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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父子)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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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父子)의 손

이런, 제기랄!

나는 창밖을 보다, 낮게 신음하고 말았다. 테라스 밖으로 늘 보이는 101동과 103동의 꼭대기에 석양이 비치고 있고, 흰 눈이 쌓인 동탄의 신도시 외곽에는 어스름이 내리고 있다. 이제 2009년의 설날 연휴는 끝나고 있다. 내 소중한 휴가는 속절없이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새로운 한 해, 나는 이제 오랫동안 말과 함께 세상을 뛰어다녀야 할 것이다.

아버지는 올 해 73세가 되셨다. 그는 안방 벽에 붙어 그물을 꿰매고 있었다. 3년 만에 모처럼 명절을 챙긴 나를 보고도 고개를 한 번 돌리셨을 뿐, 화석처럼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기대를 모조리 저버린 아들을, 아마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내가 어렸던 시절, 동네 아저씨들을 아버지 그림자만 보고도 쩔쩔 매게 만들었던 그 남자의 호기. 그건 책이나 펼쳐 들고 늘 조용하게 살았던, 팽이 버섯처럼 여린 큰 아들에게는 별로 통하지 않았다. 손에 쥐면 터질 것 같은 그 약한 아들은, 결국 그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고등학교 이후 그는 큰 아들의 조용한 고집을, 내가 기억하기로는 한 번도 꺾은 적이 없다.

나는 나무토막처럼 묵직한 팔을 들어 찬찬히 내 손을 본다. 굵은 정맥이 구렁이처럼 감아 내린 두터운 손. 대학 다닐 때까지도 내 손은 계집애처럼 고왔다. '재주가 많을 것이다.' 손가락이 짧은 손이라서 늘 듣던 이야기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떠올린다. 일하는 손, 정직한 손. 등나무처럼 거친 손. 마치 오래된 농기구처럼 투박하고 두텁고, 불이든 물이든 거리낌 없이 덥석덥석 쥐던 그 힘센 손. 그는 자신의 삶을 뜨거운지 차가운지 모르고 잡히는 대로 우악스레 쥐었다. 그는 조용하고 헌신적인 아내를 쥐었고, 기술자로써의 삶을 쥐었다. 그는 용감했다. 그는 자신의 불합리와 싸웠고 자신의 운명과 다투었다. 그는 은퇴 후 드디어 자신의 집을 지었고, 비로써 행복했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를 거스른 적이 없었다. 늘 우등상에 개근상에, 그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버지로 만들어 주었던 큰 아들은 그의 중년에 혼을 반쯤 빼놓았다. ‘참견 마세요. 나 혼자 다 할 수 있어요.’ 시를 쓴다며 수상한 시간을 보내던, 그 자랑스러운 아들은 광주항쟁이 한창이던 때, 고등학교를 집어치우고 서울로 떠났다. 아버지의 초등학교 담임선생이었던, 교장은 벽의 성적 게시판을 보며 혼잣말을 뇌까리고 있었다.‘전교 14등이면 서울대 안정권인데.’

지금도 그는 누군가 큰아들과 관련 있는 사람을 만나면 늘 그 말을 회한처럼 중얼거린다. 부끄러운 큰아들은 바로 그의 그 말이 가장 싫었다. 아마 아버지는 당신의 삶이 자신이 믿었던 아들의 삶과 별 상관없다는 것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원까지 마친 뒤, 한 때 승승장구하던 큰 아들은 이혼을 했다. 그리고 철저히 망가졌다. 곧 이어 작은 아들도 이혼을 했다. 가난했지만 꿋꿋했던 그 남자의 자존심. 50년 넘게 함께 살아온 이웃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자랑과 권위는, 출근시간의 도로에 뿌려진 눈처럼 더럽혀지고 흩어졌다.

그 자신 평생 한 여인과 살아왔고, 일찍 돌아가셨던 할아버지와 증조부 그들도 모두 한 여인과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의 아들들도 그럴 것이라고 그는 당연히 생각했다. 당연한 것이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그의 세상은 그를 낯선 세상에 버려두고 떠났다. 그가 인정하면, 또는 인정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어쩌면 그는 지금도 혼란 속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늙은 아버지는 영원히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 때쯤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 든 것은.

여리지만 영악한 그의 큰 아들은 그보다는 훨씬 일찍 인생을 알았다. 돈도, 여자도, 가족도, 아들마저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삶은 누구에게나 개별적인 것이고 아들의 삶이 아버지의 것이 아니 듯, 개인의 삶도 개인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무도 모를 내일을 향해 가고 있을 뿐.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모를 일이다. 그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은 절대로 이해하지 않는 남자다. 그런 남자는 그의 시대에 멸종되었다. 무리가 멸종된 그는 느릿느릿 제사상을 차렸다. 무리가 멸종 된지도 모르는 그는, 떨리는 손으로 차례 상에 정종을 부었다.

탈바가지처럼 표정 없는 얼굴, 그는 잔을 부으며 혼자 낮게 읊조렸다.

아버지, 어지간하면 이제 손자들 사는 꼴도 좀 돌아보시지. 아무리 술이 좋아도, 만날 제사 술만 얻어 드시면 다요?

