립)
- 교동 국민학교 (경운동, 공립, 1894 설립) ← 관립교동왕실학교, 관립한성사범학교소학교
- 매동 국민학교 (필운동, 공립, 1895 설립)

이 40~50년대에 서울 상류층의 자녀로서 명문학교에 다녔던 계층의 전형적인 인물로
한 사람을 소개하자면 바로 '이회창'입니다.
물론 부친의 임지가 바뀜에 따라서 초중등학교는 여러 곳을 전전합니다만,
또 중학교 입학은 청주 중학교로 하게 됩니다만,
결국 경기중학교 → 경기고등학교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코스는 동일하지요.
당시 서울의 재동, 효제등의 국민학교와 경기중, 경기고, 서울대학교는
대략 서로 간의 거리가 1~2km 내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동네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다녔던 것이지요.
결국 다른 동네 사람들은 잘 오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였던 셈이지요.

따라서, 이 당시에 명문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훗날, 그러니까 '60년대 중반 이후처럼 그 학업성적이 전국적인 기준에서
최상위권이었다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그저 관심있고, 돈 많았던, 또 그 진학의 댓가가 얼마나 달콤한지를
그들 조상으로부터 전수받은 소수의 우리 사회 최상류층 일부 자녀들의
아주 날로 먹는 혜택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시기에 서울대를 다녔다는 것은 훗날 그러니까 1960년대 중반 이후에
서울대를 다녔다는 것과는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 내부에서의 경쟁이야 뭐 있긴 했습니다만......

특히 이 시기에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구미에 유학한 후에,
다시 돌아와서 강단에 섰던 수많은 교수진들은 정말 실력이 형편없는 놈들이 많습니다.
다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상당수가 교수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지요.

이러한 연유로 해서, 이 글의 서두에서 제가 말씀드리기를,
'당시의 상황이라는 것은 엄연히 현재의 한국 사회와는 상당히 다른
경제적, 사회적 여건에서의 사회 현상이라는 점을 항상 주의...'라고 했던 것입니다.

속되게 과장해서 말씀드리자면,
1940~1950년대 후반에 서울대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뭐..... 집에 돈좀 있었네?..... 하는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거지요. ㅋㅋㅋ
더구나 당시에 연희대학교나 고려대학교에 다녔다는 것은 그거야 정말...... 별거 아닙니다.
이 세대의 그 학교 졸업생들은 훗날에... 그러니까... 진짜 명문이 된 시절에 그 학교를 다닌
다음 세대 후배들의 광채 덕에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2. 1960~1973년의 명문학교 진학 상황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 국민 일반의 생활 수준은
극심한 빈곤기였던 40년대~50년대 후반보다는 상당한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발전이 아니라 회복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파멸적인 후유증을 극복하는 정도의 수준이지
발전이라고 할만한 정도의 진전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국민 생활 수준의 회복과 일부 계층에서의 부의 축적을 배경으로 해서,
또 자식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라는
국민 일반의 경험적 인식이 일반화되면서,
자녀 교육 경쟁에 '각성된' 상당수 도시 서민 계층이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입시 전쟁과 명문학교 진학 경쟁이 시작되었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서울의 명문 중학교 입시 전쟁이 그야말로 거의 막장 수준이었는데,
해마다 입시철을 치르면서 심각한  사회적 후유증을 양산하던 때였습니다.
유명한 65년도의 '무우즙' 파동이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68년에도 입시 문제와 관련한 큰 문제가 생겼던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이 당시에는 본격적으로 명문대학이라는 것이 등장했던 바,
명문대학을 진학하기 위한 필수적인 관문으로서
명문 고등학교 입학 전쟁이 그 절정을 향해 치닫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6, 70년대에 유명했던 명문 고등학교는 당시를 살아냈던 세대의 국민들에게는
지금까지도 아주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 이 전통 본고사 시대의 맨 끝자락에 걸쳐 있던 우리 세대들도
이 십 수개의 명문 고등학교 이름을 아직까지도 아주 좔좔 외우고 있습니다.

우선 서울의 명문 고등학교 상황입니다. 언급되는 순서가 바로 랭킹 순서이지요. ㅋㅋ
(남자 고등학교만 올렸습니다.)
경기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경동고등학교, 용산고등학교, 중앙고등학교, 서울사대부고, 보성고등학교.....

위의 학교 중에서 다른 학교와 확연히 차별화되는
3개의 최상위 명문 고등학교는 단연 경기, 경복, 서울이었습니다.
당시는 대체로 공립 고등학교는 전기에 입시를 치르고,
서울의 5대 사립 명문이라는 휘문, 배재, 양정, 보성, 중앙 같은
사립학교는 후기에 입시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위에 말씀드린 경기, 경복, 서울 고등학교는 그 역사적 성립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일제 강점기 때에 서울에는 3개의 공립 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경성중학교 (일본인 학생, 훗날 해방 후에는 서울 고등학교)
경성 제1고보 (한국인 학생, 훗날 해방 후에는 경기 고등학교)
경성 제2고보 (한국인 학생, 훗날 해방 후에는 경복 고등학교)

일제 시대에는 조선땅에서 일본놈들이 입학할 수 있는 중등교육기관은 '중학교'라 불렀고,
조선인이 다니던 학교는 대개 '고보(고등보통학교)'라고 불렀지요.

그러니까 위의 서울고등학교는 일제시대에 왜놈들이 다니던 경성중학교의 후신이지요.
학교 역사가... 경기, 경복에 비해서는 좀 쪽팔린 감이 없지 않지요. ㅋㅋㅋ

우리나라의 후진 언론이 올림픽 관련 보도에서 서열을 매길 때,
금메달 1개를 딴 국가를 금메달 없이 은메달만 20개 딴 국가보다 앞선 서열을 부여하듯이,
당시 서울대학교 입학생을 기준으로 하는 명문 고등학교 중에서
이 '경기, 경복, 서울'은 전국적으로도 발군의 명문 학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서울대학교 다니는 것보다 더 대단하게 여겨졌지요.

이 세 학교들 간의 서열은 경기가 단연 앞서고,
경복과 서울은 서로 우세를 주장합니다만,
일반적인 평판으로 보자면 서울고등학교가 약간 우세하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이크!...... 경복 출신들이 이 글을 보면 나를 죽일라고 할텐데......ㅋㅋㅋ

그리고 이 학교들을 입학하려면 입학 시험(200점 만점)에서
경기고는 197~198 정도, 그러니까 두세 문제 틀리는 정도의 성적이라야 합격이 가능했습니다.
서울고나 경복고도 경기고보다 대략 1~2점 정도 낮은 수준에서 합격선이 정해졌지요.
경기고등학교의 경우에는 그 마지막 졸업생(본고사 세대 중)의
서울대학교 입학 상황을 예전에 자료로 본 적이 있습니다만,
재수해서 입학한 사람까지 포함하자면 졸업생의 60~70%가 서울대에 진학했다고 합니다.
경복고와 서울고도 대략 절반가까이 서울대에 들어갔다더군요.
어떻습니까...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이 고등학교에 능히 입학할 수 있겠습니까? ㅎㅎ


이런 양상은 당시(6~70년대) 지방 대도시에서도 역시 비슷했습니다.

우선 부산의 경우에는
경남고등학교, 부산고등학교가 양대 명문이자 라이벌이었지요.
양교의 라이벌 의식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평판으로는 경남고등학교가 부산고등학교보다 약간 낫다는 견해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산고등학교는 일본인 학교인 부산 중학교의 후신입니다.
경남이야 당연히 조선인 학교였지요.
그리고 본래 조선시대에는 부산 지역 일원의 중심이었던  동래에 있는
동래 고등학교가 역시 인문게 명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마산에 있는 마산고등학교도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명문 고등학교였지요.


