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입이 짧은 것일까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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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5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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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범 님께서 며칠 전에 올리신 글을 오늘 다시 읽어보다가 문득 옛날 기억이 되살아 났습니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타이핑을 시작해 봅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부터 부쩍 친해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일찌기 입학할 무렵부터 다른 친구를 통해 안면을 익히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만나 교분을 나누는 처지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에 대한 중학교 동창들의 우호적이지 않은 평판에 영항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학교 운동장이나 쉼터, 복도에서 여럿이 자주 어울리는 동패에 함께 속해 있으면서도
그와 따로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학년에 올라가서 한 반이 되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와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교실 뒤편에 앉은 놈들끼리는 오목 놀이가 한창 성황을 이룰 때였는데
제가 북쪽 분단의 강자였고 그가 남쪽 분단의 챔피언이었습니다.
어느날 5교시 수업 시간에 짝끼리 자리를 바꿔 앉자마자 곧바로 공책에 줄을 긋고나서
마침내 삼개월의 대정정 끝에 우리 반의 오목 챔피언을 결정하는 역사적인 대회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관중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체로 저 무렵의 오목 놀이는 수업 시간 중에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대가 정해지면 자리를 바꿔 앉아서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경기에 돌입했습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엔 저짓 말고도 할 일이 태산이라 오히려 짬을 내기 어려웠습니다.
그날의 첫 번째 대결에서는 제가 4승 7패로 졌습니다.
쌍삼이 허용되지 않는 오목이었는데 그놈은 정말 고수더란 말입니다. ㅋ
한데, 대국이 끝나자마자 그놈이 던진 말에 갑자기 자극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놈이 말하기를, 자기 평생에 오목을 두면서 한놈에게 세 판 이상 저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제놈이 승부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듯 비분한 표정으로 리턴 매치를 제안했습니다.
화덕에 휘발유 끼얹는 그놈의 제안을 제가 거부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고 느껴서 즉시 재대결에 응했습니다.
재대결에 합의하자마자 둘이서 각자의 공책 뒷장에 열나게 줄을 긋느라 수업이 끝난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마침 자리를 다시 바꾸러 온 짝놈이 보이길래  한 시간 더 할 것이라면서 되돌려보냈습니다.
6교시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대국에 돌입했는데 전과 마찬가지로 열한 판을 두기로 했습니다.
제한 시간은 따로 없었고 서로 양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시간을 썼기 때문에,
게다가 두 번째 대결이다보니 피차가 한층 신중한 자세로 대국에 임했기 때문에,
결국 50분을 거의 다 쓰고서야 승부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대결에서도 제가 5승 6패로 졌습니다.
저는 본래 오목이든 바득이든 그런 류의 놀이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집에 바둑판도 없었습니다.
저희 집안 전체를 살펴봐도 바둑을 취미로 삼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화투조차 전혀 치지 않습니다. 물론 집에 화투 쪼가리도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 화투 놀이를 하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목 놀이는 학교에서 시간을 때우는 데는 꽤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나름 유용하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자꾸 하다보니 제가 오목 놀이에 괜찮은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동안의 누적된 대전 경험을 통해 나름대로는 능력에 대한 자부심도 꽤 견고해져 있던 차였는데,
그날 그놈과 벌인 두 차례 대결에서 모두 패하게 되자 삶에 회의를 느낄 지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망할 놈은 오히려 한 술 더 뜨더란 말입니다.
자기는 결과에 전혀 승복할 생각이 없으니 저녁에 집에 가서 한 판 더 하자는 제안을 천연덕스럽게 내놓았습니다.
저도 열이 뻗친 나머지 즉시 그러자고 했고 하교하면서 집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그놈 집으로 따라 갔습니다.
'저택'의 대문에 들어서자 미친듯이 짖어대는 송아지만한 쉐퍼드 쉐키의 아랫배를 예리하게 걷어차주고도
근 이십여 미터를 더 들어가서야 현관문에 닿을 수 있었는데, 거기 나와 계시던 모친께 인사를 여쭙자마자
곧바로 그놈 방으로 뛰어들어가 책가방을 던져놓고 이번엔 종이 눈금이 아닌 진짜 바둑판을 앞에 놓고 막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모친께서 식모 아주머니와 함께 호화찬란한 저녁상을 한 상 차려 넣어주셨습니다.
친구가 왔다고 특별히 음식을 더 장만할 시간은 없었으니 짐작컨대 평소 그놈 집의 밥상이라 여길만 했는데
그 형상이 참으로 놀라워서 이건 도저히 보통의 가정집 저녁 밥상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서 지금은 밥상의 면면을 자세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또 그 뒤로도 그놈 집에서 여러 차례 밥을 먹었기 때문에 기억이 섞여버려
그날 밥상의 모습만을 정확하게 구별해서 떠올리기도 어렵습니다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몇 가지 충격적인 반찬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놀랐던 것은 그댁의 김치였습니다.
옛날 촌놈들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김치에 습관적으로 젓가락을 옮기기 마련인데
저도 그때 밥을 먹으면서 김치를 한 토막 집어 무심코 입으로 가져다 넣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맛이 너무 비리고 역겨워 차마 씹는 것조차 어려워서 그냥 넘기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할 수 없이 물을 한 모금 털어넣고서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약한 헛구역질 비슷한 증상도 뒤따라 한 차례 겪었고...
그러자 제 행동을 보고 있던 그놈이 시익 웃으면서, "우리집 김치는 아무나 못 먹지."하더란 말입니다.
짐작 가는 것이 있어 소담스럽게 담아놓은 김치 접시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큼지막한 명태 토막이 중간 중간에 박혀 있더란 말입니다.
제가 깜짝 놀라면서 "대체 이걸 왜 김치에 넣었다냐?"했더니, 그놈이 말하기를,
"모친께서 경남 진주 쪽이 고향이신데 그쪽에선 원래 김치에 명태를 넣는다더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자기는 어려서부터 그 김치만 먹어왔기 때문에
이쪽 지방의 김치는 너무 밋밋하고 심심해서 오히려 맛이 떨어진다고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재차 김치와 그 옆에 있는 깍두기를 살펴보았는데,
깍두기에는 코 풀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굴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습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싹 달아나는 걸 확연히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때 밥상 위에는 명란젓도 있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젓갈도 한 종지 올라와 있었습니다.
저는 본래 젓갈을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또한 한 번 맛을 보곤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놈이 재미있어 하면서 놀리듯 한 마디 던졌습니다. 치명적인 한 마디를.
"산적처럼 생긴 놈이 입은 몹시도 짧구나!"
아마 지금도 그렇겠습니다만, 옛날에 제가 어렸을 적에는 반찬 투정을 하거나 음식을 가려먹는 행동에 대해
사내답지 못한 잔망스러운 짓이라는 일종의 도덕 관념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그때 그놈이 제게 던진 말은 그런 면에서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모욕감을 느낄 만한 발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놈은 보란 듯이 젓갈을 떠서 입어 넣고 다람쥐 새끼처럼 오물거리며 약을 올리더란 말입니다.
저녁 밥을 먹을 때 그놈의 구강신공에 당한 치명적인 내상 때문이었는지
상을 물리고 곧이어 벌어진 '오목대전'에서도 저는 기어이 3승 8패의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지름길을 찾아 위태로운 하천 둑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굳게 결심하기를,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가도 늦은 것이 아니리라'하면서 새삼 결의를 다지고
권토중래할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면서 훗날을 기약했더랬습니다.
그 뒤로도 그놈과 저는 시간만 나면 수업 시간에 들러붙어 오목 놀이에 열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승패가 비등해지고 제가 승리하는 날이 많아지긴 했지만
졸업할 때까지 그놈이 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일관된 우세를 점하진 못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그러니까 3학년이 되어 다른 반으로 갈라졌을 무렵에는,
그놈이 "쌍삼도 허용하자"며 룰을 개정하고부터는 오히려 다시 패하는 날이 많아졌던 암담한 시절도 겪었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에는 근교 농촌에서 과수원을 크게 하는 촌놈 친구 집에 함께 놀러가게 되었는데
그 촌놈은 방학만 되면 본가에서 나와 과수원에 딸려 있는 집에서 창고를 지키며 지내는 처지였습니다.
그날 거기서 오후 내내 놀다가 이윽고 해가 넘어가자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촌놈이 직접 저녁상을 차려왔는데 당대 시골 밥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밥상이었습니다.
토장국에 김치와 깍두기, 고추장과 된장에 번갈아 박아넣었다 꺼낸 무우 장아찌, 오이 장아찌
거기에 날된장과 풋고추가 한 사발 곁들여진 반찬이 전부였고
진짜 옛날 사기 밥그릇(굉장히 큽니다.ㅋ)에 고봉으로 퍼담은 보리밥이 함께 올라왔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그 지방 토박이 친구놈들은 얼싸좋다 게눈 감추듯 밥을 퍼먹고 있었는데
함께 간 그놈만은 시종해서 깨작거리며 도무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심 뭔가를 잔뜩 기대하면서 밥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계속 그를 힐끗거리던 제가 느닷없이 이르기를,
"아따! 이 쉐키! 음식이 입에 맞질 않아서 목으로 넘기지도 못하는구나! 사내 쉐키가 입은 짧아서....  "
그러자 그놈이 흠칫하다가 갑자기 물주전자를 들어 밥에 물을 들이붓기 시작하더니
곧바로 숟갈로 푹푹 퍼서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것이었습니다. 반찬도 거의 안 쳐먹고.
저랑 다른 친구들은 계속 킬킬거리면서 그놈 하는 꼴을 지켜보았는데 사투 끝에 겨우 밥그릇을 비워낸 그가 이르기를,
"나는 본래 네놈처럼 입이 짧은 것은 전혀 아니고, 다만 배가 고프지 않아 잠시 속도를 늦춘 것일 뿐이니라."
하지만 그놈은 몇 시간 후에 시외버스를 타고 자갈 투성이 비포장 도로를 달려 시내로 돌아오면서
속이 계속 부대껴서 내릴 때까지 창문 밖으로 주둥이를 내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달리는 버스옆 길가에 서 있었을 어떤 사람은 날벼락처럼 토사물을 흠뻑 뒤집어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그놈과 저는 학교는 달랐어도 나란히 서울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도 여기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실로 놀라운 내신성적을 갖고 있는데
저에 비하면 어림없었지만 그놈도 웬만해선 만날 수 없는,
아마도 그 대학의 걔네 학과에선 거의 유일한, 저등급의 내신성적이었을 겁니다.
그놈이 형편없는 내신성적을 받게 된 것은 누구보다 제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무렵 '비진학 대상'이었기 때문에 학교에만 오면 아무 놈이나 붙잡고 놀기 바빴는데
하필이면 그놈이 저랑 친해지는 바람에 덩달아 쓸 데 없는 객기에 젖어들어 결국 그런 내신성적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졸업하던 그해 겨울의 어느날 저녁에, 그놈과 함께 친구 넷이서 모처럼 시내의 한 술집에 들어섰습니다.
그 무렵에는 친구 여럿이 어울려 종일토록 시내 음악다방을 이잡듯이 찾아다니며 놀던 시절이었는데
그날따라 갑자기 그놈이 술을 먹자고 대낮부터 떼를 쓰다가 날이 저물자마자 우리를 이끌고 간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우리 또래의 시야에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묵직한 분위기의 술집이었는데 내부 치장이 꽤 낯설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놈이 웨이터를 청하더니 친구들 의견도 물어보지않고 대뜸 뭐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잠시 후에, 작은 항아리에 가득한 동동주가 표주박과 함께 나타났고
곧이어 커다란 타원형 접시에, 언뜻 보기엔 마치 훗날의 라볶이처럼 보이는, 안주가 올라왔습니다.
그걸 보자마자 성질 급한 한 놈이 대뜸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는데
처음엔 매콤하고 달착지근한 맛에 별소리 안 하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호기심이 폭발한 다른 놈들도 다투어 집어먹게 되었는데 물론 저도 한입 가득 털어 넣었습니다.
물오징어 무침은 분명히 아닌데 약간 꼬들거리면서 물렁뼈도 씹히는 것이 도통 종목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촌놈들 노는 꼴을 빙글거리며 지켜보던 그놈이 마침내 이르기를, "홍어 무침이니라~"
깜짝 놀란 제가, "뭐시라! 가오리 비슷한 생선 그거 말이냐? 에엑 퉤~"
그놈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삭힌 홍어를 보면 아주 기절하겠구나~ "라며 한참을 킬킬거렸습니다.
