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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雪國)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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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雪國)단상
 
잠이 깨자, 버릇처럼 창가에 선다. 회색 하늘에서, 장작 먼지 같은 잿빛 눈이 흩어지고 있었다. 한 밤중 부터 내린 것인지. 새벽길은 눈에 덮이고, 많지 않은 자동차 궤적이 길 위에 검은 낙서를 남겨 두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거친 대기를 바라본다. 그림엽서같이 포근한 설경이 아니라, 어쩐지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침울한 도시의 겨울 풍경이다.

담배를 하나 꺼내 손바닥에 툭툭 쳐 밀도를 높이고, 입술 끝에 문다. 라이터를 켜려고 습관적으로 고양이처럼 어깨를 둥글게 말다가 문득 어제 밤의 꿈이 생각난다. 얼마 전 나를 속인 모 교수가 시험 감독을 하는 작문 시험 시간이었다. (물론 그 교수는 국문과가 아니고, 나 역시 평생 그런 따위의 시험을 본 적은 없다.)

꿈속에서 나는 단 한 줄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 글 앞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현실보다 더 생생한 지독한 악몽이었다. 각박한 현실 앞에서 나는 늘 이게 꿈이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오늘은 이게 꿈이었으면 하고 기도했다. 역경을 딛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가려는 사람에겐 현실과 꿈, 두 가지 모두 만만치 않다. 나는 앰프를 켠다.

얼마만인가? Urban 스타일의 기타리스트. Stanley Jordan의 기타 연주를 듣고 있다. 며칠 전 먼지 쌓인 CD들을 정리하다가 어딘가 숨어있던 그의 앨범이 나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간 나타나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몇 번의 어지러운 이사와 함께 숨바꼭질을 계속해 왔다.

Stairway to Heaven. 나는 팔짱을 끼고, 또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Stanley Jordan 의 연주를 들을 때면, 신선한 공기를 채우려 심해로부터 물 위로 부상하는 잠수함 같은 버릇이다. 명랑한 핑거링. 쾌활한 손가락들이 스트링 위를 발레리나처럼 달리고, 도약하고, 멈추고, 이윽고 숨을 고른다.

Over the Rainbow. 백만 년 전 숲 속의 오두막 집. 침묵 속에 성실한 온기를 보내는 무쇠 난로. 짙은 고동색의 평판 스피커를 배경으로, 작은 주전자가 뿜어내는 하얀 수증기. 거친 나무 탁자위의 빨간 귤 두개, 반짝이는 햇밤 두 알. 자작나무 가지 위에 소리 없이 쌓여 가던 눈 덩이. 천천히 흔들리며 눈을 털어내던 갈참나무들.

Flying Home. 먼 곳에서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눈을 헤치고 달려오던 복실이. 그 설원에 남겨진 까만 발자국들. 오두막은 두터운 눈의 커튼 속에서 세상과 격리되고, 고독은 모처럼 친근하게 어깨를 감싸고 곁에 앉는다. 처마에서 고드름이 땅에 떨어져 부서지는 울림. 소리 죽인 TV에서는 폭설 속 도시의 혼란을 끊임없이 투영한다. 숲은 영원한 얼음 여왕의 영토였다.

with the sound of silence. 기억 속 굳게 닫힌 추억을 문을 열어버린 그의 연주는, 잿빛 눈이 유리창 너머로 소리 없이 내리는 회색 오전의 풍경과 정물화가 되어간다.

사랑해요.

eleanor rigby. 눈물 그렁한 눈동자가 반짝인다. 문득 나뭇가지에서 쏟아진 눈덩이를 맞은 까치처럼 푸드득 거리며 다시 정신을 차린다. 나도 모르게 설국(雪國)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 버린 탓일 것이다. 코끝에 묻은 눈을 터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몇 번 흔든 나는, 손바닥을 비비며 창가에서 멀어진다.

슬슬 카레라도 만들어 볼까? 도시의 오전은 아직도 회색의 점령군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천당(天堂) 아래 분당(盆唐)에서...

www.allbaro.com

[사진 :  눈 내린 동네 풍경 ] - Nikon 똑딱이


PS : Stanley Jordan plays "Eleanor Rigby"

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4068531440200743313&total=36&start=0&num=10&so=0&type=search&plinde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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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4

Lesaen님의 댓글

글과 음악과 사진의.. 종합선물세트네요^^
Stanley Jordan.. 태핑은 락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았던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줬던 기타리스트라.. 애착이 갑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Stanley Jordan, 정말 좋지요? 몇 해전부터 우울한 새벽이면 늘... ^~^

하늘공주님의 댓글

눈이 내리면 설레이던 그 맘보단
이제는 짜증나고 귀찮은 맘이 앞서는게
나이가 들고 있다는 거겠죠?

푸르매♧님의 댓글

기타연주곡 좋아하는데 찾아들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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