다음은 대구의 경우입니다.
대구 경북은 우리 나라 지성사(知性史)에서 매우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조선 시대이래 서울 경기 지방에 못지 않은 아주 유구한 인문적 전통이 확고한 지역이지요.
그래서 아주 일찍부터, 고등교육기관에 자녀를 진학시키는 문제에 있어서
다른 지방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지역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구에서는 단연 경북고등학교가 명문입니다.
그리고 학교간 서열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계성고등학교, 경북대 사대부고가 역시 명문고등학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경북 지역의 김천에 있는 김천고등학교도 유구한 전통을 가진 명문이었지요.

그리고 경북고등학교는 우리 나라 현대사에서 전국적인 통산 랭킹으로 보자면,
(한국 파워엘리트 배출 순위를 기준으로)
경기고등학교에 이어서 대략 2위 정도로 평가되는 명성을 갖고 있지요.
뭐..... 이 지역 출신의 군바리 정치가들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대구의 성광고와 영신고를 졸업했던 제 친구 녀석들이 말하기를
옛날에 이 경북고 학생이 시내버스를 타면,
버스 기사가 차비를 안받았다는 얘기가 있었답니다.

이 경북고등학교를 대구 지역에서는 '경고'라고 부르는데,
이 학교 교모(모자)에 하얀 테두리가 3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교모에 있는 띠를 보고 이르기를
'환호의 3선'이라고 불렀답니다. 원래 이 '환호의 3선' 다음에는 '아디다스' 이지요. ㅎㅎ
예전에 스포츠 용품 메이커인 아디다스의 광고 문구를 빗댄 표현인 거지요.
아무튼 경상북도 지방에서 경북고등학교 합격생을 낸 집안은
그 부모가 목에 힘좀 주고 살았다고 합니다.


호남 지방에서는 광주제일고등학교와 광주고등학교가 단연 명문이었습니다.
전주고등학교와 목포고등학교도 알아주는 명문이었지요.

특히 광주제일고등학교와 광주고등학교는 오래된 라이벌 의식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유명했던 항일 학생 운동인 '광주 학생 운동'의 주역으로서
광주 서중, 제일고는 한국 근대 학생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명문입니다.
1929년에 일어났던 이 사건에서
당시 등교 중이던 광주여고보의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했던 일본인 중학생들은
아마 광주중학교(동중)에 다니던 놈들이었을 것인데,
이 광주중학교가 훗날 해방 후에 광주고등학교가 되었지요.
그러니 당시 광주고보(서중 → 훗날 광주 제일고등학교) 학생들과는 원수지간이 되겠습니다. ㅎㅎ

농담삼아 하는 말입니다만, 광주고등학교 학생들은 '학생의 날' 기념식을
어떻게 학교 역사에서 설명하고 있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ㅋㅋㅋ

 
그리고 인천입니다.
인천에서는 50년대 이래 두 개의 명문 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바로 제물포 고등학교와 인천 고등학교이지요.
서열은... 제물포가 더 명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학교들은 다른 지방 대도시와 비교해서 오히려 약간 앞선다는 평판을 얻었던
아주 명문 중의 명문 고등학교들이었습니다.


이상이 6~70년대 전반기까지의 서울을 포함한 주요 도시의 명문 고등학교 현황입니다.




3. 1973~1980년의 명문학교 진학 상황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아마 그게.....1969학년도부터 서울 시내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었고,
1974학년도부터 '고교 평준화 제도'가 서울을 시작으로 해서
연차적으로 전국 주요도시로 확대 실시됩니다.
1974년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1975년 대구, 인천, 광주,
1979년 대전, 전주, 마산, 청주, 수원, 춘천, 제주 등의 순으로 실시되었습니다.

평준화 실시 시기를 기점으로 각 주요 도시에서는
그 오랜 세월, 찬란한 명성을 누려왔던 소위 '명문 고등학교'가 하루아침에 다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도한 당시의 풍경을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한편에서는 앓던이 빠진 것처럼 아주 통쾌해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울분과 비탄에 잠겼더랬습니다.
당시 대다수 사회 고위층들은 당연히 이 명문 고등학교 출신들이었습니다만,
그래봤자... 그 서슬퍼런 유신독재 시절인데다 국가 통치자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다 보니,
누구도 감히 대놓고 정부 정책에 반발하지는 못했지요.
그저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엔 없었습니다.

그러나 1973년 이후에도 다시 새로운 명문 고등학교가 생겨났습니다.
우선 서울에서는 당시로서는 서울 외곽 지역에, 일부 비평준화 지역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들이 아주 잠깐이지만 명문고등학교로서의 명성을 누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신일고등학교나 여의도고등학교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지요.
그리고 서울 인근의 위성 도시 중에서 비평준화 지역의 공립 고등학교가
역시 명문고등학교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973~1979년에 비평준화 지역이었던 대전, 전주, 마산, 청주, 울산 등에서
새로운 전국적인 명성을 누린 명문 고등학교들이 등장했습니다.
물론 이 학교들은 그 이전시기부터 위에 언급한 대도시의 명문학교들만은 못해도
기본적으로 해당 지역에서는 오래된 명성을 가졌던 명문고등학교였습니다만,
이 시기부터 해당 광역시, 도의 인재를 전부 끌어모아 훨신 더 강력한 명문학교로 발전한 것이지요.

이 당시 가장 유명했던 명문고등학교는 단연 전주고등학교와 대전고등학교였습니다.
서울대학교 합격생을 기준으로 하자면, 대략 150명 내외의 합격생을 배출했지요.
연고대를 포함하자면 대략 졸업생의 절반 정도가 명문대학에 진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 학교 졸업생들의 프라이드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재수해서 저의 동기가 된 어떤 대전고 출신 녀석은
자기 학교를 일컬어 '天下大高'라고 떠들어대더군요. 가소로운지고....ㅋㅋ

그 다음에는 마산고등학교, 청주고등학교, 울산 학성고등학교, 춘천고등학교 등이 명문 고등학교입니다.
서울대 합격생은 대략 40~50명 정도를 배출했었지요.

위에 말씀드린 전주고나 대전고의 경우에는 입학 성적이 200점 만점에
대략 192점 내외에서 합격선이 정해졌고,
다른 학교들은 대개 180점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서 합격선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뒤 1979년에는 이 지방의 중간 규모의 고등학교들이 역시 평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부터 1990년까지는 기타 다른 도시에서 명문 고등학교가 나오기 시작지요.
그러니까.... 진주고등학교, 순천고등학교, 강릉고등학교, 충주고등학교 등이지요.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미 과거의 '명문'이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상당히 못 미치는 정도의 학력 수준을 가진 학교들이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전국적인 규모에서 평준화 체제가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이 1980년부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과거의 평판을 기준으로 한 진정한 의미의 명문 고등학교가 사라진 시기이기도 하지요.


결국 1979년을 마지막으로 해서 전국적인 명성을 누리던 명문 고등학교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 명문고교를 다녔던 수많은 졸업생들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한국 사회의 파워 엘리트 집단에서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지요.

학교는 사라졌지만 그 학교로 인해서 형성된 학맥, 인맥은
21세기 벽두의 대한민국을 여전히 어쩌면 그 절정에서 주무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언뜻 현상적으로 살펴보자면, 소위 상위권 대학교 출신들의 독무대로 보입니다만,
사실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60~70년대의 명문 고등학교 출신들이 만들어낸 권력 구도라는 것을
이 시기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이 시기의 명문 고등학교를 알아보는 것은 여전히 그 현재적인 의미가 확실히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주 중요한 사실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한국 사회에서 대학의 서열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완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완성'이라는 것은 우리 나라 대학의 서열 구조가 고착화되기 시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국 대학의 서열 구조상 그 최정점에 서울대학교가 있습니다.
이 서울대학교는 정말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는 대학이지요.
물론 서울대학교의 핵심이라고 할까, 뿌리라고 할까 하는 것은
바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경성제국대학'입니다.