존심에 위기가 엄습하자 짐짓 대범해진 제가 재차 젖가락을 놀리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다른 놈들도 뒤질세라 젖가락을 부지런히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술잔도 한순 돌아가고 홍어무침도 가열차게 씹어대면서 본격적으로 음주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처음 먹을 때는 그야말로 존심 유지 차원에서 먹기 시작했는데
자꾸 먹다보니 그것도 나름 맛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중에는 꽤 즐기는 상태가 되더란 말입니다. ㅋ
그날 늦게까지 먹다가 모처럼 거나하게 취해서 술집을 나섰는데,
한겨울의 칼바람에도 훈훈하고 알딸딸한 기분에 마냥 기끼워져서 느긋하게 집으로 걸어올라 왔습니다.
그런데 대문을 열고 내방에 들어서자마자 후끈한 공기가 그날따라 견딜 수 없이 답답하게 느껴지면서
드디어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하는데 그걸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가만히 누워 진정되길 기다려봤지만,
마침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되자마자 나는 듯이 마당 건너의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동동주와 함께 쏟아지는 홍어무침 조각을 진저리나게 뱉어내면서 피처럼 붉은 마음으로 결심하기를,
"내 다시는 이 망할 것을 먹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더랬습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제가 술을 먹기 힘든 체질이라는 것을 아직은 확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저희 조부나 부친께서 일세에 보기 힘든 두주불사의 대한량이셨기 때문에 나도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객기를 앞세운 나머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주량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툭하면 무리해서 과음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거의 예외없이 다시 뱉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화장실에서 판단하기에는, 안주가 워낙 비호감이라 이런 일이 있는 것이라 단정하고 말았는데,
훗날 돌이켜 생각컨대, 결국엔 저 일도 제가 바닷물고기를 날로 먹지 않는 습관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경험이라서
죄없는 홍어에겐 다소 미안한 일이겠지만, 저는 별다른 미련이나 회한이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ㅎ
('79~'81년 무렵까지도, 바닷가 동네를 제외하면, 바닷물고기를 날로 먹는 풍속이 거의 없었던데다
지금처럼 활어 운반 시스템도 없었고 심지어 냉장 시스템조차 매우 빈약했던 시절이라서,
게다가 제가 살던 지방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내륙에 속하는 지역이다보니,
20만 남짓한 도시 전체에서 '횟집'이라고 해봐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희소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물고기를 날로 저민 음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먹는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대다수 또래들도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요즘 우리 나라에서, 특히 내륙의 대도시나 농촌 지역에서조차,
물고기를 날로 먹는 풍속이 횡행하는 현상을, 저는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크흐흐~
그런데 그놈은 그때도 벌써 횟집에 여러 번 가보았다고 자랑삼아 얘기하곤 했습니다.
비린내 나는 그걸 어찌 날로 먹느냐고 힐난조로 물어봐도
그놈은 언제나, '직접 먹어보기 전에는 그 맛을 설명할 수 없니라'
또는 '무릇 사내라면 육회, 생선회를 가리지 않고 날고기를 먹을 줄 알아야 진정한 사내이니라'하면서
한껏 거들먹거리곤 했는데, 아마도 옛날 과수원에서의 참담한 굴욕을 염두에 둔 말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며칠 후에 제가 무심결에 동동주와 홍어 무침을 먹고 토한 얘기를 누설하고 말았는데
그걸 듣자마자 그놈이 길길이 날뛰며 흥겨워하는 꼴을 그저 비감한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태가 역전되었고 제가 또다시 '입 짧은 놈'의 멍에를 둘러쓰고 말았습니다.
'청산의 땔감이 다하지 않는 한, 언젠가 이 원수를 갚을 날이 오고 말리라'
마음 속에 그날의 일을 깊히 묻어두고 그저 훗날을 기약할 따름이었습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비통하며 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청소년도 아니고 어른은 더더욱 아니었던 저 시절엔 그저 '존심'과 '체면'만을 먹고 살던 시절이라서...
좋은 시절도 한 순간이라, 어느덧 봄이 가까워졌고 그곳(그놈에겐 고향ㅋ)을 떠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놈은 부친께서 일찌기 일제 강점기 말에 왜국 동경의 한 대학에 유학하셨고
해방 후엔 서울의 유력한 사립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해서
나중엔 제가 살던 도시의 국립 대학에서 학장까지 역임하다가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놈 집안은 그 도시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큰 문중 세력인 데다
근동에서 감히 견줄 상대가 없는 대지주 집안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호강대족'에다가 태생적으로 부유했다는 말씀입니다. ㅋ
상경해서 대학에 입학할 때에도 저는 가까스로 학교 기숙사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그놈은 벌써 2월 중순에 미리 올라와서 자기네 학교 옆동네(연희동ㅋ)의 최고급 하숙집을 그것도 독방으로 구해서
월 17만 원이나 내야 하는 일종의 '귀족 하숙'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기숙사에 매달 납부하던 돈이 2만9천5백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거액이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 무렵의 지방 국립대학에서 한 학기 등록금이 그 비슷한 규모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게다가 그놈은 한 달 용돈이 무려 15만 원이나 되었는데 '80년대 초반의 학생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규모였습니다.
입학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에 기숙사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제아무리 빠릿한 척을 해도 촌놈은 별 수 없이 촌놈이라, 고삐리 시절과는 사뭇 달라진 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겨우 적응이 되었다싶었을 무렵에 딱 맞추어 전해진 소식이었습니다.
역시 그놈이었는데 죽도록 보고 싶으니 금요일 오후에 신촌 쪽으로 건너와서 얼굴좀 보자는 얘기였습니다.
저역시 그놈의 생사가 궁금했던지라 토요일 수업이 있었음에도 선뜻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날 신촌 로터리에서 만나자마자 다방을 찾아 들어가 근 한 달만에 해후의 정을 나누다가
어느덧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그놈 하숙집으로 함께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집은 하숙집이라기엔 지나치게 고급 주택이었고 심지어 외제 자동차도 대문 앞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시절엔 영업용이 아니면 '포니'조차 주택가에선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던 걸 감안하면,
그놈 말처럼 정말 부잣집은 틀림없이 부잣집이로구나하면서 대문에 들어섰습니다.
하숙생도 단 세 명이었는데 다른 둘은 대학원생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놈에게 이런 정황을 물었더니, 그놈이 말하기를, 돈 때문에 하숙을 하는 집은 전혀 아니고
아들과 며느리, 딸이 함께 살다가 연전에 미국으로 모두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집에는 노부인과 아직 학부생인 막내딸만 살게 되어 적적함을 덜어보고자 하숙을 시작하게 된 집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방범상의 이유도 있는 걸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누가 봐도 부잣집 중년 여성처럼 보이는 그댁의 아주머니께서는 일개 하숙생 친구일 뿐인 저를 이상할 정도로 환대하시면서
저녁밥도 아주 풍성하게 차려주셨고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자주좀 놀러오라는 심상치 않은 말씀까지 건네주셨습니다.
원래 하숙집에서는 외부인이 들어와 노닥거리는 걸 탐탁치 않게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댁 아주머니의 호의적인 태도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던지라 제가 그에게 슬쩍 그점을 물었더니,
그가 이르기를, 원체 집에 사람이 없다보니 사람이 반가워서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라 전했습니다.
말이 좋아 하숙이지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은 전혀 아니고 그저 식구를 늘리고자 하는 일이라서
하숙생들을 진짜 가족처럼 대하면서 그들의 친구가 방문을 해도 한결같이 대하신다는 얘기도 덧붙였습니다.
그 말을 듣던 제가 반색하며 "그으래? 여기서 한 이틀 개기다 가도 되겠네?"했더니
그놈이 실실 웃으면서 "아마 한 달도 괜찮을 거다."하더란 말입니다.
과연 그놈 말대로 그날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그집에 눌러 있었는데도
아주머니께서는 언제나 호의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놈을 따라 낮엔 종일토록 밖에 나가 서울 시내를 쏘다니며 놀다가 저녁 늦게 귀가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웬만하면 밥은 집에 와서 먹으라고 잔소리 비슷한 말씀까지 주시더란 말입니다.  ㅋ
그놈은 출생에 특별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나면서부터 집안에서 매우 애지중지하면서 키워졌던 놈이라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일생 생활의 모든 면에서 당시의 보통 또래들과는 사뭇 다른
어찌 보면 매우 까탈스러운 취향과 습성을 익혔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런 놈조차 별 스스럼없이 자기집처럼 여기면서 생활하는 걸 보면 보통 좋은 하숙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에 등교를 앞두고 방에서 함께 밥상을 받아 먹던 중에 그놈이 문득,
"이 집은 다 좋은데, 밥이 너무 맛이 없지 않냐?" 라고 아쉬워하길래,
제가 펄쩍 뛰며 "맛만 좋구만. 고기 반찬도 무척 많고." 뒤이어 말을 이었는데,
"건더기가 이렇게 많이 들어간 쇠고기 무우국, 이거 보통 하숙집에서는 못 먹는 거여!
이 쉐키가 복에 겨운 나머지 이젠 별 시답지 않은 소리까지...."라며 제가 면박을 주었더니,
"알고보니 이댁 사람들은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아주머니께서 순전히 하숙생들을 위해서
육류, 생선을 손질해서 반찬을 만드시는데 아무래도 본인들은 잘 먹지 않는 음식이라 그런지,
조리 방법이나 간을 맞추는 일에 있어서 조금씩 어긋나는게 보인단 말이다.
내 말은 그점이 몹시 아쉽다는 얘기로다"
그러자 제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선언하기를, "아따! 사내 쉐키가 입은 짧아서리... "
실로 몇 달만에 형세를 역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맞았는데 그걸 놓칠 리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러자 아차!하는 표정으로 당황해하던 그놈이,
"나는 너처럼 못 쳐먹거나 안 쳐먹는 게 아니라 그냥 맛이 없다고 했을 뿐이노라!"하길래,
제가 계속 다그치며 "이 정도 음식을 보고 맛이 없다고 느낄 정도면 그게 바로 입이 짧다는 명백한 증거이니라!"했더니
그놈이 다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뭔가 말할 듯 머뭇거리더니 그냥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입 짧은 놈'의 멍에는 다시 그놈에게 돌아갔고 저는 실로 몇 달만에
충만한 존심을 만끽하면서 무려 사흘이나 머물던 그곳을 떠나 버스를 타고 우리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당시 서울 시내 간선도로의 시내버스가 다 그렇듯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 나머지
그날 1교시는 그냥 제낄 수밖에 없었는데도 나름 상쾌하고 깔끔하며 명랑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중략)
그로부터 칠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입 짧은 놈"의 타이틀을 그놈에게 안겨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살 속에 낙인을 찍어놓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보냈던 실로 간단치 않은 세월이기도 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사했던 모 재벌그룹 생활을 몇 달 하지도 않고 때려치운 그놈이
갑자기 언론고시(기자시험)를 본다면서 신림동 고시촌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었는데
마침 그 무렵에 제가 신혼 살림을 그쪽에 차렸기 때문에 옛날 고삐리 시절처럼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그놈은 옛날 귀공자 시절의 흔적은 간 데 없이 그저 추레하고 볼품 없는 수험생이미지로 늙어가고 있었는데
고시원 밥이나 녹두거리 음식점의 밥을 먹는 것이 영 시원찮았는지 툭하면 우리 집에 예고도 없이 나타나선
매운 라면과 시큼한 집김치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습니다.
참으로 격세지감인 것이, 옛날에 그놈은 라면이 불량식품이라며 입도 안 대던 놈이었는데
어느덧 라면조차 귀하게 여기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 또래의 청년으로 다시 태어나 있었습니다.
그 몇 년 전에, 넉달의 시차를 두고 입대했기 때문에 비록 부대는 달랐지만 같은 시기에 군 복무를 했는데
어느날 카츄사 병사 복장을 한 그놈이 저희 부대로 면회를 왔습니다.
동기들 소식이나 서로의 부대 생활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놈이 갑자기,
'입대 초기에 훈련소에서 먹는 것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해서 그야말로 죽다 살아났다'는 얘기를
동정과 공감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내게 쏟아놓길래,
제가 거룩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나는 훈련소 밥이 정말 맛나더라.
짬밥이 이리도 맛있는 줄 진작에 알았다면, 아예 말뚝을 박았을 텐데..." 라고 이죽거렸더니,
그놈이 신경질을 내면서 "지금도 늦지 않았노라. 하사관 지원이라도 해봐라, 개 자식아!"하더란 말입니다.
이리하여, 그놈이 '입 짧은 놈'이라는 기존의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고 저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역시나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오는 법이라...
고삐리 시절과는 달리 대학 생활, 군 생활, 사회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어릴 적부터 저렴한 식단에 단련되어 있었던 제가 고품위의 식사에만 길들여진 그놈에 비해
한결 유연하고 폭넓은 식습관을 과시할 수 있었는데 그놈은 그점을 몹시도 속상하게 여겼더랬습니다.