그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는 그가 16살 때 세상을 떠났다. 술 때문에 아마 뱃속에 제대로 형태를 갖춘 장기는 없었을 것이다. 집을 두 채나 팔아 일본으로 떠나 몇 년이나 지난 뒤 솥 하나를 매고 돌아왔다고 한다. 일찌감치 그의 사람됨을 눈치 챈 증조부는, 역도산과 스모를 함께 하던 작은 아들에게는 고래 등 같은 집 두 채와 두부공장을 남겨주고, 딸들에게는 집과 땅을 넉넉하게 남겨주었다. 하지만 큰 아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아버지, 왜 작은 할아버지 네는 부잔데, 우린 아니야?
내가 어렸을 땐 우리 집에 종이 38명이었다. 그 마지막 종이 팔복이었지.

이제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투정은 그가 제법 혈기 왕성할 때, 막걸리 잔이나 기울일 때 하던 푸념이었다. 세상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살이에 어두운 아낙이었던 할머니, 어린 동생 넷과 세상에 버려진 소년이었다. 세상은 냉담했다. 물론 친지들도 냉담했다. 푸념 따위를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절박했던 그는 그때부터 그의 두 손으로 세상에 매달렸다. 악착 같이 세상에 매달렸던 그의 여린 손은 점점 더 두터워졌고, 거칠어 졌고, 계급장처럼 상처가 늘었다. 나는 내 손을 들여다본다. 나도 아버지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은 모두 포기하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철부지들에게 세상은 더 없이 냉담하다. 나는 철부지였고, 세상은 내게도 냉담했다. 나도 내 손으로 세상에 매달려야만 했다.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나는 마침내 세상의 바닥에 가라앉았고, 아무 것도 없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지닌 것은 오직 두 손뿐이었다. 내 아버지가 내게 준 손. 여린 아들은 마침내 남자가 되었다. 나도 아버지처럼 푸념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고, 나도 아버지처럼 삶과 싸우는 인생의 전사가 된 것이다.

‘당신은 당신 아버님과 꼭 닮았어요.’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영하 18도에도 운동장에서 학생을 가르쳐야했다. 물론 그것은 내 선택이었다. 그래서 나는 3년 만에 집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자 사이의 공기엔 팽팽한 냉기가 머물렀다. 그 저녁엔 어머니만 비정상적으로 조용한, 불 같이 급한 두 남자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침묵 속에 아버지는 배갈(高梁酒)을, 나는 소주를 마셨다.

설날 아침. 아버지가 바라만 보아도 나는 젓가락을 두 번 상에 두드린 뒤, 두부 부침에서 전으로 옮긴다. 그의 손이 움직이자, 나는 과일을 조금 뒤로 물리고 한과를 옮겼다. 잔을 붓고, 수저를 옮기고, 아버지와 나는 마치 손발이 잘 맞는 정밀 기계공들처럼 말없이 제사를 지낸다. 그가 가르친 것은 내 몸에 새겨져있다. 그와 내가 서로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와 나는 부자지간이다. 우리는 한 마디도 없이 제사를 지냈다. 머지않아 내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제사상을 차리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번잡한 시간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면, 우리 삶에는 어쩔 수 없는 것만 남는다.

제사를 마치고, 73세의 늙은 아버지는 두터운 손으로 내게 귀밝이술을 따랐다. 올해 48세, 이제는 아버지만큼이나 두터운 손이 된 내 손은, 아버지가 따르는 술을 받았다. 말은 없었다. 거친 부자(父子)의 손이 서로 스친 순간, 격리된 세월이 서로에게 스며들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거짓말하는 입보다, 거칠고 말없는 손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우호적이지 않다. 나는 아버지의 불행과 아버지의 몸부림과 그의 손을 보고 자랐다. 나는 내게 다가올 시간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짐작한다. 내 손은 점점 더 두터워질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 손보다 더 낡고 거친 손이 될지도 모른다.

101동과 103동 뒤의 하늘은 다크 블루로 저물어 간다. 내 모처럼의 휴일은 젖은 비스킷처럼 녹아내린다. 2009년의 설 연휴는 아파트 너머로 소멸되고 있다. 아쉽지만 시간은 무정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무정하다. 나는 앞으로도 오랜동안 무정한 세월과, 내게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 속에서 눈과 비, 바람과 햇살을 맞아야 할 것이다.

나는 자판을 두드리다 몇 번이고 내 손을 바라본다. 투명한 어둠이 깔린 검은 유리창. 그 창에 비친 내 모습에, 자꾸만 늙은 아버지의 손이 겹쳐 보이는 탓이다.


Mars No.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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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5

군대나온뇨자님의 댓글

어머니가 늙어가시는 모습이 참 안타갑습니다.

어렸을 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해서... 어린 맘에 의심(?)을 했는데..
나는 어머니의 딸이 틀림없더이다.. 지금의 내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가끔 보여 당황스러울 때가 저도 있습니다..

아치D.님의 댓글

더 큰 후회가 있기전에 아버지께
마음을 돌려야할것 같네요.....ㅡ.ㅜ
잘 읽었습니다......

Mr.K님의 댓글

느껴지는게 많습니다. 글잘읽고 갑니다...

뿔테안경님의 댓글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울 아버지를 보는듯...
잘해드려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kohaku님의 댓글

너무도 나와는 맞질 않는 사람이 아버지라 생각하고 컸습니다...

어느날 누나가 결혼할 상대를 데려왔는데... 내 아버지를 너무도 닮은 사람이라...

마음이 놓였다면....... 나 역시 아버지를 닮고 싶은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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