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마크
  • 추가메뉴
어디로 앱에서 쉽고 간편하게!
애플 중고 거래 전문 플랫폼
오늘 하루 보지 않기
KMUG 케이머그

자유게시판

지금은 2004년 9월 1일 수요일 정오.

본문

지금은 2004년 9월 1일 수요일 정오.

오전 내내 혼자다. 서늘한 가을 바람이 잣나무 숲을 쓸고 지나간다. 마른 이파리들이 부르는 우울한 노래 소리가 들린다. 낡은 IC앰프에 70년대의 음악을 걸고 호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 넣고 접의자에 앉는다. 시선이 닿는 어느 곳에도 인적은 없다. 결국 다시 혼자가 되기 위해 그렇게 복잡한 여름을 보냈던가? 진공의 진짜 무게를 느껴보려고, 그 부산을 떨었는지도 모르지.

나는 나의 고독이 마음에 든다. 익숙하다. 보다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 나는 마방을 청소한다. 마방을 말끔히 치워야지만, 내겐 시간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 둘... 나는 밀린 숙제를 하는 것처럼 천천히 치워진 마방의 숫자를 헤아리며, 말끔해져 가는 마방을 바라본다. 매미의 울음 소리가 숲의 저쪽에서 이쪽으로 길게 늘어진다.

마사를 치우며 말들의 물통을 바라본다. 점심시간 까지는 괜찮을 정도의 물이 들어있다. 물통을 큰 것으로 바꾼 것은 잘한 일이다. 그간 하루에 다섯번 정도나 물을 부어 주었다. 이젠 두 번 정도면 충분하다. 삶의 구조를 바꾸는 일은 이토록 간단하다. 다만 유추해 가는 과정이 어리석을 정도로 더딜뿐.

10번 째의 마방 앞에 서자, 온몸에서 땀이 솟아 오른다. 나는 셔츠를 벗는다. 셔츠는 몸에 착 달라붙어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이마에서, 목덜미에서, 어깨와 등에서도 비오듯 땀이 흐른다. 대지와의 경사가 급격해지는 지점에서 마침내 땀은 땅으로 뚝뚝 떨어진다. 흘러내린 땀이 카키색 건빵 바지를 얼룩지게 만든다. 땅방울로 얼룩진 안경을 벗어 바지에 쓱쓱 문지른다.

젖은 톱밥이 제법 묵직하다. 수레에 말똥을 붓고 한 곳에 모아 놓는다. 마지막 마방에 다가가며, 나는 깔끔한 공간에 서 있는 말들을 바라본다. 말은 얼굴을 길게 내밀고 내 어깨에 코를 문지른다. 억센 수염이 따갑다. 마지막 수레의 마분을 치운 뒤, 나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문다. 라이터가 잘 켜지지 않는다. 왼손을 모아 바람막이를 만들고 라이터를 세게 두어번쯤 흔든다. 겨우 불꽃을 담배 끝으로 옮긴다.

밤나무 숲을 스쳐온 바람이 겨드랑이를 지난다. 담배연기는 자작나무 숲으로 빨려들어 간다. 땀이 식기전에 나는 또 다른 수레를 밀고 나온다. 이젠 마사에 깨끗한 톱밥을 뿌려야 한다. 아무도 없는 새벽의 거리를 거니는 것처럼, 침묵하는 말들의 골목을 지난다. 말들의 골목에는 네온사인도 간판도 없다. 좌우로 천천히 몸을 흔들며 서 있는 말과, 땅에 코를 박고 남은 귀리를 찾는 말들만이 있을 뿐이다. 어쩐지 우유배달부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천천히 수레를 밀며 나아가고, 말들은 그늘 속에 실루엣으로 머물러 있다. 한 칸 한 칸 마사에 뽀얀 톱밥을 뿌리며 다시 숫자를 헤아린다. 내일이면 모두 치워야 할 톱밥이다. 노동의 진정한 가치는 소멸에 있다. 밥으로 소멸되고, 똥으로 소멸되고, 가족에게로 소멸되고, 결국엔 자신 마저도 필연적으로 소멸된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기념비 적인 작품들은 대개 포르말린 병에 담긴 것처럼 우울한 박제가 되어 있다.

마사 안에 구수한 톱밥 향기가 가득하다. 나는 전나무나 소나무 향기가 좋다. 따라온 강아지가 물끄러미 서서 고개를 5도쯤 왼쪽으로 꼬고, 분홍빛 혀를 내민 채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본다.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나는 사료를 한 줌 그릇에 부어주고, 물 한 바가지를 준다. 그래도 강아지는 잘려져 짧아진 꼬리를 흔들며 발 밑을 따라 다닌다.