그런데 칠팔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후에, 고시원 생활에 찌든 그놈이 오랜 방황 끝에
어느덧 면모를 일신하면서 놀랍도록 유연해지고 한결 관대해진 식습관을 자랑하는 단계에 도달했더란 말입니다.
이에 따라 저는 그 즈음에 진짜 심각한 위기 의식에 휩싸이고 말았는데,
비록 제가 오랫동안 시중의 저렴한 음식 문화에 상대적인 친화성을 드러내고 우수한 적응력을 보여주었다지만
사실은 그때까지도 육류, 생선을 먹는 일에는 여전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터라,
그냥 육류, 생선만이 아니라 육회, 생선회에 두루 익숙한 그놈이 이제 저렴한 식단까지 능란하게 섭렵하는 단계에 도달하자,
'입 짧은 놈'의 멍에가 또다시 내게 덧씌워지는 참담한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피차가 지난 십여 년간 줄기차게 벌여온 '입 짧은 놈' 낙인찍기 사업에 대해,
그놈의 식성과 적응력이 달라지면서 한결 마음이 여유로워진 탓인지는 모르지만
저랑은 다르게 그 오래되고 첨예한 사안에 대해 상당히 무감각해져 있다는 걸 알아채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저는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조심,
행여나 그 놈이 그 문제를 다시 떠올리지 못 하도록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매너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혼집에 쳐들어와서 밥 먹여달라는 행패를 일삼아도 그저 묵묵히 감내할 뿐이었습니다.
(참고로, 저희 마누라와 그놈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라는 거. 크흐흐~)
그해에 두 군데의 언론사 시험에 실패하고 세 번째로 응시한 모 공영방송 공채 시험에 합격해서
드디어 '수습기자'로 입사하게 된 그놈은, 부모의 도움으로 근처의 신축 다세대 주택에 6천 만원 전세로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초짜 수습기사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대번에 어디서 여자 친구도 하나 구해서 연애질을 시작했는데
알고보니 그 여성은 전문적인 수준의 한식 조리 기술을 갖춘 사람이었더란 말입니다. ㅋ
주말은 물론이고 가끔은 평일 저녁에도 그놈이 갑자기 불러서 마누라랑 함께 찾아가보면,
그놈의 여자 친구가 주방에서 지지고 볶아낸 진수성찬이 한 상 가득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그걸 보고 감탄과 찬사를 쏟아낼 때면 그놈은 언제나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거만을 떨어대곤 했습니다.
제가 여러 차례 그놈 여자친구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어봤는데 정말 맛이 좋았더랬습니다.
저희 부부가 보기에도 그 여성은 인상이 정말 좋아보였고 품성도 원만해 보였는데
예기치 않게도 그놈 모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결혼에는 이르지 못하고 끝내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 처음에 그 여성을 만나본 그놈 모친께서 인상이 너무 좋다 하시면서
친히 그집의 열쇠를 건네주며 틈틈히 집에 와서 자기 아들좀 살펴달라고 부탁까지 했던 사이였다는 겁니다.
(사실, 제가 품고 있는 관념으로 보자면, 아들의 여자친구가 아무리 흡족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래도 엄연히 혼전인데, 열쇠까지 건네면서 아들집의 살림을 살펴달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은
상식과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좀처럼 하기 힘든 사고 방식이라는 생각을 당시에 속으로 했더랬습니다.ㅋ)
이건 누가 봐도 그 여성을 예비 며느리로 받아들인다는 틀림없는 의사 표시로 보였는데,
어느날 모친께서 다니는 절의 중놈이 사주를 보다가 궁합이 나쁘다는 말을 건넨 것이 빌미가 되어
모친의 태도가 갑자기 표변해서 모질기 이를 데 없는 강경한 태도로 그놈에게 헤어질 것을 재촉하기 시작하자
근 일 년을 완고하게 버텨내던 그놈이 마침내 어느날 오후에 돈암동 태극당 근처 찻집에서 그녀를 만나
공식적인 교제 종료를 통보하고 그날로 결별하고 말았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말을 꺼낼 자신이 없다면서 난 데 없이 저를 끌고 나가려고 하길래,
다른 이가 끼어들 자리가 전혀 아니라는 제 강경한 의사를 여려 차례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막무가내로 쳐들어와서 저를 반강제로 끌어내어 이별을 통보하는 현장에 함께 데리고 나가는 바람에,
그토록 서로를 애틋해하던 두 남녀가 이별하는 장면을 가슴 아프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그 여성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얼굴 표정이 이십 삼 년이 흐른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하기만 합니다.
삼류 일일 연속극에서나 볼 수 있는 황당하고 가당찮은 일이
막상 제 주변에서 현실이 되어 나타나는 일련의 장면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그에 대처하는 합리성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견고한 의지를 품고 철저하게 실천해낸다는 것이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몹시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친구놈의 못난 행동을 통해 뻐져리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친구의 사생활에 개입할 수 있는 어떤 한계와 제약은 분명히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옳다고 여기는 방법도 물론 있었지만 그에게 선뜻 그대로 하라고 강권하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치졸하고도 추잡해보이는 과정에 대처하는 친구놈의 실망스러운 의식과 태도를 묵묵히 지켜보면서
십수 년이 넘도록 견고하게 쌓아올렸던 의리감과 우정이 차갑게 식어가는 섬뜩한 감정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놈과 진탕 마신 끝에 자정을 넘겨 귀가하자마자
제 처에게 처음으로 이런 속내를 드러내 보였더니 마누라가 단호한 목소리로 이르기를,
자기는 이미 예전부터 그놈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 마음 속의 친구 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야만 할까 고민하던 저에게
그날 밤에 보여준 제 처의 단호한 태도는 나름 큰 용기로 다가왔습니다. ㅋ
하지만 인간 관계라는 것이 생각처럼 수월하게 조절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아니기 때문에
그 뒤로도 한동안 그놈이 자주 찾아오는데도 그걸 모질게 내치기는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그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친구인 저와 구체적인 갈등 관계가 발생한 것도 아니고
그저 겉으론 보이지 않는, 저 혼자만 가슴 속에서 그놈을 생각하는 관점과 태도가 달라진 것일 뿐이라서
그래도 친구라고 물색없이 자꾸 찾아오는 그놈에게 앞으로 아는 척하지 말라고 날벼락처럼 내뱉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ㅋ
한데, 정말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그놈이 처음의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직장 선배의 소개로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면서 어느날 제게 인사를 시키더란 말입니다. 크흐흐~
제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모친의 고매하신 궁합 판정은 받아봤냐?"했더니,
그놈이 쓴웃음을 지으며, "무지 좋댄다" 하더니, 다음달에 양가 상견례도 예정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아따! 정말 빠르네!"하면서 제가 그를 쳐다보는 순간, 속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무언가를 참아내느라
잠시나마 숨을 가다듬고 애써 딴 생각에 잠겨들어야만 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ㅋ
그놈의 새 여자친구는 지방 국립대의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해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경상도 사투리가 약하게 남아 있는 억양을 구사했고 외모도 매우 뛰어났으며 그야말로 '교양덩어리'였습니다.
예전 여자 친구에 비해 집안의 조건도 매우 좋은 편이라서(옛날 여자 친구는 편모 슬하의 가장)
그놈 모친께서 가히 흥겨워하실 만하다는 생각도 언뜻 들었습니다만,
문제는, 그놈의 진정한 속마음이야말로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넌지시 의중을 탐색했더니,
그놈이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그녀를 잊을 수야 없겠지. 하지만 이 여자하고도 그런대로 살아질 거 같긴 해."
(이 지점에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해 늦봄엔 서둘러 식을 올렸고 시부모의 뜻에 따라 그의 처는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몇 년 간, 그들 부부는 저희 부부를 수시로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곤 했는데,
역시나, 하늘이 무심치 않게도,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게도, 부인의 음식 솜씨가 완벽한 '꽝'이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음정과 박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음치, 박치가 있는 법이고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색맹 또한 생겨나기 마련인 것과 마찬가지로
음식의 조리에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도 존재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그놈 부인의 몹시도 창의적인 음식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놈은 시간이 날 때마다 제게 자기 부인의 음식 솜씨에 대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엄숙하고 근엄하게 이르기를, "먹어보니까 맛만 좋더라! 하여튼 애쉐키가 입은 짧아서..."
그 무렵 저는, 그놈의 결혼과 함께, 마침내 그 기나긴 싸움의 결말이 임박했다는 점을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놈은 지금의 처와 함께 사는 한, 언제나 '입이 짧은 놈'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말입니다.
따라서 저는 최종적으로 "입이 넓은 놈"으로 당당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놈이야말로 평생토록 "입이 짧은 놈"으로 살아가야 하는 엄중한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입이 짧은 놈'을 밝혀내는 오랜 다툼이 저의 승리로 종결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읽는 재미가 담겨 있다고는 보기 힘든, 그저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한심한 에피소드를
인내를 갖고 끝까지 읽어주신 유부방의 회원들께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타이핑을 시작해 봅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부터 부쩍 친해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일찌기 입학할 무렵부터 다른 친구를 통해 안면을 익히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만나 교분을 나누는 처지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에 대한 중학교 동창들의 우호적이지 않은 평판에 영항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학교 운동장이나 쉼터, 복도에서 여럿이 자주 어울리는 동패에 함께 속해 있으면서도
그와 따로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학년에 올라가서 한 반이 되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와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교실 뒤편에 앉은 놈들끼리는 오목 놀이가 한창 성황을 이룰 때였는데
제가 북쪽 분단의 강자였고 그가 남쪽 분단의 챔피언이었습니다.
어느날 5교시 수업 시간에 짝끼리 자리를 바꿔 앉자마자 곧바로 공책에 줄을 긋고나서
마침내 삼개월의 대정정 끝에 우리 반의 오목 챔피언을 결정하는 역사적인 대회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관중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체로 저 무렵의 오목 놀이는 수업 시간 중에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대가 정해지면 자리를 바꿔 앉아서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경기에 돌입했습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엔 저짓 말고도 할 일이 태산이라 오히려 짬을 내기 어려웠습니다.
그날의 첫 번째 대결에서는 제가 4승 7패로 졌습니다.
쌍삼이 허용되지 않는 오목이었는데 그놈은 정말 고수더란 말입니다. ㅋ
한데, 대국이 끝나자마자 그놈이 던진 말에 갑자기 자극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놈이 말하기를, 자기 평생에 오목을 두면서 한놈에게 세 판 이상 저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제놈이 승부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듯 비분한 표정으로 리턴 매치를 제안했습니다.
화덕에 휘발유 끼얹는 그놈의 제안을 제가 거부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고 느껴서 즉시 재대결에 응했습니다.
재대결에 합의하자마자 둘이서 각자의 공책 뒷장에 열나게 줄을 긋느라 수업이 끝난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마침 자리를 다시 바꾸러 온 짝놈이 보이길래  한 시간 더 할 것이라면서 되돌려보냈습니다.
6교시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대국에 돌입했는데 전과 마찬가지로 열한 판을 두기로 했습니다.
제한 시간은 따로 없었고 서로 양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시간을 썼기 때문에,
게다가 두 번째 대결이다보니 피차가 한층 신중한 자세로 대국에 임했기 때문에,
결국 50분을 거의 다 쓰고서야 승부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대결에서도 제가 5승 6패로 졌습니다.
저는 본래 오목이든 바득이든 그런 류의 놀이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집에 바둑판도 없었습니다.
저희 집안 전체를 살펴봐도 바둑을 취미로 삼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화투조차 전혀 치지 않습니다. 물론 집에 화투 쪼가리도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 화투 놀이를 하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목 놀이는 학교에서 시간을 때우는 데는 꽤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나름 유용하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자꾸 하다보니 제가 오목 놀이에 괜찮은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동안의 누적된 대전 경험을 통해 나름대로는 능력에 대한 자부심도 꽤 견고해져 있던 차였는데,
그날 그놈과 벌인 두 차례 대결에서 모두 패하게 되자 삶에 회의를 느낄 지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망할 놈은 오히려 한 술 더 뜨더란 말입니다.
자기는 결과에 전혀 승복할 생각이 없으니 저녁에 집에 가서 한 판 더 하자는 제안을 천연덕스럽게 내놓았습니다.
저도 열이 뻗친 나머지 즉시 그러자고 했고 하교하면서 집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그놈 집으로 따라 갔습니다.
'저택'의 대문에 들어서자 미친듯이 짖어대는 송아지만한 쉐퍼드 쉐키의 아랫배를 예리하게 걷어차주고도
근 이십여 미터를 더 들어가서야 현관문에 닿을 수 있었는데, 거기 나와 계시던 모친께 인사를 여쭙자마자
곧바로 그놈 방으로 뛰어들어가 책가방을 던져놓고 이번엔 종이 눈금이 아닌 진짜 바둑판을 앞에 놓고 막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모친께서 식모 아주머니와 함께 호화찬란한 저녁상을 한 상 차려 넣어주셨습니다.