원래 일제는 한국, 대만을 포함한 일본제국 통치 지역에
최고의 고등교육 기관으로 '제국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우선 일본 내지에 설립된 제국대학을 살펴보자면,
동경제국대학(지금의 도쿄대학), 경도제국대학(지금의 교토대학), 동북제국대학(지금의 도호쿠대학),
구주제국대학(지금의 규슈대학), 대판제국대학(지금의 오사카대학) 등이었고,
그리고 조선반도에 경성제국대학, 대만에 대북제국대학을 세웠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이 일본에 있는 제국대학에 유학했던 조선인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대부분의 일제 친일 관료나 지주 계층의 자제들은,
중앙대학, 릿쿄대학, 동지사대학, 청산학원대학, 메이지대학 등을 다녔습니다.
명문 사립인 게이오대학이나 와세다대학 출신도 가끔 있긴 했습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근대 한국 문학 작품을 배울 때,
거기에 나오는 수많은 문인들이 대부분 위의 일본 사립대학 출신들입니다.
한마디로 돈이 많아서 일본유학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지요.

아주 드물지만 일제 시대에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유명한 인물을 하나 소개하자면,
고려대학교 총장과 5공 시절에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이란 인물이지요.
이 사람은 옛날 40년대에 '반민특위' 시절에 친일파 2호로 붙잡혀서 조사받았던
경방 삼양 재벌  '김연수'의 아들이자, 고려중앙학원 설립자이며
50년대 초반에 부통령을 지낸 한민당의 영수 '김성수'의 조카입니다.
이 사람은 동경 제3고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조선 최고의 학벌 되겠습니다. 에라이.......

그 밖의 다른 조선인 인재들은 대부분 경성제국대학을 다녔습니다.
이때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던 조선인은 생각만큼 많지는 않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당시 조선인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이자
식민지 조선의 충실한 똘만이 양성기관으로서,
또 광복 이후 초기 한국 사회에 일정 규모의 고급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가 있겠습니다다만......
 

얘기가 잠깐 옆길로 샜네요..... 죄송합니다. 다시 서울대학교 얘기로 돌아갑니다.ㅎㅎ

경성제국대학은 해방 후에 '경성대학'이 됩니다.
이 경성대학은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60~70년대의 서울 문리대의 전신이지요.
문리대라 하면 현재 서울대의 인문대 +사회대 + 자연대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서울대의 다른 단과대학은 그 기원이 아주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서울에는 몇 개의 관립 전문학교가 있었지요.
우선 동숭동의 '경성대학' 근처에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의학전문학교'(연건동)가 있었고,
지금의 홍릉에 '경성상업학교'와 '경성사범학교'가 있었으며,
태릉에 '경성고등공업학교'가 있었고, 수원에 '수원고등농림학교'가 있었습니다.

이름을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지만,
이 별도의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전문 대학들이 나중에 경성대학과 합쳐 모이면서
서울대학교의 소속으로 편제되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순서대로, 법대, 의대, 상대, 사범대, 공대, 농대로 되었습니다.

이 무렵 1947년인가에 있었던 일명 '국대안' (서울대학교 설립안)은
큰 파동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른바 극심한 '국대안 반대 투쟁'을 겪으면서 겨우 통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학과, 예를 들면 '노문과' 같은 경우에는
대다수의 학생과 교수가 월북해버리는 사태까지 생겨서 결국 해당 '과'가 폐과된 경우도 있었고,
노문과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수 학과의 교수와 학생이
이북으로 넘어가서 김일성대학으로 그 소속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또 40~75년까지는 기존의 각 대학이 자리잡고 있던
각 캠퍼스 별로 학교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사실 이 시기에 서울대를 다녔던 사람들은 서류상으로만 동문이지
실제로는 국립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별도의 학교처럼 문화가 형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이래의 각 대학의 독자성과 정체성에 대한
구성원들의 굳어진 인식은 쉽게 바뀌지 못한 상태였지요.

그러다가 7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통합 캠퍼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1975년 무렵까지 이 학교들은 여전히 별도의 캠퍼스를 유지하고 있었지요.
제가 1972년에 서울 신림2동에 살던 고모댁을 방문했었는데,
그때 오늘날의 서울대 자리에 군 공병단이 한참 터닦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서울대의 각 단과대학은 별도의 기원과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대학과는 달리 각 단과대별 소속 의식이 유달리 강했습니다.
한마디로 같은 유니버시티 소속이라는 관념이 희박했었다는 거지요.
이 점은 훗날 우리 나라 파워 엘리트 집단에서 서울대 출신들의 행동 양태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단과 대학 출신이 아니면, 같은 학교라는 생각이 희박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 조직 내에서 이 학교 출신들의 결속력이 매우 약한 특성을 낳았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서울대학교는 아마 문교부 종합대학 설립 인가 번호 상으로는
4번인가 그렇게 받아서 국립종합대학교로 출발했습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당시 1번은 이화여대, 2번은 연세대, 3번은 고려대)
우리나라 대학 서열 상의 지위는 출발부터 확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을 넘어가면서, 대학교육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고조되는 시기에는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발전했고,
그 견고한 지위는 이제 난공불락이 되었습니다.

구구한 이유와 근거를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분야와 전공을 불문하고, 특정 대학이 홀로,
한 국가에서 최고 명문대학의 지위를 독점한다는 것은
한국 교육의 과거와 현실, 그리고 장래를 위해서 정말 불행한 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다음은 다른 대학의 얘기를 잠깐 해보겠습니다.

우선 연세대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1917년인가에 미션계 전문학교로 설립된 연희전문학교와
1885년에 설립된 '광혜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1957년에 통합해서 연세대학교로 발전했습니다.

사실 원래 일제시대에 조선반도에서 가장 명망있는 미션계 전문학교는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였습니다만,
해방과 남북 분단을 거치면서, 특히 1957년에 세브란스와의 통합을 거치면서
이 연세대학교가 최고의 사립대학으로 발전했던 것이지요.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이 대학은 흔히 알려져 있는 사회적 통념과는 달리,
매우 이공계 중심적인 대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1990년대 이전까지는 분명히 그랬습니다.
이 학교는 통상 알려진 것처럼 경상계열의 학과가 대단한 명성을 갖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의과대학은 물론 공과대학과 이과대학이 대단히 좋은 수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 이 대학에서 의과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반에 이른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제가 1980년대 초반에 살펴본 이 학교 일람에 의하면,
당시의 전임교원이 대략 600명을 상회했었는데,
이 중에서 의과대학 교수가 300명을 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이 대학은 세브란스의 명성에
연희대학교가 묻어간 케이스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연세대학교는 교수진의 전공별 분포로 보나,
입학정원의 과별 배정 내역을 살펴보거나, 학과의 전통으로 보나,
이공계 중심의 대학으로 볼 수 있지요.

또 한가지 특징이라면 예전 그러니까 80~90년대에는
이 학교 인문계열 특히 문과대학에 여학생의 비율이 매우 높은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영문과나 불문과, 독문과, 국문과에 여학생의 비중이 70%를 넘는 경우도 흔했지요.
우리 나라 고학력 수준 여학생들의 메카가 바로 연세대 문과대학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학교의 인문 계열에 합격하는 여학생의 비율이
다른 경쟁 대학에 비해서 매우 높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70년대 후반 이후에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해서
80년대 중반까지는 그 차이가 아주 컸습니다.
물론 경쟁 대학도 90년대를 넘어가면서 여학생의 비율이 매우 높아지는 추세입니다만,
그래도 대략 10여 년에 이르는 이 시기에 이 학교에서의 높은 여학생 비율은
결국 이 학번 대에 속하는 졸업생들이 우리 사회의 파워엘리트 집단을
형성할 때, 상당한 정도의 핸디캡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전망이지요.

특히 연세대는 인문 계열의 졸업자 숫자가 경쟁대학에 비해서 아주 작은 편입니다.
그로 인해서 이 학교는 경쟁 대학에 비해서 인풋은 확실히 좋은데
아웃풋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평판을 듣고 있지요.
 
