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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압구정동으로 불러내지마.

본문

나를 압구정동으로 불러내지마.

잠시 읽던 책에 열중하다가 어깨쯤에 느껴지는 선뜻한 느낌으로 고개를 돌려 창을 내다보니 아주 자잘한 눈송이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손에 올려 두면 차가운 기운만 남기고 조그만 물방울이 되어 사그라질 그런 눈송이가, 이 세상의 모든 가느다란 틈마저 다 메워 버릴 듯이 스며들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을까? 숲 속에 깔린 낙엽들마다 한 숟가락씩 소담스럽게 눈을 담고 있었다. 이런 형태의 눈은 오랫동안 내리는 것이던가? 그저 희미하게

'이봐, 지금은 겨울이라고...'
라고 잠시 상기시켜 주는 정도의 것일까? 담배를 물고 창가에 서자, 눈은 그저 우울한 구름이 되어 산자락에 머물고 있었다.

새로운 담배 갑을 열고 깔끔한 모습의 얼굴을 한 담배들을 바라보았다. 순결하다는 표현은, 아침 일찍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을 뽀드득! 거리며 걷는 것과, 지금처럼 처음 담배 갑을 열었을 때만 써야한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주장하고 싶다. 필터를 집어 하나를 꺼내자,

'나를 먼저 태워주세요!'

라고 말하는 듯이 네 개의 담배가 우르르 쏟아졌다. 나는 미색 책상 위에 흩어진 네 개의 담배 중에서 세 번째 담배를 집어 가스라이터를 켠다. 불이 붙지 않는다. 도대체 가스 라이터라는 것들은 늘 필요할 때 쓸모 없다. 비즈니스가 어려울 때 돌연 떠나는 여자처럼. 문득 지포 라이터가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제법 오래 전에... 성냥을 집어 오렌지색 불꽃을 손끝에 품어 올린다.

맑은 소주에 형광등이 일렁거리며 떠 있다. 지나치게 인위적이다. 생각해 보면 막걸리는 내게 영감을 주지 못했다. 그런 것도 이제 알았다. 막걸리는 묵직하게 나른한 몸을 만들어 주고, 이내 잠에 빠져들게 한다. 생각 같은 것 하지 말고, 그간 고생했으니 이젠 쉬라는 듯이 하품이 얼굴을 가리고 폐를 드나들게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며 삼겹살을 구웠다. 소주는 나를 날카롭게 한다. 쇠를 벼려 칼을 만들 듯이 나를 날카롭게 한다. 소주를 마시고 난 뒤 나는 무엇인가를 찌르고 싶어진다. 나를 가로막은 모든 것들을... 그래서 대학시절 소주에 만취한 날엔 많이도 싸웠나 보다.

전화가 왔다. 내가 알고 있는, 보그 誌(지)에서 걸어나온 듯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다. 우리는 늘 멋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바라보며 오랫동안 좋은 친구가 되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회하고 다시 기대하는 그런 이상적인 관계다.

"술 한잔해요. 나오세요 압구정동으로."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이곳으로 들어와, 산과 숲과 물이 있는 곳에서 소주나 마시지."
"아니에요. 제가 낼게요. 새로 재미난 Bar가 많이 생겼어요."
"나는 그런데 가고 싶지 않아, 신경 쓰여, 옷도 머리도, 모든 것이 신경 쓰여, 술 한잔에 그런 과도한 신경을 쓰긴 싫군! 이리와, 그냥 별자리 아래에서 소주나 마시자."
"꼭 나오세요. 기다릴게요."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아마 삶이 너의 대리석 같은 아름다움에 남긴 앙금 같은 흔적을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 뭔가를 털어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겠지. 그러나 이젠 아니다. 나는 이제 우주의 끝으로 숨어 버렸다. 재규어에 알마니 수트에, Bar의 주인들을 밟고 세상에 군림하던 내가 아니다. 나는 이미 필요 충분 조건에 의하여 겸손한 백수다.