친구가 왔다고 특별히 음식을 더 장만할 시간은 없었으니 짐작컨대 평소 그놈 집의 밥상이라 여길만 했는데
그 형상이 참으로 놀라워서 이건 도저히 보통의 가정집 저녁 밥상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서 지금은 밥상의 면면을 자세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또 그 뒤로도 그놈 집에서 여러 차례 밥을 먹었기 때문에 기억이 섞여버려
그날 밥상의 모습만을 정확하게 구별해서 떠올리기도 어렵습니다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몇 가지 충격적인 반찬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놀랐던 것은 그댁의 김치였습니다.
옛날 촌놈들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김치에 습관적으로 젓가락을 옮기기 마련인데
저도 그때 밥을 먹으면서 김치를 한 토막 집어 무심코 입으로 가져다 넣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맛이 너무 비리고 역겨워 차마 씹는 것조차 어려워서 그냥 넘기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할 수 없이 물을 한 모금 털어넣고서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약한 헛구역질 비슷한 증상도 뒤따라 한 차례 겪었고...
그러자 제 행동을 보고 있던 그놈이 시익 웃으면서, "우리집 김치는 아무나 못 먹지."하더란 말입니다.
짐작 가는 것이 있어 소담스럽게 담아놓은 김치 접시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큼지막한 명태 토막이 중간 중간에 박혀 있더란 말입니다.
제가 깜짝 놀라면서 "대체 이걸 왜 김치에 넣었다냐?"했더니, 그놈이 말하기를,
"모친께서 경남 진주 쪽이 고향이신데 그쪽에선 원래 김치에 명태를 넣는다더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자기는 어려서부터 그 김치만 먹어왔기 때문에
이쪽 지방의 김치는 너무 밋밋하고 심심해서 오히려 맛이 떨어진다고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재차 김치와 그 옆에 있는 깍두기를 살펴보았는데,
깍두기에는 코 풀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굴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습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싹 달아나는 걸 확연히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때 밥상 위에는 명란젓도 있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젓갈도 한 종지 올라와 있었습니다.
저는 본래 젓갈을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또한 한 번 맛을 보곤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놈이 재미있어 하면서 놀리듯 한 마디 던졌습니다. 치명적인 한 마디를.
"산적처럼 생긴 놈이 입은 몹시도 짧구나!"
아마 지금도 그렇겠습니다만, 옛날에 제가 어렸을 적에는 반찬 투정을 하거나 음식을 가려먹는 행동에 대해
사내답지 못한 잔망스러운 짓이라는 일종의 도덕 관념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그때 그놈이 제게 던진 말은 그런 면에서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모욕감을 느낄 만한 발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놈은 보란 듯이 젓갈을 떠서 입어 넣고 다람쥐 새끼처럼 오물거리며 약을 올리더란 말입니다.
저녁 밥을 먹을 때 그놈의 구강신공에 당한 치명적인 내상 때문이었는지
상을 물리고 곧이어 벌어진 '오목대전'에서도 저는 기어이 3승 8패의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지름길을 찾아 위태로운 하천 둑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굳게 결심하기를,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가도 늦은 것이 아니리라'하면서 새삼 결의를 다지고
권토중래할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면서 훗날을 기약했더랬습니다.
그 뒤로도 그놈과 저는 시간만 나면 수업 시간에 들러붙어 오목 놀이에 열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승패가 비등해지고 제가 승리하는 날이 많아지긴 했지만
졸업할 때까지 그놈이 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일관된 우세를 점하진 못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그러니까 3학년이 되어 다른 반으로 갈라졌을 무렵에는,
그놈이 "쌍삼도 허용하자"며 룰을 개정하고부터는 오히려 다시 패하는 날이 많아졌던 암담한 시절도 겪었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에는 근교 농촌에서 과수원을 크게 하는 촌놈 친구 집에 함께 놀러가게 되었는데
그 촌놈은 방학만 되면 본가에서 나와 과수원에 딸려 있는 집에서 창고를 지키며 지내는 처지였습니다.
그날 거기서 오후 내내 놀다가 이윽고 해가 넘어가자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촌놈이 직접 저녁상을 차려왔는데 당대 시골 밥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밥상이었습니다.
토장국에 김치와 깍두기, 고추장과 된장에 번갈아 박아넣었다 꺼낸 무우 장아찌, 오이 장아찌
거기에 날된장과 풋고추가 한 사발 곁들여진 반찬이 전부였고
진짜 옛날 사기 밥그릇(굉장히 큽니다.ㅋ)에 고봉으로 퍼담은 보리밥이 함께 올라왔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그 지방 토박이 친구놈들은 얼싸좋다 게눈 감추듯 밥을 퍼먹고 있었는데
함께 간 그놈만은 시종해서 깨작거리며 도무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심 뭔가를 잔뜩 기대하면서 밥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계속 그를 힐끗거리던 제가 느닷없이 이르기를,
"아따! 이 쉐키! 음식이 입에 맞질 않아서 목으로 넘기지도 못하는구나! 사내 쉐키가 입은 짧아서....  "
그러자 그놈이 흠칫하다가 갑자기 물주전자를 들어 밥에 물을 들이붓기 시작하더니
곧바로 숟갈로 푹푹 퍼서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것이었습니다. 반찬도 거의 안 쳐먹고.
저랑 다른 친구들은 계속 킬킬거리면서 그놈 하는 꼴을 지켜보았는데 사투 끝에 겨우 밥그릇을 비워낸 그가 이르기를,
"나는 본래 네놈처럼 입이 짧은 것은 전혀 아니고, 다만 배가 고프지 않아 잠시 속도를 늦춘 것일 뿐이니라."
하지만 그놈은 몇 시간 후에 시외버스를 타고 자갈 투성이 비포장 도로를 달려 시내로 돌아오면서
속이 계속 부대껴서 내릴 때까지 창문 밖으로 주둥이를 내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달리는 버스옆 길가에 서 있었을 어떤 사람은 날벼락처럼 토사물을 흠뻑 뒤집어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그놈과 저는 학교는 달랐어도 나란히 서울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도 여기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실로 놀라운 내신성적을 갖고 있는데
저에 비하면 어림없었지만 그놈도 웬만해선 만날 수 없는,
아마도 그 대학의 걔네 학과에선 거의 유일한, 저등급의 내신성적이었을 겁니다.
그놈이 형편없는 내신성적을 받게 된 것은 누구보다 제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무렵 '비진학 대상'이었기 때문에 학교에만 오면 아무 놈이나 붙잡고 놀기 바빴는데
하필이면 그놈이 저랑 친해지는 바람에 덩달아 쓸 데 없는 객기에 젖어들어 결국 그런 내신성적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졸업하던 그해 겨울의 어느날 저녁에, 그놈과 함께 친구 넷이서 모처럼 시내의 한 술집에 들어섰습니다.
그 무렵에는 친구 여럿이 어울려 종일토록 시내 음악다방을 이잡듯이 찾아다니며 놀던 시절이었는데
그날따라 갑자기 그놈이 술을 먹자고 대낮부터 떼를 쓰다가 날이 저물자마자 우리를 이끌고 간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우리 또래의 시야에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묵직한 분위기의 술집이었는데 내부 치장이 꽤 낯설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놈이 웨이터를 청하더니 친구들 의견도 물어보지않고 대뜸 뭐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잠시 후에, 작은 항아리에 가득한 동동주가 표주박과 함께 나타났고
곧이어 커다란 타원형 접시에, 언뜻 보기엔 마치 훗날의 라볶이처럼 보이는, 안주가 올라왔습니다.
그걸 보자마자 성질 급한 한 놈이 대뜸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는데
처음엔 매콤하고 달착지근한 맛에 별소리 안 하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호기심이 폭발한 다른 놈들도 다투어 집어먹게 되었는데 물론 저도 한입 가득 털어 넣었습니다.
물오징어 무침은 분명히 아닌데 약간 꼬들거리면서 물렁뼈도 씹히는 것이 도통 종목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촌놈들 노는 꼴을 빙글거리며 지켜보던 그놈이 마침내 이르기를, "홍어 무침이니라~"
깜짝 놀란 제가, "뭐시라! 가오리 비슷한 생선 그거 말이냐? 에엑 퉤~"
그놈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삭힌 홍어를 보면 아주 기절하겠구나~ "라며 한참을 킬킬거렸습니다.
존심에 위기가 엄습하자 짐짓 대범해진 제가 재차 젖가락을 놀리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다른 놈들도 뒤질세라 젖가락을 부지런히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술잔도 한순 돌아가고 홍어무침도 가열차게 씹어대면서 본격적으로 음주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처음 먹을 때는 그야말로 존심 유지 차원에서 먹기 시작했는데
자꾸 먹다보니 그것도 나름 맛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중에는 꽤 즐기는 상태가 되더란 말입니다. ㅋ
그날 늦게까지 먹다가 모처럼 거나하게 취해서 술집을 나섰는데,
한겨울의 칼바람에도 훈훈하고 알딸딸한 기분에 마냥 기끼워져서 느긋하게 집으로 걸어올라 왔습니다.
그런데 대문을 열고 내방에 들어서자마자 후끈한 공기가 그날따라 견딜 수 없이 답답하게 느껴지면서
드디어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하는데 그걸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가만히 누워 진정되길 기다려봤지만,
마침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되자마자 나는 듯이 마당 건너의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동동주와 함께 쏟아지는 홍어무침 조각을 진저리나게 뱉어내면서 피처럼 붉은 마음으로 결심하기를,
"내 다시는 이 망할 것을 먹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더랬습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제가 술을 먹기 힘든 체질이라는 것을 아직은 확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저희 조부나 부친께서 일세에 보기 힘든 두주불사의 대한량이셨기 때문에 나도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객기를 앞세운 나머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주량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툭하면 무리해서 과음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거의 예외없이 다시 뱉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화장실에서 판단하기에는, 안주가 워낙 비호감이라 이런 일이 있는 것이라 단정하고 말았는데,
훗날 돌이켜 생각컨대, 결국엔 저 일도 제가 바닷물고기를 날로 먹지 않는 습관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경험이라서
죄없는 홍어에겐 다소 미안한 일이겠지만, 저는 별다른 미련이나 회한이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ㅎ
('79~'81년 무렵까지도, 바닷가 동네를 제외하면, 바닷물고기를 날로 먹는 풍속이 거의 없었던데다
지금처럼 활어 운반 시스템도 없었고 심지어 냉장 시스템조차 매우 빈약했던 시절이라서,
게다가 제가 살던 지방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내륙에 속하는 지역이다보니,
20만 남짓한 도시 전체에서 '횟집'이라고 해봐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희소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물고기를 날로 저민 음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먹는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대다수 또래들도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요즘 우리 나라에서, 특히 내륙의 대도시나 농촌 지역에서조차,
물고기를 날로 먹는 풍속이 횡행하는 현상을, 저는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크흐흐~
그런데 그놈은 그때도 벌써 횟집에 여러 번 가보았다고 자랑삼아 얘기하곤 했습니다.
비린내 나는 그걸 어찌 날로 먹느냐고 힐난조로 물어봐도
그놈은 언제나, '직접 먹어보기 전에는 그 맛을 설명할 수 없니라'
또는 '무릇 사내라면 육회, 생선회를 가리지 않고 날고기를 먹을 줄 알아야 진정한 사내이니라'하면서
한껏 거들먹거리곤 했는데, 아마도 옛날 과수원에서의 참담한 굴욕을 염두에 둔 말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며칠 후에 제가 무심결에 동동주와 홍어 무침을 먹고 토한 얘기를 누설하고 말았는데
그걸 듣자마자 그놈이 길길이 날뛰며 흥겨워하는 꼴을 그저 비감한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태가 역전되었고 제가 또다시 '입 짧은 놈'의 멍에를 둘러쓰고 말았습니다.
'청산의 땔감이 다하지 않는 한, 언젠가 이 원수를 갚을 날이 오고 말리라'
마음 속에 그날의 일을 깊히 묻어두고 그저 훗날을 기약할 따름이었습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비통하며 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청소년도 아니고 어른은 더더욱 아니었던 저 시절엔 그저 '존심'과 '체면'만을 먹고 살던 시절이라서...
