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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를 위한 건배.

본문

C를 위한 건배. 

어? 이게 얼마만이야?
정말 반가워. 15년 만이던가? 20년 만인지도 모르겠군.

얼싸안고 감격스러워하는 이들의 머리는, 반백이기도 하고 도토리처럼 반짝반짝 벗겨져 있기도 하다. 40대 후반의 아저씨들이 기억하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들은 이미 함부로 반말을 하기에도 조심스러운 근엄한 얼굴이다. 그 동그랗고 오밀조밀하던 귀여운 얼굴들에, 세월은 함부로 손톱자국을 남겨 두었다.

작은 도시의 동창생들이 느끼는 감회는, 어린 시절의 부모님, 코 찔찔이 동생들, 설익은 권위의 형님 누나들 기억으로 더욱 다양한 심도의 흑백 사진이다. 결국 다 같이 한 마디씩 하는 것은, 세월이라니!

저 친구는 5년 전에 위장을 몽땅 들어냈지.
그래?
난 당뇨가 벌써 12년째야.
오호.

이런 건 그저 흔한 안부.

이번에 사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8억 날렸어.
A는 노모와 함께 월세 방에 산대. 그렇게 떵떵 거리며 살던 친구가. 
B알지?
그럼. 알고말고.
B는 중요한 계약서가 사라진 바람에 소송에서 졌지. 그래서 12개월 살고 나왔어. 다른 사람도 아닌 매제와 소송이 붙었는데, 결국 여동생도 이혼하고 말았지. 그런데 이번에 이사 하다가 그 서류가 책장 뒤에서 나왔다지 뭔가. 새로 소송 시작한대는군.

이런 건 그저 먹고 사는 이야기.

이번에 애가 두 돌이 되지.
뭐야? 우리 애는 군대 가려고 휴학했는데. 자네 도둑놈이로군. 그래 늦장가 가니 좋아?

이런 건 그나마 주름 사이로 미소가 배어 나오는 이야기.

40대 아저씨들의 대화에는 별 신통한 것들이 없다. 다만 20~30대에는 짐작도 못할 만큼 인생은 다양하고, 깊고, 때로 고통스럽다. 우리 중 아무도 삶이 이런 식으로 풀려나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아름다운 아내와 예쁘게 살고, 그러다 보면 아이들이 자라나고, 우리는 늙고,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미소를 띄우며 안부를 묻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혼이라니, 소송이라니, 실패라니. 도대체 우리는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을까?

C는 어떻게 살아?
C? 말도 마. 그 친구는 최악이지.
뭐?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보다 더 나쁘단 말인가? 혹시?
걱정 마, 이친구야. 죽은 건 아니야.
그건 다행이군.
C가 여기에서 건축업을 크게 했잖아? 그 친구 성격대로 꼼꼼하게 일도 열심히 했지. 그랬는데, 저쪽 사거리 큰 빌딩 두 채를 리모델링하고 망가졌어. 계약금만 받고 일단 일을 진행했는데, 중도금이 자꾸 늦어져서 자기 자금을 넣었나봐. 그런데 건축주가 땡전 한 푼 없는 바지 사장이었대. 진짜 배후엔 사채업자가 있었고.
저런 세상에.
결국 부도가 났지. 그 친구가 워낙 신용이 좋아서 20년 넘게 거래하던 곳에서 물건을 계속 대줬나봐. 마지막엔 자기 집과 땅을 팔아서 직원과 인부들 급여 주고 만세 부른 거야. 그래도 아내와 자식에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위장 이혼을 했지. 그랬는데.

'그랬는데' 에서 친구의 눈은 조금 작아지고, 어깨를 낮춘다. 듣고 있던 친구들도 모두 반백의 머리와 도토리처럼 벗겨진 머리를 모은다. 꼭 못된 짓을 모의하던 40년 전의 꼬맹이들 그대로다.

그랬는데 아내에게 남자가 있었던 거야. 얼씨구나 하고 돈을 들고 남자와 함께 의정부로 튀었지. 그래서 C는 그야말로 알거지가 된 거야.

이런 건 정말 씁쓸하다. 아무도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다. 누구 이 더러운 이야기를 더 이끌어 가고 싶을까? 다들 서둘러 주제를 바꾼다. 이번엔 어른들의 안부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그 후가 정말 궁금했다.  C는 지하철에 뛰어들지는 못을 것이다. 이곳에는 아직 지하철이 없다. 어쩌면 바다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아 참 C가 죽지는 않았댔지.

응. 지금 천안에 살아.
거기서 뭐해?
주유소 야간 급유원을 해.
뭐? 명문대를 나와서 건설회사 하던 친구가?
그러게. 우리가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그런 것 밖에 더 있나? 그래도 그 월급으로 전처에게 애들 양육비도 보낸대.
세상에 외간남자와 도망친 전처에게 돈을 준다고?
그래. 워낙 그자식이 그렇잖아. 그래도 열심히 돈 모아서 종자돈 오천만 마련하면 다시 재기할거래.

나는 비로써 눈가에 미소를 떠올린다. 아마 습기 축축한 미소일 것이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막다른 길에서도 우리의 친구  C는 씩씩하게도 삶과의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C는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좌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C는 언젠가 자신이 옮았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가여운 아이들에게 증명하고, 도망친 아내에게 증명할 것이다.

적어도 C는 희망을 놓지는 않았다. 머지않아 C는 다시 이 자리에 나타나 담담하게 말 할 것이다.

그동안 고생 좀 했지.

중년의 얼굴들에 취기가 돌자, 숨겨져 있던 어린이들이 하나 둘씩 나타난다. 여기저기서 건배가 외쳐지고, 자리는 떠들썩해진다. 나는 잠시 잔을 들고 C를 생각한다. 이윽고 작은 C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겨라! 이겨라! 우리 C야 이겨라.
힘내라! 힘내라! 우리 C야 힘내라.

파랑색 릴레이 막대기를 들고, 다람쥐처럼 운동장을 내닫던 그 시절 꼬맹이에게 외치듯, 나는 마음속으로 응원한다. 그때 C는 전력으로 하얀 트랙으로 뛰며 아마 나를 흘깃 돌아보았던 것도 같다.

자, 다들 C를 위해 건배. 정말로, 진심으로 우리 C를 위해 건배. 

건배!


송화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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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8

김정기님의 댓글

삶이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그까이꺼대충님의 댓글

그까이꺼대충님의 댓글

근데 아래사진 바다색과 하늘 정말 쥑입니다~

새침한천년이님의 댓글

위장이혼.......
그런경우가 종종 있나봐요...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C친구분 부디 다시 행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dEepBLue님의 댓글

저도 축축한습기가득한 미소가 띄어지네요...

전종호님의 댓글

가슴 아픈 이야기네요 ㅠ.ㅠ 부디 재기 성공하시길!

박시자님의 댓글

잘되겠지요.......힘내시길....

무언의언어님의 댓글

누군가를 위한 건배... 모두를 위한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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