게다가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여학생의 비율이 특히 높았기 때문에
이 연령대의 졸업생들이 앞으로 5~10년 후,
우리 사회의 핵심 파워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는 시기가 되면
그 영향이 분명히 드러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이건 농담삼아 하는 말입니다.
이 학교를 가 보시면 압니다만,
이 학교는 교문이 2개 있는 셈이지요. 연대 교문과 세브란스 교문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겼습니다.
물론 한 쪽은 병원을 방문하는 외부인이 주로 이용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이 학교의 독특한 역사를 염두에 두고 살펴보면 그런 인상을 받는 것도 사실이지요.

이 학교는 1930년대에 이미 조선반도 유수의 명문 사립대학으로 발전했고,
1950년대에는 확고한 한국의 최고 명문 사립대학이 되었습니다.
이 학교의 심볼마크를 가만히 살펴보면,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심볼마크를 거의 그대로 본딴 모양으로 되어 있지요. ㅎ
그런데 심볼인가, 마크인가, 앰블럼인가? ....




다음은 고려대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20세기 초반에 설립된
우리 나라 고등교육 기관 중에서는 매우 희귀하게도  미션 스쿨이 아닙니다.

이 학교는 법학과, 이재(理財=경제와 경영)과의 2개 학과를 만들어서
기존의 한성법률학교 학생을 인수받아,
1905년에 설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입니다.
원래는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및 출판사가 세트로 만들어져서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서 출발했고, 낙원동을 거쳐
1934년 무렵 당시 경기도 양주군에 속하던 지금의 안암동으로 이전했습니다.

이 학교는 우리 나라 근대 교육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점하는 학교이기도 합니다.
원래 조선 황실의 고관이 설립했었는데, 곧바로 주인을 잃고 폐교 위기에 처했다가,
당시 천도교의 인수와 운영 참여를 통해 가까스로 희생했습니다만,

1920년대에는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경성에서 단연 최악의 똥통학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학교의 지위도 전문학교의 지위를 잃고 강등당해서
'보성전문학교'에서 '보성법률상업학교',
그러니까 대학에서 각종 학교로 격하되었던 것이지요.
1920년대는 이 학교의 역사에서 거의 암흑에 가까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호남 제일의 토지 재벌 가문 출신이었던
김성수가 인수해서 새롭게 교사를 꾸리고 학교의 발전을 추구해서
1930년대 후반에는 예전의 명성과 위상을 되찾게 된 매우 드문 이력을 갖고 있는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광복 이후에, 종합대학 설립 인가를 앞두고,
학교 이름을 새로 정하는 시기에  매우 고민이 많았었는데,
결국 이 좋은 이름을 선점해서 그 후에 많은 특권을 누리게 된 학교입니다.
영문으로 했을 때, 이 학교의 이름은 외국인이 오해하기 딱 좋은 이름이지요. ㅎㅎㅎ

실제로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만,
원래 6,70년대에 UN 산하 기관인 UNDP에서 운영하던 제3세계 지원 프로그램의
원조를 받아 이 학교의 농과대학 등에 시설 투자를 했었는데,
그때 UNDP에서는, 이 학교를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교육기관으로 오해해서,
서울대학교를 제치고 원조 자금을 지원했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학교는 1950년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이 학교는 원래 철저한 인문 계열 중심의 대학입니다.
일부 순수학문에 속하는 자연과학 계열의 학과는 꽤 유래가 깊습니다만,
공과대학은 그 역사와 이력이 아주 일천합니다.
더구나 1960년대 말까지는 의과대학이 없었습니다.

일제 시대에 우리 나라 여성 의사를 양성하던 경성여의학전문학교를 모태로 발전한
지금의 혜화동 로터리에 자리한 '우석대학교'(전주 우석대학이 아닙니다)와
1970년을 전후해서 합병했는데, 그 때 우석대학교의 중심 대학이었던
의과 대학이 이 대학교의 의과대학의 모체가 되겠습니다.

이 학교는 경쟁 대학에 비해서 어문계열, 사회과학 계열이 매우 우수합니다.
또 실용 학문 분야인 법과 대학과 경영 대학이 대단히 아웃 풋이 좋다는 평판을 얻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 결속력이 있는 파워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도를 넘는 정도의 심각한 섹티즘(Sectism)의 진원지로 지탄받기도 하는 학교입니다.
 
이 학교의 경영학과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과 대학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 재계의 오너 집단 중에서 가장 많은 졸업생을 갖고 있는 대학이기도 합니다.
이 대학의 경영학과는 이면에서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무시무시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이 점을 잘 모르다가, 최근에 이 학과 출신의 대통령이 생기면서
약간 관련 정보가 일반에 알려지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지요.....

위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이 학교는 우리나라 파워 엘리트 집단에서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대학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또한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수구적 전통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 학교 출신들의 자기 동문 챙기기는
그야말로 뻔뻔스럽고 노골적이기로 예전부터 아주 유명하지요.


예전..... 그러니까 1990년 무렵에, 연세대 출신이고 방송국 경제부 기자질을 해먹고 있던
제 동기 녀석이 자기 대학 동문회지를 차에 놓아두고 있길래,
제가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만, 거기에 여러 꼭지의 기획 기사로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고대는 졸업한 동문 중에서 동창회비를 납부하는 사람이 5만명을 넘고 있는데,
우리 연세대는 단 1만명에도 못미치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또 걷히는 동문회비의 금액도 고대에 비해 1/10에도 못미치고 있고,
고대 총동문회는 기금을 모아서 100명이 훨씬 넘는 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는데,
우리 동문들은 그저 제 살기 바쁘고, 그 이기적인 행태가 여전히 답습되다 보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결국 우리 학교 출신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 발전하는 데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고 있으니
참으로 엄중하다 아니할 수 없는 고로, 하루빨리 각성하고 이 난국을 조속히 타개하자!'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ㅎㅎㅎ

하여튼 이 고려대학교는 한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앞으로는 강력한 견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끝으로 지난 2008년에 문화일보에서 기사로 발표한
한국의 파워엘리트 500 선정 기사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그저 재미삼아 훑어보면 된다고 봅니다. 분석의 논리와 내용은 허접하기 때문에,
그냥 빼버리고 통계만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대한민국 파워엘리트 500인의 출신 고교와 대학을 확인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A. 고등학교 (500명 중)
 1위 — 경기고 (78명)
 2위 — 경북고 (26명)
 3위 — 경복고 (20명)
 4위 — 서울고 (20명)
 5위 — 광주일고 (19명)
 6위 — 부산고 (15명)
 7위 — 경남고 (14명)
 8위 — 대전고 (12명)
 9위 — 용산고 (10명)
 10위 — 경동고 (9명)
 
B. 대학교 (500명 중)
 1위 — 서울대 (231명)
 2위 — 고려대 (52명)
 3위 — 연세대 (37명)
 4위 — 성균관대 (18명)
 5위 — 한국외대 (10명)
 기타는 유의미한 숫자가 아닌 것같아 소개를 생략합니다.


이제 글이 너무 길어져서 결론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만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읽어주신 분들에게 노고를 끼쳐 송구스럽고 또 대단히 고맙습니다.
혹시 추가할 내용이 있다면 시간이 있을 때 쉬엄쉬엄해서
밑에 댓글로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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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23

music님의 댓글

헉헉.. 일단 리플1등부터...;;;

사랑합니다님의 댓글

예전엔 서울대좋아했는데..내가 못가봐서 더 그렇고ㅋㅋㅋ
내 스승님이 서울대 나오셨는데..
선생님 왈 ;요즘 서울대 대학생들 개념들이 다 빵구나 났다는 말씀을...
정신이 나약하다고 하신말씀이 기억 나는데..