좋은 시절도 한 순간이라, 어느덧 봄이 가까워졌고 그곳(그놈에겐 고향ㅋ)을 떠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놈은 부친께서 일찌기 일제 강점기 말에 왜국 동경의 한 대학에 유학하셨고
해방 후엔 서울의 유력한 사립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해서
나중엔 제가 살던 도시의 국립 대학에서 학장까지 역임하다가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놈 집안은 그 도시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큰 문중 세력인 데다
근동에서 감히 견줄 상대가 없는 대지주 집안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호강대족'에다가 태생적으로 부유했다는 말씀입니다. ㅋ
상경해서 대학에 입학할 때에도 저는 가까스로 학교 기숙사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그놈은 벌써 2월 중순에 미리 올라와서 자기네 학교 옆동네(연희동ㅋ)의 최고급 하숙집을 그것도 독방으로 구해서
월 17만 원이나 내야 하는 일종의 '귀족 하숙'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기숙사에 매달 납부하던 돈이 2만9천5백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거액이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 무렵의 지방 국립대학에서 한 학기 등록금이 그 비슷한 규모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게다가 그놈은 한 달 용돈이 무려 15만 원이나 되었는데 '80년대 초반의 학생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규모였습니다.
입학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에 기숙사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제아무리 빠릿한 척을 해도 촌놈은 별 수 없이 촌놈이라, 고삐리 시절과는 사뭇 달라진 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겨우 적응이 되었다싶었을 무렵에 딱 맞추어 전해진 소식이었습니다.
역시 그놈이었는데 죽도록 보고 싶으니 금요일 오후에 신촌 쪽으로 건너와서 얼굴좀 보자는 얘기였습니다.
저역시 그놈의 생사가 궁금했던지라 토요일 수업이 있었음에도 선뜻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날 신촌 로터리에서 만나자마자 다방을 찾아 들어가 근 한 달만에 해후의 정을 나누다가
어느덧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그놈 하숙집으로 함께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집은 하숙집이라기엔 지나치게 고급 주택이었고 심지어 외제 자동차도 대문 앞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시절엔 영업용이 아니면 '포니'조차 주택가에선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던 걸 감안하면,
그놈 말처럼 정말 부잣집은 틀림없이 부잣집이로구나하면서 대문에 들어섰습니다.
하숙생도 단 세 명이었는데 다른 둘은 대학원생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놈에게 이런 정황을 물었더니, 그놈이 말하기를, 돈 때문에 하숙을 하는 집은 전혀 아니고
아들과 며느리, 딸이 함께 살다가 연전에 미국으로 모두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집에는 노부인과 아직 학부생인 막내딸만 살게 되어 적적함을 덜어보고자 하숙을 시작하게 된 집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방범상의 이유도 있는 걸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누가 봐도 부잣집 중년 여성처럼 보이는 그댁의 아주머니께서는 일개 하숙생 친구일 뿐인 저를 이상할 정도로 환대하시면서
저녁밥도 아주 풍성하게 차려주셨고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자주좀 놀러오라는 심상치 않은 말씀까지 건네주셨습니다.
원래 하숙집에서는 외부인이 들어와 노닥거리는 걸 탐탁치 않게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댁 아주머니의 호의적인 태도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던지라 제가 그에게 슬쩍 그점을 물었더니,
그가 이르기를, 원체 집에 사람이 없다보니 사람이 반가워서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라 전했습니다.
말이 좋아 하숙이지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은 전혀 아니고 그저 식구를 늘리고자 하는 일이라서
하숙생들을 진짜 가족처럼 대하면서 그들의 친구가 방문을 해도 한결같이 대하신다는 얘기도 덧붙였습니다.
그 말을 듣던 제가 반색하며 "그으래? 여기서 한 이틀 개기다 가도 되겠네?"했더니
그놈이 실실 웃으면서 "아마 한 달도 괜찮을 거다."하더란 말입니다.
과연 그놈 말대로 그날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그집에 눌러 있었는데도
아주머니께서는 언제나 호의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놈을 따라 낮엔 종일토록 밖에 나가 서울 시내를 쏘다니며 놀다가 저녁 늦게 귀가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웬만하면 밥은 집에 와서 먹으라고 잔소리 비슷한 말씀까지 주시더란 말입니다.  ㅋ
그놈은 출생에 특별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나면서부터 집안에서 매우 애지중지하면서 키워졌던 놈이라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일생 생활의 모든 면에서 당시의 보통 또래들과는 사뭇 다른
어찌 보면 매우 까탈스러운 취향과 습성을 익혔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런 놈조차 별 스스럼없이 자기집처럼 여기면서 생활하는 걸 보면 보통 좋은 하숙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에 등교를 앞두고 방에서 함께 밥상을 받아 먹던 중에 그놈이 문득,
"이 집은 다 좋은데, 밥이 너무 맛이 없지 않냐?" 라고 아쉬워하길래,
제가 펄쩍 뛰며 "맛만 좋구만. 고기 반찬도 무척 많고." 뒤이어 말을 이었는데,
"건더기가 이렇게 많이 들어간 쇠고기 무우국, 이거 보통 하숙집에서는 못 먹는 거여!
이 쉐키가 복에 겨운 나머지 이젠 별 시답지 않은 소리까지...."라며 제가 면박을 주었더니,
"알고보니 이댁 사람들은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아주머니께서 순전히 하숙생들을 위해서
육류, 생선을 손질해서 반찬을 만드시는데 아무래도 본인들은 잘 먹지 않는 음식이라 그런지,
조리 방법이나 간을 맞추는 일에 있어서 조금씩 어긋나는게 보인단 말이다.
내 말은 그점이 몹시 아쉽다는 얘기로다"
그러자 제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선언하기를, "아따! 사내 쉐키가 입은 짧아서리... "
실로 몇 달만에 형세를 역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맞았는데 그걸 놓칠 리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러자 아차!하는 표정으로 당황해하던 그놈이,
"나는 너처럼 못 쳐먹거나 안 쳐먹는 게 아니라 그냥 맛이 없다고 했을 뿐이노라!"하길래,
제가 계속 다그치며 "이 정도 음식을 보고 맛이 없다고 느낄 정도면 그게 바로 입이 짧다는 명백한 증거이니라!"했더니
그놈이 다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뭔가 말할 듯 머뭇거리더니 그냥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입 짧은 놈'의 멍에는 다시 그놈에게 돌아갔고 저는 실로 몇 달만에
충만한 존심을 만끽하면서 무려 사흘이나 머물던 그곳을 떠나 버스를 타고 우리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당시 서울 시내 간선도로의 시내버스가 다 그렇듯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 나머지
그날 1교시는 그냥 제낄 수밖에 없었는데도 나름 상쾌하고 깔끔하며 명랑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중략)
그로부터 칠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입 짧은 놈"의 타이틀을 그놈에게 안겨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살 속에 낙인을 찍어놓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보냈던 실로 간단치 않은 세월이기도 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사했던 모 재벌그룹 생활을 몇 달 하지도 않고 때려치운 그놈이
갑자기 언론고시(기자시험)를 본다면서 신림동 고시촌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었는데
마침 그 무렵에 제가 신혼 살림을 그쪽에 차렸기 때문에 옛날 고삐리 시절처럼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그놈은 옛날 귀공자 시절의 흔적은 간 데 없이 그저 추레하고 볼품 없는 수험생이미지로 늙어가고 있었는데
고시원 밥이나 녹두거리 음식점의 밥을 먹는 것이 영 시원찮았는지 툭하면 우리 집에 예고도 없이 나타나선
매운 라면과 시큼한 집김치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습니다.
참으로 격세지감인 것이, 옛날에 그놈은 라면이 불량식품이라며 입도 안 대던 놈이었는데
어느덧 라면조차 귀하게 여기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 또래의 청년으로 다시 태어나 있었습니다.
그 몇 년 전에, 넉달의 시차를 두고 입대했기 때문에 비록 부대는 달랐지만 같은 시기에 군 복무를 했는데
어느날 카츄사 병사 복장을 한 그놈이 저희 부대로 면회를 왔습니다.
동기들 소식이나 서로의 부대 생활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놈이 갑자기,
'입대 초기에 훈련소에서 먹는 것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해서 그야말로 죽다 살아났다'는 얘기를
동정과 공감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내게 쏟아놓길래,
제가 거룩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나는 훈련소 밥이 정말 맛나더라.
짬밥이 이리도 맛있는 줄 진작에 알았다면, 아예 말뚝을 박았을 텐데..." 라고 이죽거렸더니,
그놈이 신경질을 내면서 "지금도 늦지 않았노라. 하사관 지원이라도 해봐라, 개 자식아!"하더란 말입니다.
이리하여, 그놈이 '입 짧은 놈'이라는 기존의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고 저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역시나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오는 법이라...
고삐리 시절과는 달리 대학 생활, 군 생활, 사회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어릴 적부터 저렴한 식단에 단련되어 있었던 제가 고품위의 식사에만 길들여진 그놈에 비해
한결 유연하고 폭넓은 식습관을 과시할 수 있었는데 그놈은 그점을 몹시도 속상하게 여겼더랬습니다.
그런데 칠팔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후에, 고시원 생활에 찌든 그놈이 오랜 방황 끝에
어느덧 면모를 일신하면서 놀랍도록 유연해지고 한결 관대해진 식습관을 자랑하는 단계에 도달했더란 말입니다.
이에 따라 저는 그 즈음에 진짜 심각한 위기 의식에 휩싸이고 말았는데,
비록 제가 오랫동안 시중의 저렴한 음식 문화에 상대적인 친화성을 드러내고 우수한 적응력을 보여주었다지만
사실은 그때까지도 육류, 생선을 먹는 일에는 여전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터라,
그냥 육류, 생선만이 아니라 육회, 생선회에 두루 익숙한 그놈이 이제 저렴한 식단까지 능란하게 섭렵하는 단계에 도달하자,
'입 짧은 놈'의 멍에가 또다시 내게 덧씌워지는 참담한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피차가 지난 십여 년간 줄기차게 벌여온 '입 짧은 놈' 낙인찍기 사업에 대해,
그놈의 식성과 적응력이 달라지면서 한결 마음이 여유로워진 탓인지는 모르지만
저랑은 다르게 그 오래되고 첨예한 사안에 대해 상당히 무감각해져 있다는 걸 알아채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저는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조심,
행여나 그 놈이 그 문제를 다시 떠올리지 못 하도록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매너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혼집에 쳐들어와서 밥 먹여달라는 행패를 일삼아도 그저 묵묵히 감내할 뿐이었습니다.
(참고로, 저희 마누라와 그놈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라는 거. 크흐흐~)
그해에 두 군데의 언론사 시험에 실패하고 세 번째로 응시한 모 공영방송 공채 시험에 합격해서
드디어 '수습기자'로 입사하게 된 그놈은, 부모의 도움으로 근처의 신축 다세대 주택에 6천 만원 전세로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초짜 수습기사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대번에 어디서 여자 친구도 하나 구해서 연애질을 시작했는데
알고보니 그 여성은 전문적인 수준의 한식 조리 기술을 갖춘 사람이었더란 말입니다. ㅋ
주말은 물론이고 가끔은 평일 저녁에도 그놈이 갑자기 불러서 마누라랑 함께 찾아가보면,
그놈의 여자 친구가 주방에서 지지고 볶아낸 진수성찬이 한 상 가득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그걸 보고 감탄과 찬사를 쏟아낼 때면 그놈은 언제나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거만을 떨어대곤 했습니다.
제가 여러 차례 그놈 여자친구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어봤는데 정말 맛이 좋았더랬습니다.
저희 부부가 보기에도 그 여성은 인상이 정말 좋아보였고 품성도 원만해 보였는데
예기치 않게도 그놈 모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결혼에는 이르지 못하고 끝내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 처음에 그 여성을 만나본 그놈 모친께서 인상이 너무 좋다 하시면서
친히 그집의 열쇠를 건네주며 틈틈히 집에 와서 자기 아들좀 살펴달라고 부탁까지 했던 사이였다는 겁니다.
(사실, 제가 품고 있는 관념으로 보자면, 아들의 여자친구가 아무리 흡족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래도 엄연히 혼전인데, 열쇠까지 건네면서 아들집의 살림을 살펴달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은
상식과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좀처럼 하기 힘든 사고 방식이라는 생각을 당시에 속으로 했더랬습니다.ㅋ)
이건 누가 봐도 그 여성을 예비 며느리로 받아들인다는 틀림없는 의사 표시로 보였는데,
어느날 모친께서 다니는 절의 중놈이 사주를 보다가 궁합이 나쁘다는 말을 건넨 것이 빌미가 되어
모친의 태도가 갑자기 표변해서 모질기 이를 데 없는 강경한 태도로 그놈에게 헤어질 것을 재촉하기 시작하자
근 일 년을 완고하게 버텨내던 그놈이 마침내 어느날 오후에 돈암동 태극당 근처 찻집에서 그녀를 만나
공식적인 교제 종료를 통보하고 그날로 결별하고 말았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말을 꺼낼 자신이 없다면서 난 데 없이 저를 끌고 나가려고 하길래,
다른 이가 끼어들 자리가 전혀 아니라는 제 강경한 의사를 여려 차례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막무가내로 쳐들어와서 저를 반강제로 끌어내어 이별을 통보하는 현장에 함께 데리고 나가는 바람에,
그토록 서로를 애틋해하던 두 남녀가 이별하는 장면을 가슴 아프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그 여성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얼굴 표정이 이십 삼 년이 흐른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하기만 합니다.