'내게 거짓말을 강요하지 말아 줘.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야. 평균적인 시각에 의하여 나는 바보고 나는 어리석고 나는 가난해. 나를 압구정동으로 불러내지마. 너는 아름다워. 그러나 나는 이제 고목이 되어간다. 허리쯤에 적당히 붉은 버섯을 달고 말이야. 내게 부지런과 매너와 에티켓과, 가진 자의 미소 같은 것을 강요하지 말아 줘. 나는 울고 싶어. 나는 웃고 싶어. 자유롭게 말이지. 그러니 내게 강요하지 말아 줘.'

라고 마음속으로 웅변처럼 떠들지만, 나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고 만다.

"그래. 내일 내가 전화할게"

그리고 다시 마음속으로 말한다.

'네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아. 나는 나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내게 강요하지 말아 줘.'

어제의 내일인 오늘, 나는 홀로 삼겹살을 굽는다. 조금 허옇게 변하고 이내 지글거리며 고동색으로 기름이 배어나며 맛나게 익는다. 머그 잔에 따른 소주를 단숨에 들이킨다, 세상이 편안하게 자리 잡는다. 나는 이렇게 살 거야.

"제가 낼게요. 하이야트에서 만나요. J&B jet 좋아 하시잖아요."
'그래 나는 바로 그 위스키를 좋아해. 하지만 내게 그걸 강요하지는 제발 말아 줘...'??

전화기는 진동으로 바뀌고 익숙한 번호가 표시된다, 너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너의 고독이 느껴진다, 너의 슬픔이 진동으로 울린다,

"지이이..."

그러나 나는 받지 않는다. 나는 삼겹살을 뒤집고 밭에서 갓 딴 배추 한입을 베어 문다. 향긋한 배추 향이 입가에 머문다. 삼겹살과 배추와 된장, 그리고 마늘, 나는 그들을 소주로 닦아낸다. 오늘 하루를 마저 닦아낸다. 꿈이 현실을 닦아내듯 닦아내고 만다...

'제기랄. 너는 너무나 아름답고 나의 상대적인 현실은 너무나 남루하다. 너는 죽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행성에 존재하는 것이 다시 증명된다.

'그게 무슨 상관?'
이라고 너는 말하겠지. 그러나 삶에 상관이 없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인지하고 상관함으로 하여 존재한다. 나는 한 잔 술을 위하여 나를 치장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다시 전화가 울린다.
춤추는 허리 라인이 장어같이 아름다운 너.
머그 잔에 가득한 소주를 방금 입에 털어 넣은 나.
우리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다. 아름다운 너, 우울한 대화. 나는 오늘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혼자 Gustav mahler의 Symphony를 들으며 소주를 마신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 네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혼자 고개를 젓는다. 일식에서 월식까지의 지루한 기다림처럼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잠깐 걸음이 어질 하지만 괜찮다. 나는 오늘 나를 잘 붙들어 매두었다. 아름답고 가여운 너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겸손한 백수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 그렇게 혼자 고독한 숲에 비친 천랑(天狼)좌에 머무르는 것 정도다.

겸손한 거짓말쟁이가 서식하는 공허한 숲에서, 새로 이사를 갈 남한 강변의 오두막에 대하여 홀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전화는 늘 일정한 톤으로 울린다. 울림에 감정 같은 것은 들어가 있지 않다. 메마른 음성이다. 그 속에서 들려올 소식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오로지 받는 자의 몫이다.

"지금 가고있어."

친분이 두터운 형님의 음성이다.

"뭐 필요한 것 없어?"
"없어요."
"뭐는 있니?"
"없어요."
"그럼 뭐는 있어?"
"그것도 없네요."
"허허 이런, 아무 것도 없으면서 뭐가 필요한 게 없어? 장 좀 봐서 갈게"

전화를 내려놓고 나는 천천히 거실을 걷는다. 필요한 것들이 없어도 부족하거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불편이, 불편하지 않은 것으로 서서히 적응되어 가는 것인가 보다.