저녁에 먹일 귀리에 물을 부어 불려 놓고, 급수 라인을 확인한다. 곧바로 샤워실로 향한다. 샤워기에서 쏟아 지는 물 줄기가 신통치 않다. 세수대야에 물을 받으며 어푸어푸 세수를 한다. 어느정도 대야에 물이 차오르면 양손으로 들어 머리 꼭대기에서 부터 차가운 물을 단숨에 붓는다. 이윽고 몸에서 열기가 빠진다.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턴다. 미세한 물 방물들이 햇살을 반짝이며 사방으로 날아오른다. 작은 무지개는 생겨나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 담배를 물고 짜장라면을 끓인다.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파리도 몇 마리 잡는다. 참 끈질긴 놈들이다. 그래도 얼마 후면 모두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최고의 살충제는 추위일지도 모른다. 수만년 전, 인간도 그렇게 절멸했었다. 나는 라면이 끓는 이 짧은 시간에도 늘 엉뚱한 상상을 한다.

냉장고를 열고 김치를 조금 접시에 덜어낸다. 서두를 일은 없다. 나는 혼자이며 시간은 이 숲에서 정지했다. 나는 지금 당장 절멸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면이 불기 전에 나무 젖가락을 찾는다. 살아가면서 급한 일이란 그런 것이다. 라면을 앞에 두고 있을 때, 전화하는 자들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오늘은 아무도 저주 받지 않는다.

찬 물을 한 컵 미리 떠다놓고, 나는 위성 방송을 켠다. 영화를 하고 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다. 아니 동물원 옆 미술관인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새까만 라면 발을 입에 문 채, 갑자기 송선미라는 배우가 떠오른다. 대사를 엄청나게 어색하게 하던 배우. 그때 내 곁에 있던 그녀와 내가, 마구 웃던 기억이 난다.

그래, 그날 우리는 압구정동의 보세 집에서 안성기가 입었던 스웨터와 똑 같은 것을 샀었지. 가슴에 스웨터를 들이밀며 짓던 순백의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차가운 물로 입안을 헹구며 기억까지 덜어낸다. 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소멸된 것이다. 라면이나 먹자. TV를 끄고 Diana Krall 의 CD를 고른다.

자, 이제부터 자유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아무 것이나 해도 된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나는 창을 열고 뽀송뽀송한 바람을 초대한다. 운동장에는 산비둘기 한 쌍이 모래를 쪼고 있다. 청서 한 마리가 잣을 물고 거꾸로 나무에서 내려온다. 매미가 느린 템포로 운다. 구름이 걷히는지, 산너머에서부터 갑자기 모카신 골드로 밝아진다.

지금은 2004년 9월 1일 수요일 정오.
모처럼 완전한 하루다. 오후에도 찾아오는 이가 없기만을 바랄 뿐, 나는 정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www.allbaro.com
0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포인트 81,347
가입일 :
2004-02-26 08:43:02
서명 :
미입력
자기소개 :
미입력

최신글이 없습니다.

최신글이 없습니다.

댓글목록 7

라니님의 댓글

정오를 정모 자로 잘못 봤어요... ^^

그래도..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여백님의 댓글

내가 심들적
아무말 없이 싸구려 시가하나 입에 물려놓고 갔던 친구가 생각나네...

따가운 가을 햇볕에
흥건하게 땀 한바가지 흘리고 난뒤
단내 나는 입에 피워문 담배...

으~~음
달콤 쌉싸름..

명긴님의 글을 읽다보뉘.. 예전 친구도 나도 심들적
친구와 아무말 없이 서로 담배맛만 감상했던 기억이...
-,.-"

김명기님의 댓글

머지 않아 정모에 나오시겠군요. ^~^ 케이먹 정모도 참 재미나더군요. 저도 조만간 정모에 나가 볼 생각입니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김명기님의 댓글

친구는 그저 말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친구가 최고... 담배 맛은 구수함을 정점으로 하고 있지요... 이래서 담배를 못 끊고 있지요.

아직도 담배를 피우십니까? 하기에...
네. 쓸데 없는 결심 같은 것은 안할 예정입니다. 그랬지요. ㅎㅎ

여백님의 댓글

흐흐흐
전 언제 부로 금연을 선언했는데..
벌써 오늘 오전동안 두갑째 개봉했슴다..
-,.-"

내일은 꼭 끊고 말리...
담배만 끊음 울앤 바로 오토바이 사준다고 했는데...
-,.-"
떱떱...

김명기님의 댓글

저런 저런 담배보다 오토바이가 더 위험한 것은 아닐지? 우리땐 '과부틀' 이라고 했는데...