삼류 일일 연속극에서나 볼 수 있는 황당하고 가당찮은 일이
막상 제 주변에서 현실이 되어 나타나는 일련의 장면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그에 대처하는 합리성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견고한 의지를 품고 철저하게 실천해낸다는 것이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몹시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친구놈의 못난 행동을 통해 뻐져리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친구의 사생활에 개입할 수 있는 어떤 한계와 제약은 분명히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옳다고 여기는 방법도 물론 있었지만 그에게 선뜻 그대로 하라고 강권하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치졸하고도 추잡해보이는 과정에 대처하는 친구놈의 실망스러운 의식과 태도를 묵묵히 지켜보면서
십수 년이 넘도록 견고하게 쌓아올렸던 의리감과 우정이 차갑게 식어가는 섬뜩한 감정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놈과 진탕 마신 끝에 자정을 넘겨 귀가하자마자
제 처에게 처음으로 이런 속내를 드러내 보였더니 마누라가 단호한 목소리로 이르기를,
자기는 이미 예전부터 그놈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 마음 속의 친구 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야만 할까 고민하던 저에게
그날 밤에 보여준 제 처의 단호한 태도는 나름 큰 용기로 다가왔습니다. ㅋ
하지만 인간 관계라는 것이 생각처럼 수월하게 조절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아니기 때문에
그 뒤로도 한동안 그놈이 자주 찾아오는데도 그걸 모질게 내치기는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그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친구인 저와 구체적인 갈등 관계가 발생한 것도 아니고
그저 겉으론 보이지 않는, 저 혼자만 가슴 속에서 그놈을 생각하는 관점과 태도가 달라진 것일 뿐이라서
그래도 친구라고 물색없이 자꾸 찾아오는 그놈에게 앞으로 아는 척하지 말라고 날벼락처럼 내뱉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ㅋ
한데, 정말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그놈이 처음의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직장 선배의 소개로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면서 어느날 제게 인사를 시키더란 말입니다. 크흐흐~
제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모친의 고매하신 궁합 판정은 받아봤냐?"했더니,
그놈이 쓴웃음을 지으며, "무지 좋댄다" 하더니, 다음달에 양가 상견례도 예정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아따! 정말 빠르네!"하면서 제가 그를 쳐다보는 순간, 속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무언가를 참아내느라
잠시나마 숨을 가다듬고 애써 딴 생각에 잠겨들어야만 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ㅋ
그놈의 새 여자친구는 지방 국립대의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해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경상도 사투리가 약하게 남아 있는 억양을 구사했고 외모도 매우 뛰어났으며 그야말로 '교양덩어리'였습니다.
예전 여자 친구에 비해 집안의 조건도 매우 좋은 편이라서(옛날 여자 친구는 편모 슬하의 가장)
그놈 모친께서 가히 흥겨워하실 만하다는 생각도 언뜻 들었습니다만,
문제는, 그놈의 진정한 속마음이야말로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넌지시 의중을 탐색했더니,
그놈이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그녀를 잊을 수야 없겠지. 하지만 이 여자하고도 그런대로 살아질 거 같긴 해."
(이 지점에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해 늦봄엔 서둘러 식을 올렸고 시부모의 뜻에 따라 그의 처는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몇 년 간, 그들 부부는 저희 부부를 수시로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곤 했는데,
역시나, 하늘이 무심치 않게도,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게도, 부인의 음식 솜씨가 완벽한 '꽝'이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음정과 박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음치, 박치가 있는 법이고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색맹 또한 생겨나기 마련인 것과 마찬가지로
음식의 조리에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도 존재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그놈 부인의 몹시도 창의적인 음식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놈은 시간이 날 때마다 제게 자기 부인의 음식 솜씨에 대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엄숙하고 근엄하게 이르기를, "먹어보니까 맛만 좋더라! 하여튼 애쉐키가 입은 짧아서..."
그 무렵 저는, 그놈의 결혼과 함께, 마침내 그 기나긴 싸움의 결말이 임박했다는 점을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놈은 지금의 처와 함께 사는 한, 언제나 '입이 짧은 놈'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말입니다.
따라서 저는 최종적으로 "입이 넓은 놈"으로 당당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놈이야말로 평생토록 "입이 짧은 놈"으로 살아가야 하는 엄중한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입이 짧은 놈'을 밝혀내는 오랜 다툼이 저의 승리로 종결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읽는 재미가 담겨 있다고는 보기 힘든, 그저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한심한 에피소드를
인내를 갖고 끝까지 읽어주신 유부방의 회원들께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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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67
允齊님의 댓글
일하기 싫어서 열심히 읽다가 빵 터졌습니다. '아이고' 이 표현이 정겨워서 웃음이 나와버렸습니다.
쎈자님 오늘 정말 귀엽습네다. 요렇게 표현함 혼내실려나....
저녁에 술약속이 있는데 남은 부분이 궁금해서 어찌해야 할련가 갑자기 갈등이 생깁니다.
현재까지의 내용으로는 쎈자님 입 짧으신거 맞는것 같으신데요...
내일 멀쩡한 정신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ohnglim님의 댓글
시방 배가 살살 아픈데 퇴근하고 화장실 가서 읽을거에요..ㅋㅋㅋㅋㅋㅋㅋ
phoo님의 댓글
쎈자님 글 쓰시는쪽으로 가보시는것이 어떨지... 정말 잘쓰시네요 와우~
고은철님의 댓글
어여 뒷얘기를 써주세요....^^
ohnglim님의 댓글
_mk_완결 보려고 몇번이나 드나들었다는거 아니겠어요. ㅋㅋ
폰으로 글남기는건 한계가 있으나 많은걸 느끼게 해주는 에피소드임은 분명합니다.
결국 승리하신거 여러모로 축하드리옵고.. ㅎㅎ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요^^
박선미님의 댓글
쎈자님~글솜씨가 저희만 보기엔 너무 아깝네요...
마치 성석제님의 단편소설을 보는듯한...
어쩜 이렇게 맛깔나게 글을 쓰시나요...
맨날 눈띵만 하다...감동받아 글 남깁니다....
존경합니닷!!
아범님의 댓글
엇! 을매나 재밌길래들~~
시간적으로다 읽을 엄두가 안나서 들락거리면서 댓글만 훑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슴돠.
목도 칼칼하니~ 캔맥주나 하나 들이키면서 읽어봐야쥐.
지금 하나 사러나갑니다. 흐;
아범님의 댓글
잠깐동안의 휴식을 아주 재미나게 보냈습니다. ㅋ
입짧은 얘기도 재밌지만 오목얘기도 재밌습니다.
덕분에 유쾌해진 기분으로 달려보겠습니다~~
향기님의 댓글
방금 올려놓은 글의 간단한 교열 작업을 일차로 마쳤습니다.
저는 일단 머릿속에 기억 다발의 가닥이 잡히기 시작하면
갑자기 의욕이 충천하면서 단숨에 끝까지 써내려가는 편인데,
오늘은 중간에 일이 생겨서 일단 끊었다가 나중에 다시 이으려니
처음에 잡았던 가닥을 되살려내느라 나름 꽤나 힘들었답니다. 흐흐~
제가 일기처럼 써놓은 글을 읽고 격려의 말씀을 남겨주신 분들께는
그저 감사하다는 말씀으론 부족한 어떤 감동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일견, 내가 정말 글 쓰는 일에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생길 지경입니다. 으하하~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분들께는 몇 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KMUG에서 활동하기 전까지는 어떤 수준의 글도 써본 적이 없습니다.
학창 시절 누구나 해보는 '일기'조차 써본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문장을 수련하는 일이라든지, 습작을 해보는 일은 꿈에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칭찬의 말씀을 주신 분들께는 한층 더 죄송한 것이,
저는 평소에도 문학 작품을 전혀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ㅋ
어려서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선미 님께서 알려주신 '성석제'라는 소설가도 전혀 모릅니다.
재작년 쯤엔가, 이곳에서 두어 차례 밝힌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심지어 '문학 작품 읽기'를 통해 배양되는 교양의 실체를
기본적으로 경멸한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흐흐~
굳이 스스로를 규정해보자면, 저는 매우 낮은 수준의 '사회과학자'입니다.
듣는 분들이 보시기엔 희한하기 이를 데 없는 관점으로 보이겠습니다만,
저는 행여나 부지불식간에라도 제 의식 속에 어떤 '인문학적 소양'이 배양되는 것을
굉장히 꺼려하고 경계하는 편입니다.
평소의 이런 제 지향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제 글을 읽으면서 어떤 수준에서라도 모종의 '인문학적 소양'을 발견하셨다면
그건 진정으로 제가 우려해마지 않는 일일 뿐입니다.
저는 인문학적 소양이 철저하게 거세된 메마른 사회과학자이고 싶습니다.
제 평생의 과업으로 여기고 있는 일이기도 하답니다.
따라서, 글 솜씨가 좋다는 말씀은 제게 다소 충격적으로 들립니다.
저는 사물의 현상이나 관계, 흐름에 대해 설명이 매우 정교하다는 평판은 듣고 싶지만
글 솜씨가 좋다는 말을 듣는 것은 사실 매우 곤혹스럽기도 하답니다. 으하하~
참고로, 예전에도 그랬듯이 오늘 올려놓은 내용은 전부 사실입니다.
다만, 사건을 평가하거나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면서 다소의 과장이나 왜곡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제 기억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선 철저하게 사실만을 기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겐 글을 잘 쓰는 일보다는 알고 있는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해내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하고 싶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박선미님의 댓글
사실을 옮기는 과정에서도 글잘쓰는 사람들은 묘사의 정교함이 돋보이고,,
그 속에서 잃지 않는것은 그 시작과 끝을 넓은 안목에서 관망하며 시종 위트있는 글을 쓰는 재주지요..
쎈자님은 이 모든것을 두루 갖추고 글을 쓰셔서...
그대로 들어다가...신춘문예에 ...보내버리고 싶은 충동이 자꾸생겨 ..억누르느라..혼났습네다..
각설하고...
사회과학자라,,하심은 ...쫌 자세히...현재 어떤 철학을 가지고 계시는...
학생때 사회과학 공부...수박 겉핧기만 한 저로써는 ..쫌 궁금해 지는데요...
고은철님의 댓글
완결까지 잘 읽었습니다....
승자의 기쁨이 느껴집니다....^^
대학로에서 함께 회나 한 접시 하면서 기쁨을 나눠보져...ㅋ
향기님의 댓글
에잉~
괜히 '사회과학자'라고 했나보네요~
평소처럼 '동네 청년'이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으흐흐~
저는 지금까지 많이 배우진 못 했지만
옛날부터, 또 앞으로라도, 평생에 걸쳐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정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소개해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경제학의 일반 이론'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거기서 습득한 이론을 활용해서
동아시아 중세ㆍ근대의 총체적인 역사상(歷史像)을 구축(構築)해보는 것이 꿈입니다.
향기님의 댓글
자~
이제 영양가 없는 얘기는 그만 하고!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며 막말하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향기님의 댓글
그럽시다!
나도 어제 저녁부터 '백성말'을 못 했더니 입안에 가시가 돋칠 지경이라오!
모름지기 교양인이라면, 때때로 혓바닥을 적절하게 털어줘야
의지가 단련되고 생각이 발전하며 결국엔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거 아니겠소!
오늘은 뭔 얘기를 해볼까?
뭐든 물으시오!
향기님의 댓글
먼저 묻겠소.
맨 위에 있는 允齊 님의 댓글에 보면, 당신이 말미에 '아이고!'라는 단어를 넣은 것에 대해
표현이 정겨워서 웃음이 나고 심지어 귀여워보인다고도 말씀하셨소.
저 말씀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양심에 손을 얹고 답해 보시라.
향기님의 댓글
손을 따로 얹어 놓지 않아도 내 양심은 원래부터 고요하다오.
참으로 듣기 민망한 말씀이긴 하지.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실상을 알고보면 '전혀 다른 표현의 생략형'이지 않겠소? ㅋ
원래는 '아이고 ×됐다!', 이거 아니겠습니까! 크흐흐~
향기님의 댓글
'×'는 뭐요?
향기님의 댓글
나도 쓰고는 싶은데 막상 써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거요.
그러니 피차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 의뭉떨지 맙시다.
뭐 다른 거 물어볼 건 없소?
향기님의 댓글
에... 또... 지금 당장 따로 고를 만한 얘기는 없시다.
그런데 당신이 위에 올려놓은 긴 이야기를 읽으면서 몇 가지 궁금한 게 생겼소.