희망은 점점 작아지지만, 행복은 점점 자라난다. 부족함이 많아도 편안한 내가 마음에 든다. 미소를 하나 떠올리며 차를 마신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리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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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3

잿빛하늘님의 댓글

悠悠自適....

명기님 글을 보고 난 왜 이렇게 아둥바둥 사는지.....
석가모니가 일곱발짝을 떼고는 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쳤다는 오늘도 출근을 했다.

벌면 얼마나 벌거냐?
"하지만 이거라도 안벌면 아들놈에게 줄 '왕꿈틀이'도 못 사고 곧 태어날 둘째 분유도 못산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본다.

hongwu님의 댓글

명기님 오늘 책 잘 받았습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4월5일 곤지암 소인이 찍힌 소포가 5월25일인 오늘 도착하다니... 하지만 좋은 글은 시련이 있더라도 얻을 가치가 충분하지요. 보내주신 책 잘 읽겠습니다.

iceberg님의 댓글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어울리는 사람'도 있을까요?

청담동 bar와 갤러리아명품관을 들락거리며 사는 사람이랑 시골 별빛 아래서 소주를 마시는 사람하고는 정말로 결코 어울릴수 없는건지...

장욱님의 댓글

허걱- 지금 청담동에 있는데... 곧 갤러리아 가야 하는데...

장욱님의 댓글

하필이면 청담동에 와있는 날 이런 글이...

김명기님의 댓글

우리가 진 짐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 어찌 그들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김명기님의 댓글

책이 드디어 도착했군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책은 도대체 그동안 어떤 여행을 한 것일까요? 다음엔 책에다 소형 카메라를 장착하여 보내고 싶네요. 아마 상당한 모험을 했을 것 같은데... ^~^

김명기님의 댓글

그런 것은 잘 모르겠지만, 절대로 어울려서는 안되는 사람은 있더군요. ^~^

김명기님의 댓글

청당동이요? ㅎㅎㅎ 멋진 레스토랑 소개해 주세요... ^~^

adam님의 댓글

희망은 점점 작아지지만 행복은 자라난다. 흠..과연 희망이 없는 행복함이 진정한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장욱님의 댓글

제 아드님께선 청담동, 압구정동 아니 어디서든지 외식하시는걸 좋아 하시지만... 저는 어디가 좋은지 잘 모르겠네요 오래 전에 먹는다는 자체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이제 저에겐 그냥 가까운 갤러리아에서 장봐다 아들놈 챙겨 먹이는게 제일 큰 낙입니다 먹고 있는걸 보고 있으면...

멋진 레스토랑을 추천하라구요...음...

김명기님과 김명기님께서 사랑하는 여성을 위해서라면...특히 신혼여행을 위해서라면...

기회가 닿으시면 hongwu님 사시는 동네에 Alice Waters가 하는 Chez Panisse에 꼭 가보세요 아마 김명기님께서 꿈꾸는 요리가 Alice Waters가 챙겨주는 식단일 것입니다 바로 김명기님께서 올리신 글의 내용과 똑 같은...

LA에선 L'Orangerie 그리고 Washington D.C.에선 Watergate Hotel에 있는 Paladin, 뉴욕에선 Lutec에도 가보시구요 신혼여행을 미국으로 가신다면 저 중에서 한 곳은 꼭 가보세요

만약 빠리로 신혼여행 가신다면 Alan Ducasse에 꼭 가시구요 참 Alan Ducasse는 뉴욕 Plaza호텔에도 문을 열었다고 하던데..

김명기님께서 사랑하는 여성과 딱 어울릴 곳들입니다

사실 제주도 신혼여행 가 신라호텔에서 주무시는 비용이나 미국 다녀오시는 비용이나 비슷할 것입니다

장욱님의 댓글

신혼여행 다녀오시는 동안 전 여백님이랑 동래파전이나 먹고 있겠습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앗! 감사... 꼭 들러 보겠습니다. 동래파전... 흠 그쪽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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