그런데 요즘 대학생들 거의 나약한것같은데...
갑자기 뜬금없는 말했네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9.01 19:54

엇!..... 사랑합니다 님께서 오랜만에 이곳 유부방에 댓글을 다셨네요.
정말 무지하게 반갑습니다.

서울대 출신의 그 스승께서 말씀하셨다는,
'요즘 서울대생들은 개념이 다 빵구가 났다'는 말씀은
사실 알고 보면...... 그거 아주 오래된 레파토리입니다.
물론 그 말의 사회적 함의와 뉘앙스는 과거와 다소 다르겠습니다만,
하여튼 그거 아주 오래된 또 상습적인 표현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이미 중국에서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져
전해오는 문서 중에도 이미
'요즘은 말세야, 젊은 놈들이 영 문제가 많아!'라는 표현이 있다니,
사실 그 기원을 따져보면 꼭 서울대에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전통 본고사의 마지막 세대인 80학번들이 그 학교에 입학할 때,
서울대학교의 모집 정원이 3,5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81학번 때에는 갑자기 6,500명이 되었지요.

그리고 본고사가 매우 갑작스럽게,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강제 폐지된 상태에서
3학년 1학기까지 본고사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본고사가 없어진 상태에서
입시를 치렀기 때문에 그 혼란이 극에 달했지요.
요즘 같았으면 가히 정권적 차원의 위기로 인식되었을 그런 사태가
81학번~83학번까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지요.

참고로 서울대 입학 지원이 가능하다는,
당시 300점 이상의 고득점자의 연도별 배출 현황을 간단히 보자면,
1980학년도(본고사 마지막 학번)는 3,500명,
1981학년도는 대략 1,800명이 배출되어 그 전해인 80년도 보다 대폭 난이도가 올라갔습니다.
1982학년도는 불과 800명 정도가 300점을 상회해서,
그야말로 전국의 고등학교가 일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지요.
그러다가 1983학년도에는 반대로 6,000명이 배출되어
역시 미증유의 혼란이 생겨서 정말 개판이었습니다.

기존의 대학 입학 관련 데이터가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상태에 처해서,
당시 입시생들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대학을 지원해서 입학했고,
정말 억울한 꼴을 당한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이 노정되다보니
그 피해는 고스란이 입시생들이 떠안은 꼴이 되었습니다.

(이크! 얘기가 또다시 옆길로 샜네요.  죄송합니다.
다시 본 줄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바로 이런 거대한 규모의 입시 혼란의 첫 해로 볼 수 있는
1981학년도 입학 사정(査定)을 할 당시에,
서울대의 주요 학과의 거의 대부분이 지원 미달에 그치는 초유의 사태를 맞기도 했었습니다.
학력고사 180점의 점수로 법대에 진학하는 사람도 생겼지요. ㅋㅋ
이런 사정은 그 다음 해인 1982학년도 입학 사정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많아진 입학 정원 속에서 미달이 속출하는
그런 상태에서 입핬했던 81, 82 학번들에게,
80학번 이전의 선배들이 위에 사랑합니다님께서 말씀하시던
그런 내용의 비아냥을 일삼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 신입생들은 대가리가 영 똘빡인 듯...., 자격이 없는 입학생이 너무 많은 듯.....
전반적인 인식 능력이 매우 저급한 듯.....입학 정원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할 듯....'
뭐 이런 식의 비난을 듣곤 했었답니다.
이런 상황은 사실 80년대 전반기 학번들에게 공히 적용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본고사를 치르지 않고 입학한 학생들에게
일부 이공계 학과의 교수들이 노골적으로 말하기를,
'기초 과학, 특히 수학에 대한 이해 수준이 너무 낮아서,
향후 전공 과목을 이수하는 과정에서 수업을 따라갈 능력이 애시당초 결여되어 있다.....
기본 자질과 소양이 매우 열등하다.....'
라는 소리를 정말 많이 들었다는 거지요.ㅎㅎ

이 같잖은 레파토리는 서울대 자연계 대부분의 학과에서
2010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답니다.

그리고 사실은, 옛날 60~70년대에 서울대를 졸업했던 이 대학의 자연계 교수들이
이런 비판과 질책을 쏟아내는 역사적인 기원이 알고보면 상당히 있긴 하지요.

그 내용은 밑에 별도의 댓글로 계속해 보겠습니다. ㅎㅎ
뭐.... 다른 것은 아니고,
바로 그 교수들 자신이 수험생이었던 시절에 했던 수학 공부와 관련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9.01 19:54

여기서 잠깐, 전통 본고사 시대의 마지막 세대인 '76학번 ~'80학번의
서울대학교 입학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특히 마지막 본고사 입학 세대인 '80학번의 상황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당시에 있었던 대학입학 예비고사(훗날 80년대 학력고사와 동일)의
배점이 340점, 고교 내신성적이 10점, 본고사(국영수)가 300점이었지요.
그래서 총점이 650점 만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서울대 입시에서 특기할만한 점이 있다면,
그건 압도적인 본고사의 비중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서울대에 지원하는 대다수 수험생들의 예비고사 성적은
그 차이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본고사 성적으로 당락이 갈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서울대에 지원하는 수험생들 간의 본고사 실력에는 상당한 격차가 존재했었지요.

1980학년도 예비고사는 전례없이 문제가 쉽게 출제되어서
문,이과를 통틀어 300점 이상의 고득점자가 3,500명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서울대 주요 학과의 예비고사 성적이 310 정도인 수험생이 낙방한 경우는
부지기수로 많았던 반면에 280~290점 정도의 예비고사 성적을 얻은
수험생 중에서 합격한 경우도 역시 꽤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당락의 관건은 역시 수학 시험이었습니다.
70년대 본고사에서 서울대 수학 문제는 대개 5개 내외의 주관식 문제를 출제했는데,
합격생들의 평균 성적이 대략 30~50점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문과의 경우, 5문제 중에서 1개 반이나 2문제 정도를 맞추면 합격이었지요.

사실 이 다섯 문제의 문제 내용을 파악하고, 해결 방법을 추론해서
답안을 작성하는 과정을 계산해보면,
도저히 1시간 내에 다 풀기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전에 적어도 출제 문제 중에서 1~2개 정도는 그 문제 유형을 확실히
암기해 놓은 상태에서만 겨우 2개 내외의 답안을 작성할 수 있었다는 거지요.

그럼에도 이 수학 시험에서 3~4개 정도를 맞추는 학생들이 꽤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본고사 실력을 믿고, 예비고사를 그저 고등학교 월말고사 치르듯이 대충 준비해서
시험을 보고는, 그 점수가 대략 280~290점 정도면 만족했지요.

위에 말씀드렸던 300~310점의 예비고사 점수를 얻은 수험생들 중에는
이 본고사 과목에 취약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지요.
사실 이것은 노력으로는 도저히 극복되기 어려운 난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비고사 점수를 최대한 많이 얻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 결과 300점 이상의 고득점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래봤자 본고사 시험에 임했을 때,
수학 시험에서 1문제는 커녕 손도 못대고 시험장을 나서야 하는,
그래서 결국 합격하지 못하는 예비고사 고득점 수험생들도 정말 많았습니다.

제가 알던 한살 위의 우리 동네 친한 형도 예비고사에서 307점을 얻었고, 서울대 사회계열에 지원했는데,
나중에 그 형이 나한테 말하길, 수학 시험을 보는데, 단 한 문제도 건드리지 못하고 나왔답니다.
결국 8절지 답안지를 이름만 겨우 써서 내고 나올 때...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상심했고,
두  다리가 흔들려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길옆 나무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는데,
문득 같이 시험을 치렀던 다른 수험생들을 보고 있자니,
자신과 똑같은 표정과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비록 백지를 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도 들더랍니다. ㅎㅎㅎ
결국 그 형은 떨어졌고, 재수해서 그 다음해서 그 학교에 다시 입학했습니다.
지금은 판사 그만두고 변호사질 해먹어서 돈도 많이 벌었는데,
지방 도시의 시장을 한 번 해볼까 하고 있습니다.
 