그걸 좀 풀어줘야 할 거 같은데?
향기님의 댓글
글쎄, 뭐든 물어보라니까!
향기님의 댓글
당신 글에 나오는 '그놈'과는 요즘도 자주 만나는 사이요?
향기님의 댓글
본 지 5년 되었소.
지금은 그놈이 국내에 없다오.
특파원으로 유럽 쪽에 나가 있을 거요.
향기님의 댓글
'그놈'은 그때 급하게 결혼한 여성과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요?
향기님의 댓글
이루 말할 수 없이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긴 했지만 아직 함께 살고 있다오.
향기님의 댓글
오! 파란만장한 곡절!
뭔지 궁금하도다.
향기님의 댓글
사실은 말이오.
글의 주제에 부합하는 내용은 저기까지라서 이야기를 저쯤에서 정리하고 말았지만
실제로 '그놈'이 겪은 진짜 흥미진진하고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라오. 으흐흐~
반 세기를 살아오면서 저놈처럼 희한하고도 기구한 행로를 겪은 사람은 일찌기 보지 못했소.
훗날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것이 저놈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전혀 아니었더란 말이지요.
그놈의 삶을 도식화해서 보자면,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선택을 하는 과정의 연속이라 볼 수도 있는데
특정한 선택으로 자신을 몰아넣는 그만의 어떤 사상 혹은 관념이라는 게 있었다는 거지.
알고보면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 연유하는 것임에도
그놈은 언제나 여건의 불비함을 탓하고 부모를 원망하며 세사의 비정함을 증오했다오.
향기님의 댓글
엥?
그렇게 변죽만 울리니까 더 궁금해지네, 이거~
뒷 얘기를 더 해보면 안 될까?
향기님의 댓글
그 얘기는 내용을 아무리 줄여봐도 위에 내가 써놓은 얘기보다 대여섯 배는 족히 될 거요.
그러니 내가 함부로 '그럽시다!' 하기가 쉽지 않소. 으흐흐~
향기님의 댓글
별로 논 것도 없는 거 같은데 벌써 저녁 7시라니!
오늘은 시간이 무지하게 빨리 갑니다.
향기님의 댓글
심심한데...
한두 마디 더 이어 봅시다.
당신 말대로 뒷얘기가 그리도 길다면 굳이 해보라고 강요하진 않겠시다.
다만, 한두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설마 이것도 안 된다고 하진 않곘지!
'그놈'의 부인이 음식을 진짜 못 한다고 했잖습니까?
아무리 음식 솜씨가 없다고 하더라도 관심을 갖고 자꾸 하다보면 늘기 마련일 텐데
몇 년을 두고 계속 그 상태였다는 게 잘 믿기지가 않는데, 어찌 생각하시오?
그런데 자꾸 '그놈', '그놈'하니까 영 불편하네요. 다른 적절한 이름 없을까?
이를테면, 학교 다닐 때 불렀던 '그놈'의 별명이라든가, 뭐 이런 거 말입니다.
향기님의 댓글
별명이야 당연히 있었지.
'꽈백이'
'꽈배기'가 절대 아니고 '꽈백이'요.
비록 발음은 같아도 표기법에 주의해야 하오. 크흐흐~
옛날에 친구들이 '그놈'의 이름을 비틀어 부르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별명이었소.
하여튼 좋시다. 지금부턴 '꽈백이'라고 부릅시다!
꽈백이 부인이 음식을 잘 못하는 것이 본래부터 그쪽에 재능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요리하는 걸 몹시 싫어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소.
향기님의 댓글
'꽈백이'나 꽈배기'나 똑같은 걸 구태여 구별할 필요가 있나!
요즘의 표준말도 틀림없이 '꽤배기'일 텐데, 그냥 '꽈배기'로 하면 안 될까?
향기님의 댓글
아! 참... 거!
그거 조심해야 한다니까!
때론 '그놈' 부인을 칭할 때, 자칫 '꽈배기 부인'이라고 표기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어감이 굉장히 이상해진단 말이지!
지훈아빠님의 댓글
인내심을 가지고 재밋게 잘 읽었네요...ㅎ ㅎ
역시 친구중엔 돈많은 놈이 한명쯤은 있어야된다는 평범한 교훈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네요...ㅋ ㅋ
향기님의 댓글
오오!
지훈아빠 님의 참신한 독후감!
감사합니다.
향기님의 댓글
저녁 10시 30분!
오늘부터는 01시 경기가 없어집니다.
'유로 2012'말입니다.
각 조별 예선 경기가 이제 팀별로 한 경기씩만 남아있기 때문에
승부조작을 방지하기 위해 나머지 경기는 반드시 같은 시간에 시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조별 예선이 끝나고 8강전부터도 전부 03:45분에 시작합니다.
향기님의 댓글
아따!
경기 보는 일도 힘들어지겠는데, 이거. ㅋ
맨날 낮잠 잘 수도 없고...
향기님의 댓글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부턴 일찍 잡시다. ㅎ
향기님의 댓글
한데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입이 짧다'라는 말의 의미를 떠올릴 때마다
무언가 개운치 않는 뒷맛이 남더란 말입니다.
향기님의 댓글
뭐가 개운치 못 하단 말이오?
향기님의 댓글
물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저 말의 의미를 풀어보자면,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의 반대말 정도로 알고 있지 않았겠소?
다시 말하자면, '음식을 잘 먹지 않거나 가려먹는 버릇이 있다'라고 흔히들 알고 있다는 거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나는 사실... 그동안의 인생 경험을 통해 약간 다른 입장을 갖게 되었다오.
여기서 내 주장의 핵심을,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소.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조건이 주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① 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식재료를 이용해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삼 년을 산다.
② 쌀과 몇 가지의 잡곡을 주식으로, 된장ㆍ김치ㆍ두부ㆍ콩나물, 이 네 가지 반찬만 먹으면서 삼 년을 산다.
누구든지 저 두 가지 코스를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고 했을 때,
①번 코스를 무리 없이 통과하는 사람은 엄청 많을 것이오. 나도 물론 자신 있소.
그저 뭐... 식재료를 장만할 돈이 모자른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지, ㅋㅋ
내가 아무리 육류, 생선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입에 대기도 어려울 정도로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거지.
사실 생선회, 육회의 경우에도 별 어려움 없이 자알 먹을 수 있다오.
다만, 가격 대비 성능이 형편없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일 뿐이지.
자~ 이제 ②번 코스를 살펴봅시다.
그런데 ②번 코스를 삼 년에 걸쳐 너끈하게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리 많지는 않을 거요.
내가 알고 있는 친구 중에 몇몇 '고기귀신'은 채 석 달도 채우지 못하고 미쳐 날뛰게 될지도 모른다오.
또다른 놈들은 기를 쓰고 버틴다고 해봐야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 확신하오. 으하하~
하지만 나는 매우 자신 있다오. 아마 평생을 저렇게만 먹으라고 해도 별 불만없이 버틸 수 있을 거요.
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스스로를 '아무 거나 골고루 잘 먹는 '입 넓은 자''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저 두 가지 경우를 다 겪어보면서도 별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입 넓은 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오.
나머지는, 특히 ①번 코스는 기꺼워하면서도 ②번 코스는 난감해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있다면, 그자야말로 진짜 '입 짧은 놈'이라는 주장이기도 하고.
또 다른 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면,
평소에 아무 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실제 식관행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대다수가 육류, 육가공식품, 어패류 등에 남다른 집착과 선호도를 보이는 있는 경우가 많더라 이 말이지.
그런 사람들에게는, 두어 달만 고기를 못 먹게 해도 여러 가지 심리적인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걸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아주 여러 번 생생하게 목도했다오.
물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일반 채소류는 물론이고 다른 희한한 음식도 무리 없이 잘 소화하는 특징도 있소.
하지만 무리 없이 다 먹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가격이 어떠하든 간에 무리 없이 다 먹으려고 한다는 거지. ㅋㅋ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 이 말을 열심히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도 볼 수 있을 거요.
그러나 내가 보기엔, 알고 보면 이런 사람들이 진짜 '입 짧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②번 코스에 도전하게 되면 틀림없이 실패하고 말 겁니다. 으하하~
내가 스스로 '입 넓은 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농담삼아 하는 말만은 전혀 아니고,
바로 이런 주장을 배경을 깔고 자신 있게 내세우는 말이기도 하다오. 으하하~
향기님의 댓글
그러니까 당신 말을, 또다른 측면에서, 어떤 주장으로 받아들인다면,
요즘 우리 나라 사람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먹거리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 아니겠소?
고가의 육류, 수산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호하는 풍조에 반감을 품고 있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육류나 육가공품보다는 특히 바닷물고기좀 그만 먹자는 주장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잖소?
따라서 저 주장은 당신이 평소에도 넋두리처럼 읊어대는 '먹는 걸 아껴야 부자 된다'는 주장의 재판 아닙니까!
향기님의 댓글
이를테면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으흐흐~
향기님의 댓글
저 맨 위에 댓글을 올려주신 允齊께서
내가 '입이 짧다'고 판정하신 것에 대한 불복의 변이기도 하고. 으하하~
향기님의 댓글
한데 말이오.
당신이 입버릇처럼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도 조만간 그리 될 겁니다.
내가 얼마 전에 최근의 세계 수산물 생산과 소비, 교역의 추이에 대한 통계를 관심있게 살펴본 적이 있었다오.
또한 작년부터는, 일부 전문가들이 진작부터 우려하던 바와 같이,
국내 일부 보도 매체에서도 국제적인 수산물 파동에 대한 불안한 전망을 소개하는 기사가 간헐적으로 생산되고 있더이다.
특히 중국의 수산물 생산과 소비, 수출입 동향에 대한 기사가 꽤 여러 번 올라온 적이 있었잖소.
그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중국인들이 드디어 물고기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는 내용이었소.
이 얘기를 약간 부연해보자면,
마치 1990년대의 한국인들처럼, 조만간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물고기를 먹기 시작한다면,
또 지금까지의 수산물 소비 패턴에 더 나아가 활어 중심의 수산물 소비 풍속이 자리잡기 시작한다면,
현재 세계 최대의 수산물 수출국인 중국이 수출은 커녕 최대의 수입국이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미 국내 소비의 3할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유수의 수산물 생산국이면서도 세계 최대의 수산물 수입국이기도 한 일본의 소비자들은,
더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국이나 일본의 중산층ㆍ서민들은,
중국의 수산물 소비가 폭증하면서 그에 따라 엄청나게 높아진 수산물 국제 가격 때문에
더이상 물고기를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소.
향후 중국인들의 수산물 소비가 급증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국제적인 상식이 되었고
벌써 몇 년 전부터는 중국의 수산물 소비가 괄목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통계도 보이더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래도 약과라는 거요.
왜국인만큼은 아니더라도 만약에 우리 나라 사람들처럼 중국인이 물고기를 먹게 된다면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는 국내에서 생선회를 먹어본다는 것은 좀처럼 꿈꾸기 힘든 일이 될 공산이 크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당신처럼 물고기 먹지 말자고 초치는 소리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주장을 힘있게 펼쳐야 하는 거요.
중국인들이 물고기를 본격적으로 먹기 전인 요 몇 년 간만이라도
열나게 최대한 물고기를 먹어주는 것이 그나마 실속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얘기요.
어차피 나중엔 먹기 힘들어질 텐데, 지금이라도 열심이 먹어줘야 그나마 후회를 덜 남기지 않겠소? 크흐흐~
여러분!
몇 년 지나면 먹기 힘듭니다.
더 늦기 전에 속히 돈 벌어서 열심히 먹어둡시다. 으하하~
고은철님의 댓글
제가 쎈자님에 대해 잘 아는 부분은 없지만...
날것은 못드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
그래서 회를 먹자는 제안을 농담삼아 걸었는데...
회도 싫어하지 않으신다니...큰일났군요...ㅋㅋ
저야 워낙 다양한 음식을 조리해 먹는걸 좋아하니...
아마도 말씀하신 ②번 만으로 산다는 것은 힘들겁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②번의 재료로 식단을 꾸리는 것이
요즘 유행하는 웰빙 식단이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뭐 부유하게 자란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시절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가 회를 처음 먹은 것이...군대 제대 하고 학교복학한후 제주도 졸업여행에서
교수들과 처음으로 생선회를 먹게 되었었고, 학교 졸업후 취업을 하게 되면서
회사 직원들과 회식등의 모임을 통해 육식문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음식과...육식의 맛에 취해서 살았던때가 기억납니다...
아울러 말씀대로 생선이 귀해지기 전에 많이 먹어 두어야 할까...
아니면 ②번의 식단으로 서서히 옮기는 습관을 가져보아야 할까 봅니다...^^
지금이야 김치 하나로도 다양한 요리를 해먹는 수준이니...