넘힘든하루님의 댓글

큰 쉼호흡으로 폐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 넣어 봅니다.
아주 천천히.. 다시 잘 뛰어주길 바라며.^^

전체 50,528 건 - 8 페이지
제목
재미솔솔(시니) 3,167 0 0 2004.08.15
김명기 800 0 0 2004.08.16
정소영 712 0 0 2004.08.16
잿빛하늘 776 0 0 2004.08.16
김성용 814 0 0 2004.08.17
향기 2,873 0 0 2004.08.17
향기 824 0 0 2004.08.17
팀장님 800 0 0 2004.08.17
이동준 632 0 0 2004.08.17
유츠프라카치아 649 0 0 2004.08.18
송권재 689 0 0 2004.08.18
하양이 626 0 0 2004.08.18
김정희 725 0 0 2004.08.18
김성용 1,176 0 0 2004.08.18
.maya 697 0 0 2004.08.18
잿빛하늘 716 0 0 2004.08.19
여백 1,100 0 0 2004.08.19
이희승 834 0 0 2004.08.19
여백 747 0 0 2004.08.19
영환군 999 0 0 2004.08.19
젤리톤 752 0 0 2004.08.20
박노민 900 0 0 2004.08.21
영환군 802 0 0 2004.08.21
영환군 1,842 0 0 2004.08.22
유츠프라카치아 626 0 0 2004.08.23
TheAnd 683 0 0 2004.08.23
박성진 595 0 0 2004.08.24
막강전투조 630 0 0 2004.08.24
영환군 1,733 0 0 2004.08.25
영환군 1,930 0 0 2004.08.25
여백 641 0 0 2004.08.25
.maya 724 0 0 2004.08.25
김현상 633 0 0 2004.08.25
경화 684 0 0 2004.08.25
향기 792 0 0 2004.08.25
장원 734 0 0 2004.08.25
김성용 698 0 0 2004.08.26
잿빛하늘 822 0 0 2004.08.26
영환군 1,538 0 0 2004.08.27
유츠프라카치아 755 0 0 2004.08.27
anotherday 715 0 0 2004.08.27
주혜범 1,198 0 0 2004.08.27
김명기 785 0 0 2004.08.27
박기근 669 0 0 2004.08.27
김명기 829 0 0 2004.08.28
김명기 1,534 0 0 2004.08.30
영환군 1,743 0 0 2004.08.30
백호 633 0 0 2004.08.30
김명기 1,540 0 0 2004.08.31
모노3020 806 0 0 2004.08.31
housegirl 840 0 0 2004.08.31
원똘 792 0 0 2004.09.01
이연경 735 0 0 2004.09.01
조범석 872 0 0 2004.09.01
김명기 1,442 0 0 2004.09.01
여백 1,031 0 0 2004.09.02
여백 996 0 0 2004.09.02
forever 689 0 0 2004.09.02
여백 946 0 0 2004.09.02
영환군 901 0 0 2004.09.03
영환군 1,672 0 0 2004.09.04
정현식 593 0 0 2004.09.04
박일남 646 0 0 2004.09.05
원똘 697 0 0 2004.09.05
김성용 676 0 0 2004.09.05
김재만 613 0 0 2004.09.06
오드리 724 0 0 2004.09.06
김성용 691 0 0 2004.09.06
김성용 1,011 0 0 2004.09.06
anotherday 615 0 0 2004.09.06
정현식 569 0 0 2004.09.06
조광제 616 0 0 2004.09.06
나라 1,720 0 0 2004.09.07
leehyunhee 642 0 0 2004.09.07
젤리톤 722 0 0 2004.09.07
영환군 1,566 0 0 2004.09.07
-별이- 608 0 0 2004.09.08
잿빛하늘 918 0 0 2004.09.08
★루 1,843 0 0 2004.09.08
여백 798 0 0 2004.09.08
★루 642 0 0 2004.09.08
.maya 761 0 0 2004.09.08
컬러닥터 965 0 0 2004.09.08
원똘 714 0 0 2004.09.09
★루 930 0 0 2004.09.09
김명기 1,647 0 0 2004.09.09
김영권 3,815 0 0 2004.09.09
김영권 17,184 0 0 2004.09.09
향기 749 0 0 2004.09.09
향기 1,065 0 0 2004.09.09
효효! 958 0 0 2004.09.09
-별이- 783 0 0 2004.09.09
여백 1,531 0 0 2004.09.10
hongwu 1,255 0 0 2004.09.10
영환군 1,789 0 0 2004.09.10
김명기 1,820 0 0 2004.09.10
.maya 860 0 0 2004.09.11
나우누리 650 0 0 2004.09.11
유희조 930 0 0 2004.09.11
.maya 677 0 0 2004.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