결국 서울대의 경우에는  본고사에서, 특히 수학 시험에서 20~30점 정도는 쉽게 뒤집어 엎을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서울대 진학을 희망하는 고등학생들은
수학 공부를 무지하게 많이 했지요.... 정말 거의 극한으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대부분의 명문 고등학교 수학 과목은 서울대 본고사 시험 방식을 염두에 두고 편성되었고,
특히 국영수 과목만 치르는 월말고사 때는 항상 서울대 수학 시험처럼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수준에서의 수학 실력은 사교육이나 학교 교육을 통해서는 아예 달성이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대부분 학생 본인이 독자적인 학습 계획을 수립하고
매우 끈질기고 집중력 있는 장기적인 노력 끝에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요.
당시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었던 고등학생의 수학 실력은
웬만한 고교 수학 선생보다 더 뛰어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선생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학생이 풀어내는 경우도 꽤 많았거든요.
또 그걸 선생 자신이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거지요.

반면에 평균적인 일반 학생들은  수학시험 성적이 개판이었지요.ㅎㅎ
당시 수학 시험의 경우엔 우리 학급의 반 평균이 대략 8~12점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출제된 문제의 대부분은, 이미 수학 선생이 비슷한 유형으로 사전에 충분히 연습시킨 상태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인데도 저 모양이었지요.

당시 고등학교에서 본고사를 대비해서 영어, 수학 과목을 공부시킬 때에는
학생들의 평균적인 학업 성취도와 학습 능력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그저 서울대 본고사 출제 수준에 맞추어 강압적으로 수업이 진행되었지요.
그래서 비평준화 지역의 명문고교라는 우리 학교도 학생의 거의 60~70%가
수업 내용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이 젼통 본고사 시대에는 비록 내신성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교사나 학생 모두 중간고사나 기말시험은 그저 대충 형식적으로 치르는 분위기였지요.
오히려 월말고사가 매우 중시되었고 그 시험 성적은 항상 게시판에 방으로 붙여 공개했지요.ㅎㅎㅎ


70년대 후반에는 요즘의 수시 전형과 비슷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비고사 성적만으로 대학을 지원해서 그 점수로 당락을 가리는 제도이지요.
이름하여 '특차 전형'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는 이 특차전형이 없었습니다. 오직 본고사 실력을 드러내야 합격이 가능했지요.
대신에 연고대를 비롯한 서울의 주요  사립대학들이 이 특차전형 제도를 많이 활용했습니다.
대개 입학 정원의 30% 정도를 이 특차전형으로 선발했는데,
특히 연세대와 고려대의 특차전형에는
예비고사 성적만으로는 충분히 서울대에 지원가능하지만,
본고사 실력이 딸리는 관계로 지원을 하지 못했던 수많은 고득점 수험생이 몰렸지요.

전통 본고사 마지막 해인 1980학년도 시험을 살펴보면,
당시 연세대 의대의 특차 합격자 예비고사 평균점이 서울대 의대에 못지 않았습니다.
인문 계열의 경영, 경제, 법학과의 경우도 거의 서울대 사회대 합격자들의
예비고사 평균점과 비슷한 수준이었지요.
이런 사정은 고려대의 경우도 같았습니다.
법과대학이나 상대의 경우, 특차 합격자의 예비고사 성적이 서울대 해당 대학과
거의 차이가 없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80학번의 경우만을 보자면,
예비고사 성적으로는..... 서울대와 연고대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얘기가 되지요.
그러나 당시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차이는 분명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결정적이다라고까지 생각했었지요.
바로 본고사 실력, 특히 영어, 수학에서의 실력 차이가 분명히 있다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극복하기가 매우 어려운 격차라는 것을
당시의 공부를 아주 잘하는 수험생들은 누구나 다 통념으로 알던 사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공부를 아주 잘하는 수험생'이라는 것은
대략 60만명 내외의 수험생들 중에서 상위 0.5%에 들어가는 수준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문게 전국 석차 2,000등, 자연계 1,500등에
들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가진 고등학생들이지요.
또 우리 나라의 최상위권 대학의 주요 학과에,
지원 가능한 군집에 속하는 학생들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9.01 20:33

그런데..... 한국의 이른바 '명문대학'에 관한 얘기를
너무 자세하게 늘어놓다 보니, 한 가지 걱정이 생겨서...
이에 간단한 신상 발언을 하고자 합니다. ㅎㅎㅎ
 
저는 위에 제가 설명한 명문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최종 학력이 고졸입니다.
물론 대학을 잠시 다닌 적이 있습니다만,
다른 일로 바빠서 결국 쫓겨나게 되었지요. ㅋㅋㅋ
그리고는 곧바로 경기도 일원의 공단 지역에서
생산직 노동자로서 전전하다가, 현역으로 군대에 다녀오고,
결혼하고 역시 생산직 노동자 생활도 좀 하고.....
뭐 이렇게 지내다가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재차 말씀드립니다만,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 비해서
저는 가방끈이 아주 짧은 그런 평범한 대한민국의 중년 남성이 되겠습니다.
부디 이 점을 혜량하셔서 오해 없으시길.....
행여나 하는 노파심에서 삼가 첨언해 올리는 바입니다.

성진홍님의 댓글

명문대라....

호주서 그리 명문대도 아닌 곳을 그동네서 대입보고 입학한 후,
울나라 잠시 귀국해서 신문에 나온 그해 학력고사 40분 정도에 다 풀고 답 맞차보니 390점 근처였던 기억이 있는 저로서는.......
풉! 입니다.

외국서 고교 다니고 대입보고 대학교 다니신 분들 대부분이 저와 같은 경험이 아마도 있으실 겝니다. ㅎㅎ

저는 오히려 쎈자님처럼 의식이 깨어있으셔서 대학을 다니다 나오신 분들이 정신적으로는 훨씬 상류층이라고 생각합니다.

흠...그나저나 이거.....
불란을 불러오는 코멘트인가요? ㅎㅎ

향기님의 댓글

향기 59.♡.215.78 2009.09.01 21:34

우..........분량의 압박으로 인하야... ^^

지금은 조금 바빠서 카피하고.... 낭중에 잘 읽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nara님의 댓글

ssenja님
요근래 들어온 작업에 본인이 방해를 한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들어오신 작업 우째 다하셨는지? ^^ 저는 할 일이 없어서 노느라 여러 학자들의 자료를 훑어 보다가 흥미로운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의 사회학자들[G 모스카 ; 이탈리아의 정치학자(1858~1941).]은 이미 한국의 2009년을 예견하고 있었더군요.
모스카는 이미 1800년대 후반에 대의민주주의에 의혹을 품고, 정치활동은 활동적인 소수집단의 소행이며
스스로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계급 이라고 했습니다.
요번에 여러 자료를 찾아보다가 흥미롭고 재밌는 결과물들을 보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글에 한국의 파워엘리트에 대한 아주 실체적이고 실질적인 부분을 언급하셨습니다.
저는 시시한 지방대를 나오기는 했지만 한국의 교육과 입시제도는 나라의 균형적인 발전에 전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언급한 고등학교중 하나가 제가 사는 지방의 광역시 시청 고위공무원그룹의 모교입니다.
시청에 근무하는 자체가 이런 그룹이 아니면 사실 어려우며, 실제로 주위공무원한테도 그런 얘기를 들은적 있습니다.

본인이 보기엔 사무관이나 8급이나 공무원생활 10년하면 '꼴통'인것은 똑같습니다만 그네들은 그런거 아무 상관없이 생활합니다.
제가보기엔 시청의 50%이상을 짤라도 잘 돌아갈것 같습니다.

파워엘리트의 집단이기주의, 정치집단의 계급화, 명문대 파벌 etc...
한국의 현실을 대하는 냉철한 심정에서 인간의 본성은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공공公共 의 이익은 아직 멀었는가?

