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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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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마침내 비가 내리자, 장마철 습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는 자동차 앞유리를 흐리게 만들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슥슥 유리창을 문지르며 서리를 닦아냈다. 잠시 말갛게 내다보이던 차창 밖의 풍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서리로 흐려진다. 할 수 없다.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고물 자동차로 더 이상 뭘 어쩌겠는가?

나는 오른손으로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문다. 반쯤 열린 차창으로 불어 들어오는 습한 바람에 가스라이터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나는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고 라디오를 켠다. 비는 언제쯤 멈출까? 잠시 지직거리던 라디오에서는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흘러나온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날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마침 얼룩지고 흐려진 앞유리 위쪽으로 붉은 신호등이 천천히 다가온다. 나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어 동그란 공간을 만들고 담배 끝으로 불을 옮긴다. 길게 담배연기를 뿜는다. 담배연기는 차창에 부딛치고 옆으로 넓게 퍼지고 난 뒤, 가벼운 바람을 따라 차창 밖으로 빨려 나간다.

그래 이맘 때쯤이었을 거야. 과거와 더 먼 과거의 이야기..

그때 차창 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 나는 앞만 바라보며 모래알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 높 낮이가 없는 메마른 음성으로 중얼 거렸어.

"당신이 많이 힘들어 하는 것 알아. 요즘 우리는 서로를 더 힘들게 하고 있지? 전에는 그런 일 없었잖아. 이제 우리는 조금씩 더 멀어지고 말거야. 당신이 아니라고 도리질을 한다해도 변하는 것은 없어. 당신은 아직 심각하지 않게 여기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의 내부에서는 이미 이별이 시작되고 있는거야. 아니 우리의 내부라고 하는 것이 옳겠군."

"..."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나는 이런 상황을 이미 알고 있어. 어쩌면 당신은 무슨 소리일까? 의아해 할지도 몰라. 하지만 우린 끝났어. 시작의 끝이 아니라, 끝의 시작."

"그런 ... 이야기가 어디있어요? 나는 생각이 달라요."

"이미 시작된 균열을 멈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당신도 그정도는 이미 알고 있잖아? 나는 충분히 불행했어. 이젠 그런 불행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아. 나는 행복하고 싶어. 나를 앞에 두고 망설이거나, 후회하거나, 억지로 누군가에게 맞추어 주어야 하는 그런 일상적인 불행을 멈추고 싶어."

"..."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해. 헛된 결심 같은 것도 그만둬.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당신도 나도 더 이상 못견딜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거야. 적어도 우리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남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내 말을 알아듣겠어?"

당신은 자동차의 앞 유리에 낀 서리를 손으로 닦아내고, 빗물에 흘러내리는 거리를 아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지. 꿈이라도 꾸는 듯한 멍한 눈 빛으로 지나가는 거리를 바라보며,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우리가 처음 헤어졌을 때 같은, 오열도, 격정도, 감정의 파도조차도 없었어. 생각보다 열다섯 배쯤 더 가벼운 안녕이었다고 기억해.

우리는 그저 빗물에 번진 신호등에 따라 멈추고, 조금씩 흔들리며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다, 다시 멈추곤했지. 나는 목이 불편한 사람처럼 계속 앞만 바라보았군. F.M. 에선 김현식의 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어. 나는 라디오를 꺼버렸지. 그날 우리의 사랑도 꺼졌어. 완전하게.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오~ 아름다운 음악같은 우리에 사랑의 이야기들을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몇 달이 흘렀어.
나는 나 자신을 시간에 맡겨 버렸어. 바빠야 했어. 몰두할 뭔가가 필요했고. 그 해 가을엔 비가 무척 자주왔어. 그날도 텅빈 도시엔 가을비가 대지로 스며들 듯 내리고 있었지. 옐로우 오우커로 곱게 물든 은행나무 잎 끝에, 빗방울이 고여 멈칫거리고 있었어.

수채화 속을 서서히 움직이던 자동차가 마침내 신호등 앞에서 멈추었을 때, 나는 차창에 낀 서리를 닦으려고 몸을 굽혔어. 묘한 것은, F.M.에서 마침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흐르더군.

그때였어. 앞유리창 오른쪽 구석에, 익숙한 크기의 조그만 손자국과 점선으로 이어진 가늘고 긴 손가락의 흔적을 보았지. 그것이 누구의 손자국인지 갑자기 기억났어.

온 몸에, 조여드는 것처럼 소름이 돋더군. 나는 시간이 빠르게 뒤로 감겨드는 것을 느꼈어. 갑자기, 블랙 홀을 통과해 우주의 끝에 내던져지기라도 한것처럼 외로워졌어. 굵은 바늘 같은 것이 심장을 쿡쿡 찌르는, 통증이 아주 심한 고독 말이야.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어쩐 일인지 조금 어지러워져서 길가에 차를 멈추었지. 차창을 조금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어. 나는 다시 라디오를 껐어. 모든 것은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게 반복 중이었어.

'뭐가 잘못 된 거지?'

나는 다시 한 번 손자국을 바라보았어. 그리고 그 아래 흔들리고 삐뚤어진 조그만 글씨를 보았지.

'바보'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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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9

hongwu님의 댓글

가슴에 스며드는 짧은 글이군요... 일상에 있을 것만 같은.... 그러나 결코 없는 그런 글...

김명기님의 댓글

이런 추억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사는 것은 일종의 병일지도 모릅니다. 홍우님 한국엔 언제쯤 오시나요? ^~^

iceberg님의 댓글

오랜만에(?) 글을 올리셨네요, 바쁘셨나봅니다.

'바보'라는 짧은 한 단어가 와닿네요...

김명기님의 댓글

네 8월에 있을 서울서 부산까지의 기마국토종주 준비로 조금 분주합니다.

adam님의 댓글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비오는 날이면 항상 부르던 레파토리 였는데...
오늘도 비가 내립니다. 그렇게 아픈비가...

라니님의 댓글

출근하자 마자 읽어봤는데요..
오늘 내리는 비와.. 글이 너무 잘 어울리네요...

김명기님의 댓글

노래방 가기를 죽도록 싫어하지만, 어쨌던 한 번 가면, 그리고 술이 떡이 되면... 꽥꽥.... ^~^

김명기님의 댓글

라니님 감사합니다. 어쩌다 생각이 나버렸네요... 그런 일도 있었구나... 참 기억력의 쓸데없는 참견이라니...

넘힘든하루님의 댓글

때론 언어가 메아리가 되어 나에게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때의 말이 그 사람을 향한 것이었는지 나를 향한 것이었는지 알수없는 묘연함.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바보'는 그런 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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