그다지 육식에 탐닉할 일도 없지만....커가면서 느낀것이 저는 태생적으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참 잘먹는 체질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쎈자님 께서 말씀하신는 "입 넓은 자"중 하나쯤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 잘 못먹는게 있는데...바로 "술" 입니다...
그러면 이렇듯 못먹는게 있느니...
어쩌면 "입 짧은" 무리에 속할 지도 모르겠군요...ㅎㅎ
향기님의 댓글
------------------------ 날짜 구분선 ------------------------
향기님의 댓글
날짜 구분선은 당직자의 '근태 평정'에 기본 자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반드시 그어야 한다는 거~
향기님의 댓글
일요일 오후 3시!
'유로 2012' A조 경기가 끝났습니다.
체코가 1위, 그리스가 2위로 8강에 진출했습니다.
개최국 폴란드는 홈팀의 이점과 꽤 괜찮은 선수 면면에도 불구하고 조 최하위로 탈락했습니다.
초전에서 체코를 무려 4 대 1로 격파했던 러시아도
가장 약체로 분류되던 그리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당해 조3위로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그리스는 예상을 뒤엎고 8강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향기님의 댓글
오!
토요일 늦은밤에도 고은철 님께서 오셨군요~
제가 날 것을 '못 먹는 것'은 아니라지만, 여간해선 '안 먹는 것'도 사실입니다.
역시... 고은철 님께서도 스물 중반이 되어서야 생선회를 처음 접하셨군요.
저 위의 본문에도 나오듯이, 옛날에도 저는 오징어 회나 홍어 무침은 별 문제없이 먹었습니다.
다른 생선회는 설령 먹고 싶었어도 그쪽 지방에선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명태(생태) 토막을 섞어넣은 김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금도 안 먹습니다.
그래도 김치에 새우젓이나 멸치젓을 넣은 것은 이상없이 잘 먹었습니다.
심지어 호불호가 꽤 갈리는 '황석어젓'을 넣은 김치도 아주 잘 먹습니다.
사실... 김치 양념에 섞을 소스를 만들기 위해 솥에 황석어젓을 넣고 오랫동안 다릴 때면
그 냄새가 실로 만만치 않기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더군요. ㅋ
그밖에 꼬막이나 바지락 무침 같이 어패류를 날로 먹는 것에도 별 저항감이 없습니다.
객지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굴을 넣은 김치도 별 무리 없이 먹습니다.
단, 굴만 따로 먹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역시 못 먹는 것은 아니고 그 맛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귀한 음식이었던 '전복'도 저는 별 맛을 모릅니다. ㅋ
요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자주 먹는 생선회도 거의 빠뜨리지 않고 몇 번씩은 먹어봤지만
저는 아무래도 미각이 둔감한 것인지, 그 돈을 주고 그딴 걸 뭐하러 먹나싶습니다. ㅋ
지금까지 간략하게 물고기, 어패류에 대한 제 취향을 밝혀놓았습니다만,
저런 취향을 놓고 '물고기를 날로 저민 음식'을 못 먹는 것이라 단정하기엔 좀 애매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봐도 애매하거든요. 크흐흐~
그래서 약간 관점을 달리해서 제 소속을 따져 보았습니다.
물고기, 어패류(회를 포함)를 장기간 못 먹고도 별다른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과
오랫동안 저런 식품에 접근하는 길이 차단되면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으로 나누어 볼 때,
저는 역시 전자에 속하는 것만은 틀림 없다는 거지요.
향기님의 댓글
아싸!
고은철 님께서도 술을 잘 못 드신다잖소!
요즘 구름과자 못 먹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제도적, 행정적, 윤리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져볼 것도 없이 지극히 온당한 일 아니겠소!
그러니 이참에,
우리처럼 술 못 먹는 사람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 선양하는 일에도
사회적인 관심과 제도적, 행정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오.
내가 문제 제기 차원에서 몹시 간단하고 과격한 법률 초안을 만들었소. 들어보시오.
- 술 잘 못 먹는 사람에게 술자리 동석을 요구하는 행위에는 징역 1년!
- 술을 싫어하는 줄 모르고 술자리 참석을 권했더라도 징역 6개월!
- 직장이나 모임에서 단체로 회식할 때, 단 한 사람만 술 먹는 걸 싫어해도 단체 음주 불가!
술 먹는 사람만이라도 따로 모여 먹자는 제안이나 강요를 공개적으로 일삼는 자에게는 징역 2년!
다음은 제도적인 지원 방안이오.
자동차 면허 시험보듯이 술 면허도 발부해야 하오.
여러 차례에 걸쳐 실기를 치르고 합격한 자에게만 음주권을 부여하는 거지.
실기 시험에는 반드시, 자기 주량을 제대로 알고 절제하는가,
술을 먹고도 주사나 이상 행동을 하지 않는가, 등등의 항목을 철저하게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오.
물론, 알코올 의존증 여부에 대한 검사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오.
술 면허 제도가 시행되면 곧바로 벌칙도 뒤따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내용은 다음과 같소.
- 면허 없이 술을 먹는 자가 적발되면 징역 5년!
으하하~
이런 세상이 과연 올 수 있을까?
향기님의 댓글
에라이~
저땐 삼십 년 전이고!
지금은 첨단의 2012년이고!
요즘이야 싱싱한 물고기를 전국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걸 모른단 말인가!
지금 당장이라도 수산시장에서 사다가 직접 해보면 알 일을... ㅉㅉ
향기님의 댓글
짜증나지~ ㅋㅋ
향기님의 댓글
새글을 만들어서 놀면 안 될까?
향기님의 댓글
좋시다. 그리 가봅시다~
향기님의 댓글
에... 또...
여기 말이요.
댓글이 50개가 넘어가면 뒷장이 생겨 그쪽에 댓글이 생기잖겠소!
그런데 그 상태에서 댓글을 써서 등록을 해보면,
댓글이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페이지는 다시 자동으로 첫페이지로 되돌아간단 말이오!
그러니, 방금 올린 댓글을 확인하려면 다시 뒷페이지를 열고 들어가야 되는 거지.
이거... 너무 불편하지 않습니까?
향기님의 댓글
그래서 말인데,
바로 밑에 아범 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글타래로 이사갑시다!
아무래도 거기 가서 노는 게 나을 것 같소.
향기님의 댓글
전자 종이도 아껴야 복받는 거요.
아범 님께서 저 글을 만들어 놓으신 뜻은,
우리더러 거기 와서 지내라는 의미도 있는 걸로 생각한다오.
댓글도 딱 두 개밖에 없으니 사실상 백지 아니겠소?
그러니, 저리로 옮깁시다.
향기님의 댓글
------------------------ 영업 종료 ------------------------
향기님의 댓글
혹시 몰라 말씀드리는데,
비록 영업은 끝났어도 댓글을 써올리는 일은 여전히 환영합니다! 크흐흐~
향기님의 댓글
그보다 더한 곳도 이미 있잖소.
이슬람 문화권에서 무려 10억 명이 넘는 인류가 끄떡없이 지켜오는 문화 아니겠소!
하지만 우리 나라에선 택도 없을 것이라. 으하하~
향기님의 댓글
당신이 오늘 첫 번째로 올린 댓글을 다시 읽던 중, 옛날 친구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소.
그중 하나는 벌써 삽십 년을 넘긴 옛날 이야기라지만 그땐 꽤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들렸던 터라
요즘도 그 친구를 회고할 때면 그가 했던 말이 자주 떠오르곤 한다오.
그러니까... 그 때가... 학교에 입학하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지 두 주일쯤 지났을 때였는데,
어느날 저녁에 기숙사 식당의 메뉴 중에 '이면수 튀김'이 있었다오.
저땐 흔히 '이면수'라고 칭했지만 본래 정확한 이름이 '임연수어'인 그 물고기를 튀긴 음식이었소.
저녁을 먹자마자 밖으로 나가 기숙사 현관 근처 풀밭에 퍼질러 앉아 과자를 빨고 있었는데
301호(나는 303호ㅋ)에 사는 여수 출신 동기(사회학과)가 다가와서 함께 노닥거리게 되었다오.
그때 그놈이 이야기 끝에, \"튀김이 비려서 간신히 먹었노라\"하길래,
제가 해연히 놀라면서 \"네 이놈!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주식으로 처먹던 놈이 뭔 비린내 타령이냐.\"하면서,
\"오늘 나온 물고기는 본래 비린내가 적은 물고기 아니냐!
비린내라면 내륙 촌놈인 내가 아무래도 너보단 훨씬 민감하다고 볼 수 있는데,
예민한 나도 특별히 냄새가 심하다곤 못하겠도다.\"
그런데 순간, 그놈이 갑자기 진지해지면서 예상 외의 말을 하더란 말이지. ㅋ
그 말을 대충 정리해서 옮겨보면 다음과 같소.
\"멍충아! 형님이 일러주는 말씀을 잘 들어봐라.
본래 바닷가에서 싱싱한 물고기만 잡아먹던 사람들이 비린내에 더 민감한 편이니라.
네놈이 살던 내륙 촌구석에선 맨날 소금에 쩔거나 반쯤은 썩어빠진 생선만 쳐먹다보니
으례 바닷물고기에서는 비린내가 나는 법이라 여길 테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니라.
물고기도 금방 잡아올려 팔팔했을 때는 비린내가 매우 적게 나는 것이고
특히 살만 발라 먹어보면 더욱 그러하니라.
알고보면 물고기 비린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가 진행되면서 더욱 심해지는 것인데,
그동안 네놈이 비린내가 심한 물고기를 자주 접했다는 것은
그만큼 선도가 떨어지고 심지어 썩기 시작한 물고기만 쳐먹고 살았다는 얘기에 다름이 아니니라.
그렇다면, 싱싱한 물고기를, 굽거나하는 다른 방법도 아닌, 그냥 끓여먹어 본다면 어떠할까?
내륙 촌놈의 물고기 지식이 워낙 척박하니, 네놈이 아는 생선으로 골라 예를 들어보겠노라.
정성을 다해 귀를 깨끗히 씻고 형님의 옥음을 청취하여라!
예를 들어, 금방 잡은 조기, 도미, 갈치로 국을 끓여봐라,
썩은 고기만 쳐먹던 네놈은 꿈에서도 몰랐을 기막힌 풍미가 있니라.
너같은 오지 촌놈들은 다른 방법도 아닌 국을 끓여먹게 되면, 비린내가 더 심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비린내 따위는 거의 느낄 수 없고 오히려 구수함과 달짝지근함이 어루어진
차마 뭐라 형용하기 힘든 그런 담백하고 감칠 맛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단 말이다. 멍충아!
하여튼 뭣도 모르는 놈들이 툭하면 비린내 타령은...
소 귀에 경 읽기지, 백날 얘기해야 네놈이 알아먹기나 하겠느냐~
차라리, 이번 여름방학 때 우리 집에 오니라. 내가 갈치 잡아서 국 끓여줄게. \"
여수 출신 동기놈이 입에 침을 튀기며 긴 사설을 늘어놓는 동안에도
나는 아무 대꾸도 못 하고 그냥 가만히 듣기만 했다는 거요. 크흐
그 몇 년 뒤에, 역시 남서해안 바닷가에서 살다 상경한 다른 친구 녀석도
저놈과 비슷한 말을 하긴 했는데 그건 얘기가 너무 길어서 생략해야겠시다.
한편으론, 옛날 저놈들의 말이 진짜일까하는 의심도 약간 있긴 하다오.
하지만 여태도 바닷가 구경을 못 해본 처지라서 검증해볼 기회가 없었다는 거 아니겠소.
여기 회원 중에 바닷가에서 살던 분이 혹시라도 계시다면 좀 알려주시라요.
싱싱한 물고기일수록 비린내가 없고 국을 끓이면 그토록 맛이 좋은지. 으하하~
juniol님의 댓글
스크롤의 압박. ㅎㄷ
짬짬님의 댓글
이건.... 한편의 장편소설을 읽다가 포기한 듯한.... 느낌입니다.... ㅋㅋㅋㅋ
允齊님의 댓글
결과가 제가 좋아라하는 해피엔딩이 아니어서 살짝 아쉽습니다.
갑자기 궁합때문에 '팽' 당하신 분은 꼬옥 잘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또 글을 올려주실지 기둘려집니다.
향기님의 댓글
짬짬 님 말씀대로 언덕을 올라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끝나지요~ ㅋㅋ
글의 '주제'에 부합하는 얘기는 저기까지라서 끊었습니다만,
만약에 '주인공'에게 촛점을 맞추었다면,
이제 막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시점이었습니다.
진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거기에 다 들어있었는데 저도 아쉽습니다. 크흐흐~
향기님의 댓글
짬짬 님 말씀은 약간 다른 뜻인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