선진국?

대한민국은?

성진홍님의 댓글

30년 쯤 우리가 닥달(?)하면 쬐끔 바뀔거라 생각합니다. ㅠ_ㅠ

梁李允齊님의 댓글

단편 소설을 하나 읽은것 같네요
문득 서울대 이야기를 들으니 예전에 서울대 법대 나오신
나이 지긋하신 분이 저의 작업비를
배째라하고 안주던 그 할아버지가 생각나네요
얼마전에 길에서 만났는데도 여전히 '돈없어'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오히려 말꺼내 제가 머쓱했더랬죠....
샛길로 새는말 같지만 저는 걍 사람냄새 나는 사람이 좋아요...

사랑합니다님의 댓글

도대체 우리나라의 명문대는 멀까요??
의식이라는게 참 중요한거 같아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9.02 18:18

梁李允齊 님께서 댓글 중에...... 그러니까 그 말미에 하신 말씀 말입니다.
"... 저는 걍 사람냄새 나는 사람이 좋아요 "

또, 사랑합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 명문대는 멀까요?? 의식이라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얘기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분의 의견을 깊이 명심하고
'사람 냄새 나는 명문대 출신의 의식 있는 사람들이 헌신하고 실천했던 아름다운 이야기' 를 해보겠습니다.

물론 지난 80년대에 실제로 있었던 아주 잘 알려진 사실을 정리한 글입니다.

그 글을 함께 읽고 또 희망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ㅎㅎㅎ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9.02 22:10

음...... nara 님께서 댓글 중에 소개하신 모스카라는 학자의 견해 말입니다.

'대의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정치 엘리트에 의한) 정치 활동이란 것은,
활동적인 소수 집단의 행동일 뿐이며, 그들 스스로의 이익을 대변하는 (활동일 뿐)이다.'

저는 약간 방향이 다릅니다만, 기본적으로 그 학자의 인식에 동의합니다.
방향이 다르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대의 민주주의'라는 '공동체의 의사 결정 제도' 자체를 규정한다고 볼 수 있는,
그러니까 그 사회 구성체의 물리적 기반이라고 볼 수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 체제'에 더 주목을 하는 입장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 체제에서는 종국적으로 보았을 때,
대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의 존재 가치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지지와 동의가
매우 약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인민 의지의 총화로서의 국가'를 위임받아 운영, 관리하는 파워 엘리트 집단에 의해서,
사회적, 정치적 의사 결정 구조의 합리성과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명분으로
대의 민주주의 자체의 본질을 변질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행동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통치 집단의 의도와 목표에 적극적인 동참 또는
수동적인 묵인을 해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회 계층의 폭이 점점 두터워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사회 세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집단이 있다면,
또 그 집단의 현실적 존재 또는 가능태를 찾아 보자면,
바로 근래에 대도시 주변에 광범위하게 퇴적되고 있는 '도시 빈민'의 존재입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세계적인 확산에 의해서,
또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위기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중산 계층의 계급 분화가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자본주의 사회 체제의 역사적 경험을 통찰해 보자면,
또 현재의 후기 자본주의 체제에서 본격적 으로 전개되고 있는
중간 계층의 급속한 분화와 도시 빈민의 확산은,
근본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잠재적 위험 요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도시 빈민의 정치적 성향을 판단할 때,
그 물리적 기반 만을 보고 기계적으로 속단하면 큰 오산입니다.
과거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 사회 체제의 위기 국면에서 그랬듯이,
또 최근의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듯이,
도시 빈민들은 대개가 극우적 편향을 띤 정치적 태도로 귀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 현재 전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이런 추세와 상황 때문에 '절차적 민주주의' 의 기반이 약화되고
더 나아가 그 존립에 위기가 발생하는 상황이 현실로 될 수도 있다는...
 정말 심각한 우려가 생기는 거지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9.02 22:12

어라?...... 아까 이빨 닦으면서 잠깐 들어왔을 때는
nara 님께서 올리신 댓글이 있었는데...... 그새 없어졌네요.

그냥 올려두시지..... ㅎㅎ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9.02 22:15

자꾸 나한테 말시키기가 미안해서 지우신 것 같은데..... 뭐.... 괜찮습니다. ㅎㅎ
지금 제가 바쁘다고 해봐야 하루 12시간 넘게는 절대로 일 안합니다.
그러니 필요한 의견이 생겼다면 가차없이 댓글로 써주시길 바랍니다. ㅎㅎ

nara님의 댓글

ssenja 님께서 말씀하신 도시빈민층. (글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어찌보면 이부분은 게시글로, 아니 저의 글로 인해 ssenja님의 생업에 방해를 준 한국의 파워엘리트에 나와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교육 이라는 중요한 항목에 대한 부분이라고 보입니다. ^^

모스카의 글은 고전적엘리트이론을 한문장으로 압축한 내용입니다.
저는 그의 이론를 요약하고 부분 차용한 글이지만, 이 이태리 학자는 그내용에 그의 이론에 대한 근거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글도 같이 수록하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빈민에 관한 정치적성향이나 세력화 정도는 제가 예측하거나 사실 그 현상들을 접해본 적이 일천해서 뭐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도시빈민들 경우 정치적인 성향(종교,정치적 성향이 강한 정치집단) 에 휘둘릴 가능성이 있지마는 현실적으로 생존의 갈림길에서 나오는 선택일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래에는 이러한 도시빈민들도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정치집단을 찾아갈 것 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경남권에 있는 세계굴지의 대기업 지역선거-
세계 굴지의 대기업과 하청업체에 근무하는 엄청난 수의 노동자그룹에서 현재까지 민노당이 우세했고 보궐선거에서 조승수 진보신당후보가 승리했습니다.
이지역 노동자는 도시빈민층도 아닌 순수노동자들(하청업체 수가 많음)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한 민노당이 전통적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 정당의 지지세력들은 작게 시작하면 개인의 이익을 대변하고,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며, 크게는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그런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전적 엘리트이론에서 펼쳐 놓은 정치집단의 활동은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완벽한 세력이다.' 라고 했듯이 일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009년의 한국은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너무 큰 괴리가 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인도의 도시빈민들에게 대출사업을 하는 사업자가 있었습니다.
TV에서도 방영된적이 있었는데 사업초기 주변사람들은 대출업자를 극구 말렸습니다.
빈민들에게 대출해주면 상환을 받을 수 없다. 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어느 도시중산층가구들보다 높은 상환율을 보였으며, 아직까지 그 대출사업을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9.02 22:33

nara님 댓글의 맨 밑에 있는 내용은 저도 비슷한 내용을 들어본 적이 있지요.
몇년 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아서 화제가 되었던,
농촌 빈민 대출 사업을 시작하여 예상외의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서
유명해진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 얘기 말입니다.
혹시 지금 nara 님께서 말씀하시는 인도 도시빈민 대상 대출사업 얘기는 그와 다른 것입니까?

nara님의 댓글

아닙니다. 기억이 잘안났지만 '그라민 은행' 맞습니다.
그 대출사업하는 분은 의지가 믿음이 상당하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의 편견과 선입관에 맞서서 행동하기가 쉽지 않는데 말입니다.
노벨상을 받은지는 몰랐지마는 상받을만 합니다. ^^
한국에서 그런일 있다면 미친넘 취급받겠지요. 그럴인간도 없을뿐더러 말이죠.

nara님의 댓글

ssenja 님 어느덧 레벨5 가 되었습니다. ^^

추카드립니다. 저는 5가 된후로 신경을 아예 안쓰기로~ 다음을 기약할 수 없더군요.
이제부터는 조금 무감각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것 같습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9.03 00:52

음..... 감사합니다.

저는 원래 레벨 5가 되는 날까지만 활동하고 바로 탈퇴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는데.....
그리고 나중에 다시 다른 ID로 레벨 9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했었는데...이렇게 되다니.....

저는 작년 8월말~11월, 올해 4월말~현재까지 대략 6개월 약간 넘게 이곳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니까 3개월에 5천점씩 쌓은 셈이 됩니다. 
제 기준으로만 보자면 레벨 4가 되려면 앞으로 3년 정도 더 활동해야 된다는 얘기가 됩니다만,

또 주로 질답방에서 답글을 통해 점수를 올려야 하는 제 처지로 보자면,
그거...... 성진홍님 같은 분들이나 하는 거지...... 아무나 못하지요. ㅎㅎㅎ
물론 사사이방 같은 곳에서 노닥거리면서 점수 올리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만,
저는 그거 영~ 시답잖아서......
그리고 그분들도 점수 올리려고 거기서 노는 건 아닌 것으로 보이더군요.  ㅎㅎㅎ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9.03 01:09

후기 산업사회의 도시 빈민의 존재 양태와 그 재생산 구조 등을 본격적으로 얘기하자면,
이 글의 주제에서 결국 이탈하게 되는 문제가 있는 관계로,
또 매우 긴 서술 분량을 필요로 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이런 사회 문제에 대해서 한국의 파워 엘리트 집단이 보여주는 기본적인 인식 태도를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저의 의견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통상적으로 보자면, 한 사회의 도덕성의 기반이라는 것은,
대부분 그 사회의 파워 엘리트 집단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사회 세력 집단이 사회의 지도 계층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형성하게 되는
시대 정신(다른 말로 하자면 역사 의식)과 그 시대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과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이념(이데올로기)를 창출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규정이자,
그 사회가 지향하는 역사적 전망이며 또 도덕적 규범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시대적 과제를 국민에게 제시하고 동의를 얻어 통치 엘리트가 되었다면,
그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도덕적 규범을 체현해야 할 의무를 반드시 부과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국가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고,
당연히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동의 속에서 그 사회의 풍속과 문화로 발전하게 됩니다.

반대로 보자면,  한 사회가 부패하고 도덕적 기반이 붕괴되는 현상은
그 사회의 지배 엘리트 집단의 도덕성이 붕괴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면에서 현재의 한국 사회가 그 도덕적 기반이 무너져 내리는 단계에 처해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재 한국의 지배 엘리트 집단의 도덕적 기반이 대단히 견고해서 잘 유지되고 있으며,
국민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지도력을 원활하고 적절하게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대답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ㅎㅎㅎ


오히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사회 지배 엘리트 집단의 도덕적 기반이
아직은 제대로 더 성장하고 발전해야 하는 즉, 미성숙한 단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외적 강제가 아닌 자기 선택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에 진입한지 겨우 50년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고 보았을 때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반 민주주의의 제 과제'를 제도로 정착시켜서 그 실천을 시작한지는
엄밀하게 말해서 이제 겨우 20년을 넘긴 상태입니다.
1987년 제6공화국 헌법 제정을 기점으로 잡았을 때 그렇습니다.

그 이전 시기에도 제도상으로는 분명히 '법치국가'였고,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도로
설치되어 있었습니다만, 사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시피,
진정한 의미에서 산업 자본주의 국가이자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로 보기에는 대단히 미흡한 상태였습니다.
오히려 태동기의 혼란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또 제3공화국 시기에 이루어낸 급격한 경제 발전이라는 것도
철저한 국가 주도의 계획과 관리를 통한 비시장경제적 발전이었습니다.
물론 그 시기의 급격한 경제 발전을 통해서,
발전된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물적 토대가 형성된 것은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일반 원리가 국민 경제 전 부문에 걸쳐 작동되기 시작한 시점을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단계로 본다면,
이제 우리 나라는 겨우 20년을 넘기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최근 3~40년 간은  통제하기 어려운 속도의 유례없는 압축 성장을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동과 대단히 활발한 사회 계층 이동이 수반되다보니,
(농담삼아 말씀드리자면)
소위 말하는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 단계>의 지배 엘리트로 ((어느날 문득) 올라선 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게.... 상당히 얼떨떨하고 채 정신을 아직 못차린 상태라고 볼 수도 있는 거지요. ㅎㅎㅎ

서양의 <발전되고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 단계>의 지배 엘리트 집단을 아무리 곁눈질 해봐도,
또 그들의 역사적 경험을 아무리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수용하려고 해도,
현 단계에서는 아무래도...... 머리와 몸이 영~ 따라주지 못하는 상태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사정을 감안해 볼 때,
현재 한국의 지배 엘리트 집단은 '사회 통합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그 사회의 안정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인가에 대한
역사적 경험과 인식이 대단히 부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현재의 한국의 지배 엘리트 집단은
지난하고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행동 과제을 설정하고 실천하는 문제에 직면해서는,
구 봉건체제 지배 세력이 보여준 의식 태도에서 거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미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급격한 압축 성장을 통해 적어도 경제적으로만 보자면
이미 성숙한 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고,
이 단계의 사회 체제에서 당면하게 되는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격렬하게 분출되기 시작한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지배 엘리트 집단의 이러한 미성숙함으로 인해서 사회적 긴장과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고,
국민 일반의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증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배 엘리트 집단의 존재 가치와 지도력에 대한
극심한 사회적 불신과 적대감이 발생하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문제가 대단히 많고 또 매우 어렵습니다.
소심한 사람이 보기에는 우리 사회가 이미 나락으로 내려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발전 과정상의 진통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은 아주 확고합니다.)


사실, 현재의 상황은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집권 세력을 정점으로 한 그 동조 세력 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안 세력으로서 미래의 정치 사회적 지배 엘리트가 되고자 하는 집단에게도
대단히 엄중하고 그야말로 위기중첩의 상황입니다.
우리 국민은 분명히 현재의 지배 엘리트 집단에 대한 적대감도 갖고 있지만,
그 비판자, 감시자이자 대안 세력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또 다른 엘리트 집단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현재의 대안 세력의  명백한 전략적 실패를 의미합니다.
또 이걸 확인해 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다 집어치우고 지금 당장 국민에게, 다시 선거하면 누굴 선택하겠는가라고 물어보고,
그 대답을 들어보면 되는 것이지요.  ㅎㅎㅎ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소위 '사회적 대안 세력'의 총체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집권 엘리트에게 우리 사회의 미래를 기대하고 맡길 수 없다면,
결국 대안 세력이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수 있는 과학적인 비전과 전문적인 능력,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면밀하게 갖추어 가는 치열하고 끈질긴 노력을 통해서
끝내 국민의 신뢰를 얻어내는 과정을 거쳐,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지배 엘리트의 전면적인 세력 교체를 이루는 방법이
어렵지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러니...... 혁신합시다!!!


그리고 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사회는 분명히, 
'붕괴 또는 쇠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배 엘리트 집단의 부패와 무능'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정되는 지배 엘리트 집단의, 미성숙함으로 인한, 부패와 무능'을 겪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집시다!!

성진홍님의 댓글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다음 30년 정도 쪼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느정도 철들이 들겝니다. ㅎㅎ

그러기위해서는 "남들도 다하는데 나만 왜 정석대로 해서 손해를 보나?"라는 생각을 버리고 "남들이 그러니까 나라도 그러지 말자!"라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고 나만이라도 바뀝시다!

그리고 교회 다니는 분들이 성경대로만 살아도 우리나라는 순식간에 바뀔 수 있습니다.
교회/성당/절은 인맥을 쌓으러 가는데가 아니라는 거 하나만 기억하고 교리대로만 살아도 나라가, 사회가 바뀔겁니다. ㅎㅎ

music님의 댓글

리고 교회 다니는 분들이 성경대로만 살아도 우리나라는 순식간에 바뀔 수 있습니다.
교회/성당/절은 인맥을 쌓으러 가는데가 아니라는 거 하나만 기억하고 교리대로만 살아도 나라가, 사회가 바뀔겁니다. ㅎㅎ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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